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1. 24. 20:36ㆍ나의 이야기
임대정 원림을 돌아본 후 운주사로 향하다가 바라다본 도로변에 뜬 아름다운 무지개
백아산 자연 휴양림 근처 도로변의 고운 단풍
영구산 운주사 일주문 전경
일주문에 쓰여진 영구산(靈龜山) ‘雲柱寺 "배가 아니라 기둥이라는 것으로
차라리 ‘雲住’, 구름이 산다면 더 좋을 듯도 보입니다.
이곳 운주사를 에워싼 천불산은 해발 100m 정도의 높이에 불과해 보였지만
구름이 머무룰수 있을 만큼 그윽한 산세를 보여 줍니다.
운주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의 말사로
운주사(運舟寺)라고도 합니다.
이 절의 창건연대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신라 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풍수지리에
근거해 비보사찰(裨補寺刹)로 세웠다는 설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즉 우리나라의 지형을 배 모양에 비유, 배를 진압할 물(物)이 없으면 침몰하기 쉽기 때문에
그 중심 부분에 해당하는 운주곡에 천불천탑(千佛千塔)을 하룻밤 사이에
세워 내실(內實)을 기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운주사와 도선과의 연관은 어떤 문헌에서도 찾아볼 수 없으므로
조선 후기에 유행한 비보사상을 바탕으로 후에 첨가된 것으로 보입니다.
한편 〈동국여지지 東國輿地志〉에 고려승 혜명(惠明)이 무리 1,000여 명과 함께 천불천탑을 조성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혜명을 970년(광종 21)에 관촉사 대불을 조성한 혜명(慧明)과 동일한 인물로
본다면 운주사는 고려 초에 건립되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 절의 연혁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1530년(중종 25)에 편찬된 〈신 증 동국여지승람〉에
운주사는 천불산에 있는 절로서 천불천탑과 석불 2구가 서로 등을 맞대고 앉아 있는 석조감실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1984년 제1차 발굴조사 때 '홍치 8년'(弘治八年)이라고 새겨진 기와 편이 발견되어
1495년(연산군 1)에 4번째 중수가 있었던 사실을 알 수 있으므로 조선 초기까지는
존속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뒤 정유재란으로 폐사된 것을 1800년경에 설담자우(雪潭自優)가 땅에 묻힌 불상과
무너진 불탑을 세우고 약사전 등을 중건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1984~89년 4차례에 걸친 전남대학교 박물관의 발굴조사 과정에서 금동불입상을 비롯하여
순청자, 상감청자, 분청사기의 파편, 기와 편 등이 출토되었습니다.
그 결과 운주사는 늦어도 11세기 초에는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현재는 비구니가 수도하는 절로 요사채·종각, 그리고 새로 신축된 대웅전·지장전·승방 등이 있으며,
주변에 91구의 석불(완형 50구)과 21기의 석탑 등이 흩어져 있습니다.
이 가운데 석조불감(보물 제797호)·9층 석탑(보물 제796호)·원형 다층석탑
(보물 제798호)·와불(臥佛) 등이 대표적인 문화재입니다.
2016년도에 이곳을 처음 찾았었는데 오늘 다시 이 곳을
무척 오랜만에 다시 찾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따라서 제 블로그에도 올린 적이 있었기에 제 불로그 검색창을 통하여 확인하실 수가 있는데
이번 글에서는 운주사의 아름다운 가을 풍경들의 사진으로만 보아주셨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9층 석탑(보물 제796호)
석조불감(보물 제797호)
원형 다층석탑(보물 제798호)
운주사 대웅전 전경
대웅전 내부 전경
미륵전에 모셔진 돌부처
운주사 경내 전경
운주사 미륵전 후면 절벽에 암각 된 마애여래좌상(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75호)
로드 캐스팅 모델
미륵이란 석가모니불의 제자로서 미래에 성불하리라는 약속을 받은 뒤
도솔천에 올라가 현재 천인들을 위해 설법하고 있는 보살입니다.
미륵신앙에는 현재 미륵보살이 있는 도솔천에 태어나기를 바라는 상생 신앙과
미륵보살이 속히 지상에 강림하여 어려움에 빠진 이 세상을 구원해주기를 기대하는
학생 신앙 등 두 가지가 있습니다.
화순의 운주사에는 언제 만들어졌는지 모르는 두 미륵불이 나란히 누워있는데 미륵불은
석가모니가 열반에 든 지 56억 7천만 년 뒤에 이 땅에 내려와 수많은 중생들을 광명의
세계로 구원한다는 부처입니다.
운주사의 와불은 자연 암반에 조각을 한 뒤 일으켜 세우려다 실패한 것으로 민중들은 누워있는
부처가 일어나시는 날 새로운 세상이 온다는 희망의 전설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누운 모습의 불상은 유례가 드물기 때문에 일설에는 먼저 조각을 하고 일으켜
세우려다 실패하여 현재와 같이 누워있는 모습이 됐다고 전하지만 바위 모습으로 보면
처음부터 입상을 세우려고 계획한 것이 아니라 넓은 암반에 불상을 조각한 것이라고 합니다.
심지어 운주사를 세운 도선국사가 하룻밤 만에 천불 천탑을 다 만들려다가 첫닭이 우는
바람에 마지막으로 이 와형 불상을 세우려다가 실패하여 완성을 보지 못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통상적으로 와불은 옆으로 누워있는 모습으로 만들기 때문에 이처럼 똑바로
누운 모습의 불상을 와불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와불은 부처의 열반 장면을 재현한 것이므로 불교에서는 매우 중요한 형상인데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와불을 만드는 전통이 이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황에서 운주사 와형불상 2구를 만들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합니다.
두 구 모두 얼굴과 신체 형태가 유사하여 같은 시기, 같은 조각가가 만든 것이 분명한데
얼굴은 아주 낮은 부조로 이목구비를 표현했는데, 눈, 코, 입을 개념적으로 나타내
장승처럼 보입니다.
두 불상 모두 통상적인 방식으로 법의를 입고 있으며
일정한 간격으로 옷 주름을 새겼습니다.
신체에 해당하는 바위 면에 그대로 두 손을 조각하여 입체감이나 사실성은
전혀 없으나 일반적인 불상처럼 수인을 나타내려고 했습니다.
어깨와 가슴은 좁고 빈약하며 인체의 굴곡도 없어서 더욱
장승이나 입 인상(立人像)의 느낌을 줍니다.
지하에 묻힌 바위 상단을 다듬어 광배처럼 만들고 그보다 안쪽으로 다시 불상을 조각했는데
두 구의 불상 사이에 약간 깊은 골이 있어서 이 역시 바위의 원래 모양을 따라서 만든 것으로,
최대한 자연 암반을 이용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물게 누워있는 모습의 불상이라는 데 의의가 있습니다.
와형 석조여래불(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73호)
와불 인근의 조망이 좋은 묘소에서 바라다보는 주변 경관
칠성판과 칠층 석탑
천불천탑’이라 해서 본래는 천 개의 불상, 천 개의 탑이 운주사와 천불사 곳곳에 산재해
있었다는데 지금은 그것이 사실이었음을 증명하는 수십여 개의 불상과 탑들이 산 능선과
경내 골짜기에 남아 그 흔적을 보여줍니다.
서로 등을 맞대고 석실에 앉아 계신 부처님 두 분과 보통 격식과는 확실히 달라 보이는
둥근 모양의 탑들, 산 위 바위에 넓게 누워 계신 부처님과 칠성탑, 칠성 바위들은 이곳이
‘단순한’ 도량이 아님을 깨닫게 합니다.
미륵 사상을 담고 있다고 해서 황석영 ‘장길산’의 말미를 장식하기도 했던 와불 설화와
불교의 중요한 한 가닥인 밀교적 분위기도 풍기는 탑 아래에 놓인 일곱 개의
‘칠성’ 원형 돌판이 유난히 눈길을 끕니다.
이 석불들의 환한 얼굴 미소들이 바로 천불천탑의 천년 운주사가 추구했던
극락세계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운주사의 천년 비밀은 바위에 곱게 자란 이끼류 녹조처럼 그렇게 오랜 세월을
머금어야만 다시 그 비밀이 문이 열릴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화순여행을 이곳으로 마무리하고 오늘 여행의 종착지인 강선생님 내외의
새 숙소인 해남의 북창면 오산리로 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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