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 11. 01:48ㆍ나의 이야기
파스테이스 드 벨렝(Pastéis de Belém) 제과점 전경
리스본에 위치한 포르투갈 원조 에그타르트 맛집으로 포르투갈 여행 시
반드시 먹어봐야 하는 디저트가 있다면 바로 에그타르트입니다.
리스본 벨렘지구에 위치한 파스테이스 드 벨렘은 에그타르트의 원조 중의 원조로 불리는 곳으로
벨렘지구는 포르투갈이 가장 화려하던 대항해시대를 상징하는 기념물이 매우 많은 곳으로
제로니모스 수도원부터 벨렘탑, 발견 기념비 등 볼거리도 풍부합니다.
벨렘지구를 들르는 여행자들이 반드시 들르는 곳 중 하나가 바로 파스테이스 드 벨렘이라고
할 정도로 에그타르트로 유명한 빵집입니다.
파스테이스 드 벨렘은 원래 사탕수수 정제 공장으로 사용되던 곳으로, 이후 수도원에서 패스트리를
제공해 판매하기 시작하면서 지금의 에그타르트 맛집으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제로니모스 수도원에서 수녀와 수사의 제복에 풀을 먹이기 위해 계란 흰자를 사용했다고 전해지는데,
그때 남은 노른자를 이용해 에그타르트를 만들기 시작한 것으로 무려 1832년에 시작된 곳으로
긴 역사를 자랑합니다.
에그타르트 외에도 다양한 빵을 만들어 판매하고 있는 매대 전경
파스테이스 드 벨렘은 매일매일 신선한 에그타르트를 만드는데 일명 ‘비밀의 방’에서 옛날부터
이어진 전통 방식과 레시피를 이용해 에그타르트를 만들어 내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파스테이스 드 벨렘은 테이크아웃도 가능하고, 자리에 앉아 커피와 함께
느긋하게 에그타르트를 즐길 수도 있습니다.
테이크아웃을 원할 경우 밖에서부터 줄을 서서 차례대로 주문하면 되고, 자리에 앉아
먹고 싶은 경우 더 안쪽으로 들어가 또 다른 줄에서 기다리면 됩니다.
테이블이 꽤 많기 때문에 웨이팅이 길어 보여도 줄이 꽤 빠르게 줄어드는 편으로
내부 자리뿐 아니라 외부 테라스석도 마련되어 있습니다.
고풍스러운 파스테이스 드 벨렘 빵집 아치형 문에서
에그타르트는 하나에 1.15유로 정도이고 커피 한 잔의 가격도 에그타르트 가격과 비슷합니다.
에그타르트의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데, 커스터드 크림이 제가 사 먹었던
홍콩이나 마카오보다도 풍부해 더 부드럽게 느껴졌습니다.
포르투갈에서는 에그타르트 위에 계핏가루나 설탕을 뿌려 먹는데 텁텁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막상 계핏가루를 올려 먹어보면 왜 현지인들이 계핏가루를 올려 먹는지 바로 알 수 있을 정도로
달콤함과 고소함이 느껴졌습니다.
제로니무스 수도원(Mosteiro dos Jerónimos)은 궁전 같은 화려함은 없지만
웅장함과 강인함, 거룩함이 느껴집니다.
섬세하고 과학적인 건축기법은 경이로울 정도이며 아름답습니다.
산타 마리아 데 벨렘 교회(Igreja Santa Maria de Belém)
산타 마리아 데 벨렘 교회(Igreja Santa Maria de Belém)는 마누엘 건축의 완벽한 예로 새로운 고딕 양식으로 위대한 항해에 의해 생성된 포르투갈의 황금기를 크게 책임진 왕 마노엘 1세였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고 있습니다.
교회는 기둥을 덮는 수많은 세부 사항이 특징으로 창문, 주랑: 자세히 보면 항해, 기독교 및
신화적 상징을 볼 수 있는 장식품이 아름답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성당 안에는 카몽이스(Camões)와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의 무덤 외에도 십자군 전쟁에서
사망하고 결국 포르투갈을 스페인의 일부로 만든 이베리아 연합(Iberian Union)을 촉발시킨
세바스티앙(Sebastião) 왕의 유해도 있다고 합니다.(외관만 관람)
포르투갈 공화국( Portuguese Republic)은 유럽 서남부에 위치한 나라로,
이베리아 반도의 서부와 북대서양 상의 군도들을 영토로 합니다.
국토의 총면적은 92,090 km2로, 동쪽과 북쪽은 스페인, 서쪽과 남쪽은 대서양을 맞댄 대륙부와
대서양 상의 두 자치지역인 아소르스 제도와 마데이라 제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포르투갈은 유럽 대륙에서 가장 서쪽에 위치한 나라로 이름은 제2의 도시 포르투의 라틴어 이름
"포르투스 칼레"(라틴어: Portus Cale)에서 유래하였습니다.
포르투갈은 온난한 항구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오늘날 포르투갈 국경 안에 포함된 지역은 선사 시대부터 계속 사람이 거주해 왔는데 갈라이키족과
루시타니족 같은 켈트인들은 후에 로마 공화정에 통합되었고, 이후 수에 비족과 서고트족 같은
게르만족이 정착하였습니다.
8세기부터는 무어인이 이베리아 반도를 정복하기 시작하였고 기독교도의 헤콩키스타 도중에
초기엔 갈리시아 왕국, 후엔 레온 왕국의 일부로 포르투칼레 백국(포르투갈어: Condado de
Portucale 혹은 Condado Portucalense)이 성립됩니다.
1139년 포르투갈 왕국의 성립과 1143년 독립 승인, 1249년 국경의 확립을 통해
포르투갈은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민족 국가로 거듭납니다.
15세기와 17세기 사이에 대항해 시대 탐험의 결과로, 포르투갈은 서양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남아메리카, 아시아, 아프리카, 오세아니아를 아우르는 제국을 건설하였고, 이를 통해 전
세계에서 경제, 정치, 군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강대국으로 거듭났습니다.
포르투갈 제국은 사상 첫 세계 제국이었고, 1415년 세우타 정복부터 1999년 마카오의
중국 반환까지 거의 600년 동안 이어진, 가장 오래 지속된 식민지 제국이었습니다.
하지만 포르투갈의 국제적 중요성은 19세기, 특히 식민지였던
브라질의 독립 이후 크게 줄어들었습니다.
1910년 10월 5일 혁명으로 공화국이 성립되었고, 포르투갈 왕가는 추방되어 제1공화국이
성립되었지만, 권위주의 정권인 이스타도 노부가 형성되었습니다.
1974년 카네이션 혁명 이후 대의 민주주의가 성립되었고, 포르투갈 식민지 전쟁이
종식되어 마지막 해외 주였던 모잠비크, 앙골라 등이 독립하게 됩니다.
오늘날 포르투갈은 비교적 HDI와 1인당 GDP가 낮지만 선진국 중 하나로 여겨지며,
인간 개발 지수 역시 "매우 높음" 수준에 속합니다.
삶의 질은 19위로, 세계적으로도 최상 수준의 의료시스템을 가지고 있고,
포르투갈은 국제 연합 (UN), 유로존, 솅겐 조약을 포함한 유럽 연합 (EU), 북대서양 조약 기구 (NATO),
경제 협력 개발 기구 (OECD), 포르투갈어 사용국 공동체 (CPLP)의 창립 회원국이며, 유엔 평화유지군
활동에도 참여하고 있습니다.
15세기 포르투갈은 대항해시대에 알려진 해외 원정 및 확장을 시작하였고, 이 과정에서
'항해왕자' 엔히크와 동 주왕 2세가 지도자로서 가장 두드러진 활약을 하였습니다.
포르투갈은 1415년 아프리카의 세우타를 정복하였고, 1434년 질 이아네스가 바다의 끝으로 여겨지던
보자도르 곶을 넘어가 아프리카 해안을 탐사하였고, 1488년 바르톨로메우 디아스는 희망봉을 지나
대서양과 인도양이 이어져 있음을 증명하였습니다.
뒤이어 '행운왕' 마누엘 1세 통치기간에는북아메리카, 남아메리카,
동양으로의 항로와 육지 등 대다수를 발견했습니다.
아폰수 드 알부케르크의 정복 덕분에 16세기 전반에 포르투갈은 아시아로 확장하는데
전력을 쏟는 한편, 1530년 동 주앙 3세가 브라질의 식민화를 시작하였습니다.
포르투갈은 1480 년대부터 거의 100년 동안 '황금기'를 구가하였는데 1578년 모로코 정벌에 나선
젊은 왕 동세바스티앙과 상당수 포르투갈 귀족이 알카세르키비르전투에서 대패해 사망하면서
혼란에 빠졌고, 뒤를 이어 즉위한 추기경 왕 엔히크도 2년 뒤 사망하자 포르투갈은 계승전쟁이
발발하였고, 1580년 스페인 국왕이 포르투갈의 왕을 겸하는 동군연합(同君聯合)이 형성돼 스페인의
펠리페 2세가 포르투갈 "필리피나 왕가"의 첫 왕인 "필리프 1세"로 즉위하였습니다.
독립된 외교권을 상실하고 스페인과 묶인 포르투갈은 네덜란드와의 전쟁에 휘말리게 되었고,
인도양 독점무역이 깨지며 큰 퇴보를 겪게 됩니다.
이러한 스페인의 지배는 1640년 12월 1일 포르투갈 귀족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종식시켰고, 동 주왕 4세가 포르투갈의 왕으로 즉위하였습니다.
1640년 12월 1일 이후, 스페인과 전쟁이 벌어지게 되고 이 전쟁은 1668년까지 가서야 리스본 조약을
통해 스페인이 포르투갈의 왕정복고와 독립을 인정하며 끝나게 됩니다.
16세기말부터 18세기 전반기까지 브라질의 발견되며 광산개발은 호황을 맞이했고, 이를 통해
동 주앙 5세 시기 포르투갈의 궁정은 유럽에서도 가장 부유하고 호화로운 궁정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축적된 부는 주로 수입품을 지불하는 데 사용되었는데, 특히 포르투갈 왕국 내에 직물 산업이
거의 발달하지 않은 상황에서 모든 직물을 잉글랜드로부터 수입을 하였고, 이로 인해 대부분이 부가
잉글랜드로 빠져나가게 됩니다.
포르투갈의 대외 무역은 와인 산업에 기반하였고, 동 주앙 5세 통치기인 1750년에서 1777년 사이 재상을
지낸 폼만 후작은 이러한 상황을 전환하기 위해 중상주의적 개혁 등의 노력을 통해 왕국의 경제발전을
주도하였습니다.
또한 이 시기에 리스본과 알가르브를 폐허로 만든
1755년 11월 1일의 대지진이 발생하였습니다.
포르투갈은 잉글랜드와 동맹을 유지하고 대륙봉쇄령에 참여하길 거절한
이유로 인해 1807년 나폴레옹 군대의 침략을 받습니다.
이로 인해 포르투갈 왕실은 1808년 브라질로 도피해 리우데자네이로로 수도를 옮깁니다.
이러한 상황은 1816년부터 포르투갈의 왕이 된 동 주왕 6세가
1821년 첫 헌법을 공포하기 위해 리스본으로 돌아갈 때까지 지속되었습니다.
이듬해, 그의 아들인 동 페드루 4세는 브라질의 독립을 선언하며
브라질 황제 동 페드루 1세로 즉위합니다.
19세기의 남은 기간 동안 포르투갈은 내전과 9월 혁명, 마리아 다폰트혁명, 페툴라 이아 전쟁 등
반복되는 반란과 무력 봉기와 같은 거대한 사회정치적 혼란기를 겪었으며, 1852년 헌장에
추가 법령이 더해지면서 겨우 정치적 안정과 재생 기간 중 주를 이룬폰터스를
앞세운 진흥 정책의 시작이 가능해졌습니다.
19세기 말엽, 포르투갈의 식민지 야욕은 영국과 충돌했고, 이는 1890년
영국의 최후통첩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영국의 요구에 대한 굴복과 점점 더 흔해져 가는 경제 문제와 논란으로 인해 왕실에 대한 불신은
점점 더 커져갔고,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08년 2월 1일 국왕 동 카를루스와 왕세자 동 루이스
필리프가 암살됩니다.
마누엘 2세가 이끈 왕실은 2년을 더 유지하지만, 1910년 10월 5일에 일어난
혁명을 계기로 공화국이 수립되며 왕정은 폐지가 됩니다.
그러나 공화국 역시 불안한 정치상황 속에서 수난을 겪다가 1926년 군사 쿠데타로 정권이 교체되어 정권은 결국 안토니우 데 올리베이라 살라자르에게 넘어가서 사실상 독재자인 그는 재무장관(1928∼40) 겸 총리(1932∼68)를 역임하면서 포르투갈을 통치했습니다.
그의 식민정책은 아프리카에서 곤혹스러운 전쟁을 수행하도록 강요받은 군부 지도자들 사이에 원성을
불러일으켜 1974년 결국 이들이 주동이 된 쿠데타가 일어났고 그 결과 식민지들의 독립이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습니다.
초기 중도·보수적 성향의 군부가 장악했던 정부는 잠시 군부의 급진파와 좌파 및 마르크스-레닌주의자들에게 주도권이 넘어갔다가 다시 중도파가 집권했습니다.
1976년 제헌의회는 사회주의로의 이양을 내용으로 하는 헌법을 승인했으며 총선에 따라 연립정부가 구성되었고. 1980년 선거에 승리함으로써 정권을 잡은 중도우파는 1976년의 헌법에서 좌파적 성향을 배제시켰으며, 1982년의 헌법개정으로 포르투갈의 민정이양이 완료되었습니다.
제로니무스 수도원(Mosteiro dos Jerónimos) 전경
피테우스란 상호의 삼륜 이동 음료 차량 전경
헤스타우라도르스 광장
시티투어 버스 전경
헤스타우라도르스 광장
헤스타우라도르스 광장 근처에서 툭툭이를 타고 리스본 시가지 투어에 나섭니다.
삼륜오토바이를 개조해서 만든 툭툭이는 선택 옵션으로 60 유로였었는데 물론 여행사 가이드의
돈벌이라 치더라도 리스본의 좁고 혼잡한 이면 도로를 달리기에는 적합할지 모르나 툭툭이 천정이
비닐로 덮여 있고 많이 요동을 치며 운행을 하다 보니 주위 경관을 바라다보기에도 힘이
들 정도였었습니다.
또 리스본 시내는 워낙 혼잡한지라 여성이 운전하는 툭툭이를 탔었는데도 일행들과 보조를 맞춰
따라가는 도중 차량이 그 틈새로 자주 끼어들다 보니 접촉사고의 위험마저 느껴지더군요.
차라리 여행객들을 위한다면 리스본 시에서는 이런 오토바이형 툭툭이보다는 오픈형으로
봉고차량이거나 사륜차량 아니면 올드카를 개조하여 운행하도록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리스본 시청에서 이런 제 말을 귀담아듣을 린 만무하다 보니....ㅋ
암튼 저는 개인적으로 톨레도의 미니열차나 리스본의 이런 툭툭이로 여행지를 돌아보는 것
보다는 시야를 가리지 않는 시티 투어 같은 오픈형 차량으로 현지 실정에 맞게 돌아보는 게
바람직하다는 생각입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발품을 파는 것이겠지만 현실적으로 넓은 영역을 다 돌아보아야 하는
관광객 입장에서는 힘에 부치는 일이다 보니.....ㅜㅜ
사진을 찍어도 멈출 때만 가능하고 그마저도 너무 흔들리고 위험하다 보니 사진의 수평도
맞추기 어려워 전망대까지 가면서 제대로 된 사진은 몇 장 건지기도 힘들었습니다.
리스본 시가지를 툭툭이를 타고 가는 전경
툭툭이 1대에 6명이 탄 탓에 좁고 고개를 내밀어야 밖을 쳐다볼 수 있는 데다가 지붕은
비닐로 덮여 있다 보니 활동 공간에 제약이 따르는.....ㅜㅜ
게다가 지나가는 차량들과 앞에 가는 툭툭이로부터 뿜어지는
매연은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툭툭이를 타고 가다 찍은 게인주택 그라피디
툭툭이를 타고 도착한 전망대 전경
세뇨라 두 몬테(Miradouro da Senhora do Monte) 전망대에서 바라다보는 리스본 시가지
인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전망대로 성당 부지 내에 있으며
도시의 탁 트인 전망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4월 25일 다리(Ponte 25 de Abril)
상 조르즈 성(Castelo de S. Jorge)
은총의 성모교회(그레이스 교구교회)
Church of Our Lady of Grace(Igreja Paroquial da Graça)
구세주 그리스도상(Santuário de Cristo Rei)
4월 25일 다리(Ponte 25 de Abril) 전경
리스본(Lisbon)은 포르투갈 최대의 항구 도시이자 수도로
포르투갈어로 ‘리스보아’라고 불립니다.
3세기 로마, 8세기 이슬람의 지배를 받다 12세기 알폰소 1세에 의해 해방되었으며,
코임브라에 있던 수도를 이곳으로 옮겨 왔습니다.
지중해와 북해를 연결하는 최고의 위치 조건으로 15세기에 들어 활발한 무역이 이루어지면서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던 대항해 시대를 맞이하다가 1755년 지진과 그로 인한 화재, 쓰나미로
인해서 도시 2/3가 파괴되면서 리스본의 전성기는 끝이 나고 맙니다.
폼발 후작의 도시 재건 계획으로 파리를 모티브로 삼아 바둑판 모양으로 디자인했으며,
이를 ‘폼발 양식’으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폼발 후작의 재건 계획을 시작으로 리스본은 또다시 포르투갈을 대표하는 현대 도시로 변화를
시작했으며, 크고 작은 7개의 언덕으로 이루어져 있는 구시가지는 리스본의 상징인 노란 트램
덕분에 어렵지 않게 오르내릴 수 있습니다.
각 지구마다 서로 다른 분위기를 만날 수 있는 것이 바로 리스본의 매력이라고 하는데 이번 여행에서는
하루 일정도 안되게 스쳐 지나가는 여행지이다 보니 리스본의 얼굴 정도만 볼 수밖에 없다 보니
제일 아쉽게 느껴졌던 부분이었습니다.
산의 성모 예배당(산의 성모 경당)
Chapel of Our Lady of the Mountain(Capela de Nossa Senhora do Monte)
세뇨라 두 몬테 (Miradouro da Senhora do Monte) 전망대에서 리스본 시가지를 배경으로
아파트 외벽에 그려진 그라피디
국립 판테온(National Pantheon)
4월 25일(Ao 25 de Abr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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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에서는 좌익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 40년에 가까운 독재를 종식시켰는데 쿠데타 군부가 쿠데타 성공 후 바로 민정이양을 해서 카네이션 혁명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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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이 날은 지금도 포르투갈에서 자유의 날로 기리며 공휴일입니다.
- '살라자르 다리'라는 이름이 붙어 있던 리스본과 알마다를 잇는 다리가 '4월 25일 다리'로 이름이 바뀐 것도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입니다.
에두아르두 7세 공원
마르케스 드 폼발 광장(Praça Marquês de Pombal)의 폼발 후작
(Marquês de Pombal) 기념비를 줌으로 당겨 본 전경
4월 25일(Ao 25 de Abril)
에두아르두 7세 공원을 배경으로
에드워드 7세 공원 호수(Lago Parque Eduardo VII) 근처 도로변에서
베르나르도스(Os Bernardos)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기 전에
점심을 먹고 나오다가 에드워드 7세 공원 호수(Lago Parque Eduardo VII) 근처 녹지대에서
에두아르두 7세 공원(Parque Eduardo VII) 정문에 장식된 성탄 조형물
에두아르두 7세 공원(Parque Eduardo VII) 성탄 장식물
폼발 후작 (Marquês de Pombal0 기념비가 있는 광장
4, 25 다리를 건너면서 바라다보는 리스본시가지 전경
사실 한나절 동안에 리스본을 돌아보았다는 것은 말 그대로 발자국만 남겼다는
표현이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9박 12일 일정에 두바이 1박을 빼고 남은 기간에 드넓은 스페인을 가로질러 포르투갈
그리고 모로코까지 돌아본다는 것은 말 그대로 강행군입니다.
이런 탓에 이 여행을 했던 체력이면 어떤 유럽의 힘든 여행이든
가능하다는 이 아기가 백번 이해가 됩니다.
제가 다녀왔던 유럽의 어떤 여행지보다도 속도전이다 보니....ㅎ
버스로 스페인으로 향하면서 차창 밖으로 바라다본 구세주 그리스도상(Santuário de Cristo Rei)으로
110M까지 승강기로 올라갈 수가 있다고 합니다.
이 예수상은 브라질의 리오 데 자네이로에 있는 구세주 그리스도상 보다 늦게 만들어졌는데
브라질이 포르투갈의 옛 왕조가 피난 가서 세운 왕정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참
아이러니한 예수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알기론 1850년대 브라질로 피난 간 포르투갈 왕조 때 리우데 자네이로에 있는 구세주
그리스도상을 짓자고 했던 것을 피난 왕조가 몯짖고 그 후 브라질은 독립을 해버렸고
독립한 브라질이 예수상을 1930년대에 준공하였는데 이 예수상은 1959년에야
만들어졌다고 하니....ㅎ
끝도 잘 안 보이는 광활한 주변 구릉에는 오로지 올리브나무와 오렌지나무 일색인지라
농업 생산성은 낮아 보였는데 이런 땅 우리나라에게 활양하면 참 좋겠단 생각이.....ㅋ
아마 우리나라 같으면 이런 땅을 이렇게 효용이 없는 땅으로 내버려 두진 않았겠지요.
장거리 운행버스의 휴식을 위해 잠시 들린 주유 휴게소의 들녘을 배경으로
어디를 둘러보아도 올리브 나무만 보이는.....ㅎ
스페인이든 포르투갈이던 암튼 이번 여행 내내 제일 많이 본 게 무엇이냐고 물으시면
저는 당근 올리브나무라고 답할 수밖에.....ㅎ
리스본에서 버스로 5시간 30분 거리에 안달루시아의 주도 세비야를 진입하기 전에 두 번째로 휴식을
취했던 주유 휴게소 전경으로 스페인 고속도로 휴게 시설은 포르투갈 보다 더 안 좋습니다.
우리나라의 고속도로 휴게시설은 제가 보아도 세계 제일이란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ㅎ
휴게소 풀밭에 참외 비슷한 열매로 잎과 줄기는 야생 참외 종자 같아 보였는데
이런 야생 열매는 처음 보는...?
스페인 안달루시아주 세비야를 진입하기 전 한 번 더 휴식을 취한 스페인의 휴게 주유소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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