우리나라 현대사의 비극적인 유적 알뜨르비행장(제주도 세달살기 2020.10.17)

2020. 10. 18. 10:04나의 이야기

 

대나무로 만든 파랑새 소녀상 조형물과 삼방산 그리고 한라산의 아름다운 전경

 

 

알뜨르 비행장에서 바라다본 삼방산과 한라산 전경

 

 오늘 아침 제주 명도암의 숙소를 떠나 마복이 오름과 서영아리오름을 탐방한 뒤에 밀면으로 점심을

먹기 위하여 대정으로 왔다가 귀경길에 잠시 들린 알뜨르 비행장 전경으로 이 곳은 서귀포에

한달간 살기를 하면서 수차례에 걸쳐 지나치던 곳으로 크게 볼거리가 없던 곳으로 여겨 늘

그냥 지나치곤하였는데 오늘은 조금 여유가 생겨 이 곳을 상세히 돌아보았습니다.

 

그런데 오늘도 제가 새삼 느꼈던 것은 여행은 발품을

판 것 만큼만 보인다는 것입니다.

 

늘 지나치던 곳에서 우리나라의 어두웠던 과거를 되돌아볼 수 있었고 일제 치하에서 동원으로

이 알뜨르 비행장을 만들기 위하여 고생을 하였던 제주도민들의 삶이 얼마나 고달펐었는지

이해가 되더군요.

 

일본 패망직전에 제주도에 주둔한 일본군이 7만 5천 명 정도 가량이었다고 하는데 그 당시 제주도민이

23만정도 였었으니 제주 도민의 1/3을 차지하고 있었던 일본군인들이 제주도를 어느 정도로

요새화하였을 지에 대하여 짐작을 하실 수 있으리란 생각입니다.

 

그런 탓에 제주도의 어느 지역을 가든 일본군의 잔해는 아직도 깊은 생체기로 남아 있어

이 곳을 찾은 나그네의 마음을 우울하게 합니다.

 

 

 

격납고에서 바라다 본 파랑새 소녀상 조형물

 

 

 

대나무로 만들어진 파랑새 소녀상 조형물

 

 

섯알오름 앞의 정자각

 

 

다크투어리즘(dark tourism) 동의어로 블랙 투어리즘( black tourism), 그리프 투어리즘( grief tourism)이

있는데 전쟁이나 학살처럼 비극적인 역사 현장이나 대규모 재난재해가 일어났던 곳을 돌아보며 교훈을 얻는

 여행을 말합니다.

 

 

알뜨르 비행장은 제주도 서귀포시 상모리에 있는 비행장으로

아래 벌판을 의미하는 제주어입니다.

 

일제 강점기 최초의 알뜨르 비행장은 제주도민들이 대를 이어

농사를 짓던 농지목초지였었습니다.

 

일제 강점기를 맞이한 후에는 일본 조선군모슬포 주민들을 동원하여 1920년대부터

1930년대 중반까지 군용 비행장으로 건설하였습니다.

 

66 ha 넓이의 비행장 안에 폭 20m, 높이 4m, 길이 10.5m 규모의 20개 격납고가 세워졌고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본격적으로 전초 기지로 쓰이기 시작하면서, 약 700 km

떨어진 중국의 도시인 난징을 폭격하기 위해 오무라 해군 항공대의 많은 전투기가

출격하였다고 합니다.

 

중일전쟁 기간 중 2차 공사를 통해서 규모는 40만 평으로 확장되었는데 1938년 11월에

일본군이 상하이를 점령하면서 오무라 해군항공대는 중국 본토로 옮겨졌고 이에 따라

알뜨르 비행장도 연습 비행장이 되었습니다.

 

1942년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면서 본격적인 요새화가

진행되어 264 ha로 학장되었습니다.

 

1944년 10월 3차 공사로 레이다 진지와 각종 지하 진지들이 건설되었고 1945년 2월 9일,

결호 작전이 승인되면서 연합국의 상륙에 대비하여 각 시설을 잇는 터널 네트워크

형성되었다고 합니다.

 

한국 전쟁이 발발하여 제주도로 건너온 육군 제25교육연대가 모슬포의 오무라 병영

제1훈련소를 차리면서 알뜨르 비행장을 훈련장으로 이용하였습니다.

 

제5공군 군사고문 단원들이 주둔하였는데, 이때부터 K-40 비행장으로도

알려지기 시작하였습니다.

 

현재 대부분의 땅이 농지화 되는 등 규모가 축소되고 길이 약 1200m, 폭 250~260m의 착륙대와 주기장 등

일부 시설 잔해, 그리고 유명한 열아홉 개의 콘크리트 격납고가 현재 남아있습니다.

 

격납고들은 한때 농민들에 의해 자연스럽게 창고처럼 사용되었고 지금은 대개 그 안이 비어 있는데

그중 하나에는 평화를 기원하는 조형물로 철근으로 제작한 제로 전투기의 모형이 들어가 있습니다.

 

2006년 11월 29일, 대한민국 근대 문화유산 등록문화재로서 격납고, 지하벙커,

셋 알 오름의 동굴진지와 고사포 진지가 지정되었습니다.

 

 

 

철근으로 형상화한 제로 전투기 모형

 

 

격납 고안의 제로 전투기 모형물 앞에서

 

 

격납고 후면의 상부 구간은 일부 통풍이 되는 구조

 

 

1937년 상하이 전투(제2차 상하이 사변) 당시 일본 해군의 95식 육상 공격기(G2 H1) 6대와

96식 육상 공격기(G3M) 6대가 폭격 거점으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즉 중일전쟁 당시 중국으로 향하던 전투기와 폭격기들의 중간 기착지 역할을 한 곳이

바로 이 알뜨르 비행장인 탓에 에 알뜨르 비행장이 난징 대학살의 배후 거점으로도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확장을 거듭해서 해방 직후엔 약 80만 평에 달했으나 땅만 넓다 뿐이지 전쟁 말기의 모자란 자원과

지역 주민 강제 동원이란 비효율적 방식으로 공사를]한 데다 나중엔 그 모자라는 자재나 인력도

결전 기지 공사에 쓰다 보니 완공도 못한 채 패망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대부분 일본 측 자료라 100% 확신하긴 어렵지만 가미카제 기지로 쓰이기 위한 결전 기지 공사를

비행장 내부 및 주변에 하긴 했는데 엄밀히 말하면 가미카제 "비행기"가 아니라 가미카제

"선박" 기지로 쓰였다고 합니다.

 

진짜 가미카제 비행사 육성 기지는 김해공항 같은 육지 공항이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만약 결전 작전이

진행되는 최악의 상황이 왔다면 거점기지로 쓰였을 가능성은 높다고 하겠습니다.

해방 후 미군이 시설을 인수받은 뒤 다시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엔 대한민국 국군이 사용하게 됐고,

한때는 육군 제1훈련소(강병대)로 운영되기도 했습니다.

 

알뜨르 비행장은 현재 국방부가 예비시설로서 확보하고 있습니다.

현재 대부분의 땅이 농지화 되는 등 규모가 축소되고 길이 약 1200m, 폭 250~260m의 착륙대와

주기장 등 일부 시설 잔해, 그리고 유명한 열아홉 개의 콘크리트 격납고가 현재 남아있습니다.

 

격납고들은 한때 농민들에 의해 자연스럽게 창고처럼 사용되었고

지금은 대개 그 안이 비어 있습니다.

 

그중 하나에 평화를 기원하는 조형물로 철근으로 제작한

제로 전투기의 모형이 들어가 있습니다.

 

 

 

곱게 핀 감자 꽃밭 사이로 바라다 보이는 삼방산 그리고 한라산

 

 

너른 들녘 여기저기 세워져 있는 격납고 전경

 

 

물탱크 건물로 현재에는 관광객들이 올라가서 사진을 찍을 수 있는 명소로 변했으나

오래전에는 농사를 짓던  농민들이 가뭄을 위한 물탱크 저장소로 사용되었던 곳인데 

이 부근에 관제탑 안내판 때문에 관제탑으로 잘못 알려진 곳입니다.

 

실제로는 지하벙커 위 상부가 관제탑 역할을 했던 것으로 알

켜져 있습니다.

 

 

알뜨르 비행장 지하벙커 출입구

 

 

지하벙커 내의 출입문 전경

 

 

지하 벙커 내부 전경

 

 

지하 벙커 내에서

 

 

지하벙커 출구 전경

 

 

자주색 감자꽃

 

 

브루클리 밭 너머로 보이는 삼방산과 한라산

 

 

물탱크 탑 위에 올라가서 알뜨르 비행장을 조망하는 관광객들

 

 

부르클리 밭 전경

 

 

셋 알 오름 아래에 설치된 일본군 지하동굴 전경

 

 

붕괴 위험으로 출입문은 굳게 닫혀 버린....

 

 

셋알오름 정상부에 설치된 일본군 고사포진지 전경

 

 

고사포 진지 출입문 전경

 

 

셋알오름 정상부에서 바라다보는 운진항 주변 해안 전경

 

 

올레 10코스 이기도 한 셋 알 오름 상부 전경

 

 

일본군 고사포진지 내부 사진으로 폭격을 피하기 위한 대피 시설도 있는......

 

 

셋알오름 고사포 진지에서 바라다본 삼방산

 

 

셋 알 오름에서 바라다 보는 송악산 후면의 운진항쪽 해변 전경

 

 

알오름 정상부에서 바라다본 단산 오름(바금지) 전경으로 아기자기한 산세가 무척 아름다운 오름으로

올라갔던 오름 이기에 시간이 허락되는 대로 여러분 들께 올려드릴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