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 25. 19:06ㆍ나의 이야기
와인 문(Puerta del Vino)
무어 왕조 때 지어진 부분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알카사바, 즉 성곽으로
지금은 거대한 외벽과 탑, 방벽들만이 남아 있습니다.
알카사바 안쪽에 알람브라 궁전이 있고, 그 안쪽에 알람브라 알타
(상부 알람브라)가 있습니다.
알람브라 알타는 원래 관리와 시종들이 살던 곳으로 정부
소재지인 국왕도시의 일부였습니다.
토레 케브라다(Torre Quebrada)
부서진 탑
공물의 탑(Torre del Homenaje)
전면에 보이는 나사리에스 궁전(Palacios Nazaríes)
알바이신 지구
알바이신 지구 전경
이번 여행을 함께한 김사장님 내외분과 이선생님
알바이신 지구 니콜라스 전망대 전경
무기 탑(Torre de las Armas)에서
메인 광장(Plaza de armas)
전면의 건물은 부서진 탑(Torre Quebrada)
알카사바는 알람브라 궁전에서도 가장 오래된 성채로,
30여 개의 망루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높은 벨라 탑에 오르면 그라나다 시내가 한눈에 들어오는데
건물들 사이로 보이는 시가지 전경은 무척이나 환상적입니다.
개별 여행을 온 한국인 젊은 처자들
벨라의 탑을 오르면서 바라다보는 탑의 내부 천장
알람브라 벨라의 탑(Torre de la Vela Alhambra)
원래 그라나다는 아랍인들에 의해 고대도시 일리베리스 근처에 세워진 도시로 이 고대도시를
중심으로 무하마드 이븐 나스르가 나스르 왕조(그라나다왕국, 1231~1492년)를
열면서 번창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의 집권 초기 상황은 그다지 좋지 않아서 그라나다를 정복한 지 7년이 되는
1245년에 그라나다 북쪽을 기독교도에게 빼앗겼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그라나다가 안달루시아 지방의 한쪽을 차지했던 다른 이슬람교도들보다 2세기 이상 더 오래 스페인 기독교도들의 공격(레콩키스타)을 버텨낼 수 있었던 것은 군사력이 강해서가 아니라 외교적 수완 때문이었는데 빼앗긴 영토를 회복하기에는 장병이 너무나 부족했으므로 철저하게 방위하는 것이 최선이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도의 침입에 대비하여 상시 전투태세를 유지할 수도 없는 일이어서 이븐 나스르의 생각은 기독교인의 동향을 사전에 철저하게 파악하면 이들의 침공에 대비할 수 있다는 것이었지요.
한마디로 정확한 정보를 보다 빨리 얻는 것인데 나스르는 이를 위해 방대한 정보 조직망을 구축했다고 합니다.
도시 요소요소에 소위 신호탑을 설치하여 알람브라 인근을 지나는 사람으로부터 정보를
수집했고, 비상사태가 있을 때는 특수한 거울이나 연기를 이용하여 궁성에 보고토록 했습니다.
그라나다의 이슬람 왕국은 ‘무혈인계’로 마감했는데 그라나다 왕국의 마지막 지도자였던 아브 압달라는
1492년 에스파냐의 기독교 왕국을 합병한 공동 통치 군주인 이사벨과 페르난도의 군대가 몰려오자
수십만 명이 넘는 이슬람교도들을 보호하기 위해 무조건 항복했습니다.
그는 그라나다왕국의 종교와 재산권 그리고 상권을 유지시켜
달라는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왕으로서는 백성을 보호하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겠지만
모두가 여기에 동의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전쟁 없이 무혈인계한 것에 대해 크게 노해 아들에게 “네가 남자답게
왕국을 지키지 못했으니 여자처럼 울어라”는 말을 남기고 궁전을 떠났다고 합니다.
그라나다를 점령한 에스파냐 통치자는 아브 압달라의 요청과는
달리 무혈인계의 약속들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라나다를 점령한 지 4개월이 흐른 뒤 유명한 ‘알람브라 칙령’을 내리는데
우리의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신 지 1492년이 되는 해의 3월 31일,
그라나다에서 이 교서를 반포한다.
유대인들은 빈부와 귀천, 남녀노소, 거주 지역, 현지 출생 여부를 불문하고 모두 떠나라.
당시 에스파냐에 살고 있던 유대인 숫자는 정확하지 않지만 최소 10만 명에서
80만 명까지로 예상한다고 합니다.
이처럼 에스파냐에 많은 유대인이 살고 있었던 이유는 이슬람 왕국의 관용 때문으로 이슬람교의
시조인 무하마드가 ‘유일신을 믿는 종교는 우대하라’라고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에스파냐의 유대인들은 사소한 차별 규정, 예를 들어 말 대신 노새를 타고, 노란색 터번이나
띠를 두르고 종교 활동을 요란스럽게 해서는 안 된다는 규정의 적용은 받았지만 다른 지역의
차별에 비하면 심각한 정도는 아니었다고 합니다.
갑작스러운 유대인의 추방은 이사벨과 페르난도 2세의 종교관 때문으로 자신들은 관용을
베풀었음에도 유대인들은 ‘사악한 신앙과 음탕한 관습, 율법’을 고집하며 성스러운
기독교에 해악과 오욕을 끼쳤다는 것이지요.
유대인들에게 제시한 기한은 고작 넉 달로 조상 대대로 수백 년을 다져온
삶의 터전을 불과 4개월 안에 정리해 떠나라고 강요한 것이지요.
유대인에게 악몽인 이들 칙령은 철저하게 지켜졌기 때문에
모든 유대인은 빈털터리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유대인들은 피난 지역으로 이슬람권을 가장 선호했는데 이들 중
6만여 명이 포르투갈을 선택했다고 합니다.
포르투갈은 일정한 세금만 받고 입국을 허용했기 때문으로 하지만 그들 역시 에스파냐와
똑같은 이유로 유대인들을 추방시키자 다시 네덜란드에 정착하게 됩니다.
네덜란드의 황금기는 바로 이들 유대인들이 건설한 것으로 결국 에스파냐의 영광과 몰락은
바로 이들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것이 정설 아닌 정설이라고 합니다.
세계 경제사적으로 알람브라 칙령은 에스파냐의 몰락과 네덜란드의 융성,
그리고 대영제국이 탄생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습니다.
또한 네덜란드의 황금기는 일본이 재빠르게 서구 문물을 습득해
강대국으로 도약하는 데도 기여했습니다.
알람브라를 무혈점령한 에스파냐는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슬람교도에게도 많은 제약을 가했습니다.
결국 많은 이슬람교도가 안달루시아 지역을 떠나 북아프리카로 대량 이민을
하거나 강제적으로 개종해야만 했습니다.
당시 고급 실크 생산지로 유명했던 그라나다는 가장 낙후한 지역으로 몰락했고
다시 일어나는 데 거의 200년이란 세월이 흘러야 했다고 합니다.
에스파냐 정복자들은 그라나다를 점령하자마자 이슬람의 잔재를
철저하게 파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라나다를 방문한 페르디난도는 알람브라궁전의 아름다움에 놀라 파괴를 중지시켰는데
이미 3분의 2가 파괴된 후였지만 이후에는 가능한 한 원형을 보존하도록 노력했다고 합니다.
그라나다를 정복한 여왕 이사벨라의 손자인 신성로마제국 카를 5세는 미켈란젤로의 제자인
페드로 데 마추카에게 알람브라궁전 경내에 알람브라궁전에 견줄 만한 르네상스식 궁전을
세우도록 명령했습니다.
이슬람 사원이 있던 자리에는 산타마리아성당을 지었고 왕자의 궁전 위에는 샌프란시스코수도원을
건설해 알람브라궁전의 분위기와 극명하게 대조를 이루게 했습니다.
하지만 카를 5세는 이 궁전에 머문 적도 없으며 그가 사망한 뒤에는
어떤 건물도 추가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중심광장
나스르 왕조는 이슬람 세력인 모로코의 마린 왕조와 에스파냐 기독교도로부터 협공을 받고
있었는데 더는 버티기 어렵다고 판단한 이븐 나스르는 놀라운 결단을 내렸습니다.
이슬람이 아니라 기독교 진영에 가담한 것으로 그는 카스티아의 페르난도 3세와 강화조약을
체결하면서 해마다 조공을 바치고 전쟁이 일어나면 지원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나스르 왕조는 이슬람과 기독교 세력 간의 알력을 적절히 이용하면서 안달루시아 지역의 또 다른
막강한 이슬람 세력인 코르도바가 멸망할 때에도 전쟁의 폭풍에 휘말리지 않았습니다.
주변이 시끄러우므로 그라나다의 운명이 순탄치 못하리라 예상되었지만, 14세기 그라나다에서는
예술과 과학이 번성하였고 학교와 사원, 공중목욕탕이 즐비하게 들어선 화려한 이슬람문화가
꽃 피워졌습니다.
그라나다에 근거지를 정한 이븐 나스르는 한때 베르베르인들이 축성한 알카사바라는
요새가 서 있던 언덕 위에 궁전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폐허가 된 요새를 코란에서 묘사한 지상천국으로 바꾸어놓겠다고 결심을 하고
그는 토목 전문가로 하여금 시에라 네바다 산맥에서부터 흘러내려오는 개울의 물줄기를
바꾸어 운하와 수조 · 분수 · 정원에 물을 댈 수 있도록 관개수로를 개발하게 했습니다.
문헌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고 합니다.
"1238년 술탄은 알람브라라는 궁전으로 올라가서 조사한 뒤 성의 토대를 표시하고
건물을 관리하라고 명했고 성벽은 그 해가 가기 전에 완성되었으며 술탄은 또한
강물을 끌어들이기 위한 수로를 텄다."
뛰어난 이슬람 건축물인 알람브라궁전을 완성하는 것은 그의 후계자들 몫이었는데
알람브라란 이름은 ‘붉은색(alHamra)’이라는 아랍어에서 유래했습니다.
성벽을 지을 때 붉은색 점토를 이용했기 때문입니다.
그라나다의 누에바 광장에서 언덕길을 올라가면 그라나다 문을 지나 궁전 최초의 문인
‘재판의 문(정의의 문)’이 나타나는데 말굽 모양의 위쪽 아치에는 코란 5 계명을 나타내는
다섯 개의 손가락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이곳을 지나면 알히베스 광장이 나오며 우측에 르네상스 양식의 카를 5세 궁전,
정면에 왕궁의 입구가 있습니다.
‘오직 한 분, 신만이 승리자이다’라고 새겨져 있는 포도주의 문을
지나면 알카사바 요새의 입구가 나옵니다.
알카사바는 9~13세기에 건설되었으며 이곳에서의 조망은 그란다 시가지와 알아이신 지구
그리고 알람브라궁전의 화려함들을 모두 바라다볼 수 있습니다.
안개가 걷히고 있는 그라나다 시가지 전경
줌으로 당겨 본 시에라 네바다 산맥 전경
화약탑(Torre de la Polvora)
알카사바 벨라탑에서
개별 여행을 온 한국인 젊은 처자를 모델로 알카사바 벨라탑에서
아다르베의 정원(Jardín de los Adarves)
바위의 탑(Torre de las Rocas)
알람브라 궁성 투어를 마치고 버스를 기다리면서
발렌시아로 향하면서 점심을 먹기 위하여 들린 스페인 소도시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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