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흥망성쇠에 따라 잊혀져 버린 고대도시 에페소스.2 (2016.5.5)

2016. 12. 3. 21:34나의 이야기









하드리안 신전(Tample of Hadrian) 아름다운 전경 






성모님과 사도요한의 도시 에페소





에페소는 소아시아의 수문장 같은 도시입니다.


BC1000 년경 아테네 왕이 정복하여 이오니아인을 이주 시켰고 그리스인들이 항구를 건설하였고

BC 546 년부터 리디아 왕국을 멸망시킨 페르시아에 합병되었습니다.


알렉산더가 입성하여 그의 사후 그의 장군 리시미쿠스가 차지하게 되었습니다.(페르가몬 왕국에 병합)


BC133 년 에페소는 페르가몬 왕국이 망하며 로마제국에 헌정되었습니다.


소아시아 서부지역의 수도로 정해지고 나서  에페소는 상업. 정치. 경제적으로 부흥. 번성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BC88 년 시민들이 로마 압제에 항거하며 라틴어 사용자를 무참히 살해하였으나 로마에 의해 완전 초토화되었다가

BC27-14년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다시 재건되었습니다.


오늘날 유적은 대부분 로마시대의 것들입니다.


AD381년 테오도시우스 황제 칙령(모든 이방제국의 신전 폐쇄 명령)으로 에페소의 모든 신전들은 파괴되었고

그 파괴된 신전의 건축 자재들은 성전을 짓는데 사용되었다고 합니다.(에페소의 성 요한 성당과 소피아 성당 등...)


BC356년 아르테미스(로마에서는 다이아나 =다산의 여신) 여신전이 한 정신병자에 의해 불탔는데

 당시 바오로는 '당신네 신은 힘이 없다."고 얘기를 합니다.(19-8,35)


화재 후 다시 지은 신전은 파르테논 신전의 4배 크기(136m, 70 m, 높이 20m  기둥이 127개)였다고 합니다.




에페소에는 바오로가 복음을 전하기 이전 이미 복음이 전해져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전격적인 선교는 바오로가 했으며 사도요한도 성모님을 모시고 에페소에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성모님께서 돌아가신 곳도 에페소입니다.


성모님과 사도 요한은 방 하나 부엌이 전부인 아주 소박한 환경에서 살았다고 합니다.


사도 요한과 성모님께서 살던 곳에서 카타리나 수녀님께서 12년간 성모님께서 발현하셨습니다.


1892년 이즈미르 대교구ㅡ

 6-7세기 비잔틴 시대의 집 터와 돌을 발견하였다.(카프친 수도회=프란치스코)


1961년 요한 23세 교황께서 성지로 공표하였으며 

350년 경 성모님께 봉헌된 성전이 건립되었고 여기에서

 431년에는 에페소 공의회가 열렸습니다.


공의회에는 200 명의 주교가 참석하였고

성모님은 하느님을 낳으신 분이라는 교리 선포 후에 니케아 콘스탄틴 신경에서 재확인하였습니다.


 

527년 ~565년 유스티아누스 대제가 요한의 무덤 위에

 성 요한 성당을 지었습니다.(130m 길이)























도미티안 신전















도미티안신전


에페소스 시민들이 도미티안 황제의 아버지 베스파시안을 신으로 모셔 황제의

 노여움을 사지 않으려고 만든 신전이라고 합니다.


도미티안 황제는 스스로를 주인이자 신이라고 부르게 하면서 자신의 신전을 곳곳에 세우게 하였으며

 황제 숭배를 강요하였으며 기독교의 가장 무서운 핍박자였었다고 합니다.















도미티아누스 광장(Domitian square)


헤라클레스문 바깥쪽에는 도미티아누스 황제(Emperor Domitianus, AD 81-96)를

봉헌한 신전(Domitian temple)과 폴리오샘(Fountain of Pollio)

그리고 멤미우스 기념비(Memmius monument)의 유적이 있습니다.


이 일대를 도미티아누스 광장(Domitian square)이라고 합니다.


당시에는 황제를 봉헌한 신전을 세우는 것이 대단한 영광으로 그 도시의 격을 높여주는 의미가 있었다고 합니다.


2층으로 구성된 기둥의 위쪽에는 기둥에 정교한 조각상이 남아 있습니다.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대중적인 인기가 없었던 황제로 측근에게 시해된 후 원로원에서 기록 말살형이 내려지자

에페수스에서는 격이 낮아질까봐 이 신전을 그의 아버지인 베스파시우스황제에게 봉헌했다고 합니다.

 

이 광장에는 기념비가 하나 있는데 이 기념비는 아우구스투스 황제(재위 BC 27∼AD 14)의 치세에

멤미우스(Memmius)에 의해 세워졌습니다.


멤미우스는 로마 최초의 종신 독재관이었던 술라(Sulla)의 손자로 이곳에는 에페소스에서 가장 큰 샘인

 폴리오샘(Fountain of Pollio)의 아치가 남아 있습니다.


이 샘은 섹스틸루스 폴리우스(Sextilius Pollius)의 이름으로 아틸리우스(Atilius)에 의해 세워졌습니다.

















멤비우스 기념비(Memmius monument)
















멤비우스기념비는 대학살을 당한 로마인들의 넋을 달래주기 위하여 BC 83년 슬라의 사위

 가이우스 멤비우스에 의하여 만들어 졌는데 이 기념비에는 로마의 권위를 상징하기 위하여

 장인인 슬라를 칭송하는 말들과 이 곳에서 죽임을 당한 로마인들을 위한

 추모의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목없는 석상들은 에페소스에 큰 공헌을 한 의원들을 기리기 위하여 세워진

것으로 비잔틴 시대의 유물입니다.
















비잔틴 시대의 석상으로 에페소스의 훌륭한 의원을 기리기 위하여 세워짐














승리의 문 (헤라클레스의 문)



사자가죽을 뒤집어 쓴 헤라클래스 조각을 좌우 대칭의 기둥에 새긴 이 문은 귀족과 서민생활 터전의

 경계 지점으로 보여지며 마차가 드나들 수 없도록 좁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에페소스는 전성기 때 25만명이 거주하였다고하니 고대 도시로서는 그 당시에

얼마나 번성한 도시였었는지는 짐작을 하실 수 있으리란 생각입니다.


 지금 위 사진에서 보이듯 크레테스 도로 폭을 보시면 수레 2대가 거뜬히 비켜갈수 있을 정도로

 넓은 도로였으며 도로 위에는 넓은 대리석 판석을 깔아서 비가 와도 오고 가는 사람들이 불편하지

 않도록 되어 있었는데, 이것 보다 세월이 흐른 뒤의 유럽의 오랜 고성이나 도시를 여행하였을 때

 제가 본 도로가 이 당시의 도로보다 좁았단 생각과 대부분 작은 사각의 거친 검은 화강암 돌로

 덮여 있어서 걷는데 다리가 무척 아팠던 적이 많아서 대조적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사유는 터키가 질이 좋은 화강암이 많이 생산되는 특수성도 있었겠지만,

 이렇게 도로를 크게 만들고 화려하게 치장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은 이 에페소란

 도시가 로마 다음으로  큰 번영을 하였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크레테스 도로는 헤라클레스 문에서 셀수스 도서관 앞까지 길게 뻗어 내리막으로

이루워져 있는데, 에페소스의 심장부를 관통하는 중심 도로로서 아랫 광장과 윗 광장을 

 이어주는 역활을 하였는데 오래 전 이 도로는 마차가 다닐 수 없는 인도였으며 좌,우에

 주랑이 있는 부분은 상가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합니다.


















트라야누스 황제의 분수대 전경















트라야누스황제의 분수대


크레테스 북쪽 끝에 위치한 12m 높이의 트라야누스 황제의 분수대는

102년~114년에 트라이안 황제에게 바쳐졌습니다.


우물 중앙 받침대 위에는 트라이안 황제의 동상이 있었고 그의 발목으로부터 물이 흘러

 나오게 되어 있었는데, 현재에는 받침대와 오른발 한쪽만 남아 있습니다.


 이 곳에서 여러 황실 가족의 동상이 발견되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고 합니다.  






















화려한 모자이크 바닥은 명품을 판매하던 상가 지역의 바닥으로 이렇게 화려하게 모자이크 장식을

 할 정도 문화가 앞섰다는 것이 놀랍기만 합니다.


















명품을 판매하는 매장의 화려한 모자이크 바닥















공중 목욕탕 위에 있는 하드리안 신전 앞 전경

















하드리안 신전 전경




하드리안 신전은 AD 138년경에 세워져 하드리안 황제에게 바쳐졌으며 신전입구에 4개의 코린트식

 기둥이 남아 있으며 그 기둥 위에 얹혀져 있는 화려한 처마가 보는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내게 합니다.








 









안쪽 문의 처마 중앙에는 두 팔을 벌린 메두사가 조각되어 있습니다.
















아치문에 새겨진 행운의 여신 니케


제 불로그 1편에 실린 니케 조각상에서 니케에 관하여 설명을 드렸기에 이 곳에서는 생략을 합니다만,

 1편의 표지에 실린 니케 조각상은 해라클레스 문의 아치 부조라고 합니다.  





















스콜라티키아의 목욕탕



4세기에 부유한 여성 자선가 스콜라스티키아가 기부한  스콜라티키아의 목욕탕

(Baths of Skolastikia)으로 직접 불을 때지 않고 파이프를 통해 온수를 공급 난방을 하였으며

 고대의 탈의실,냉탕 온탕, 증기탕 등을 엿볼 수 있습니다.















고대의 수세식 공중 화장실

















고대의 수세식 공중 유료 화장실


50여명이 동시에 큰 볼일을 볼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는데 공중 목욕탕에서 쓰고 나온 물이

 공중 화장실로 흘러 나오게 만들어  뒷 처리를 한 후 밑에서 큰 장대에 솜을 달아 뒷처리를

 해주었다고 하며 민망한 소리가 안들리게 하기 위하여 가운데 홀에서는 악사들이 음악을

연주하였으며 깨끗한 물이 흐르는 가장 앞자리가 제일 비싼 요금을 받았다고 합니다.

또 용변을 보기 전에 노예들이 미리 엉덩이로 차가운 기운을 뎁혀주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 당시에는 아주 현대적인 공중 화장실이라 하겠지만 서로 바라 보면서

볼일을 보았다는 생각에 남,여의 구별이 확실한 현대에서는 이런 남,여 혼욕과

 혼변이 제 생각엔 웃음이 나옵니다.
















후면의 목욕탕과 수세식 화장실




















석관




















사창가
















사창가로 가는 길목을 가르키는 표식으로 오늘 날의 사창가보다도 더 위생적이었다고 합니다.

 저 발보다 작으면 미셩년자로 구분해 입장을 금지했다고 하며 하트 모양과 작은 구멍은 사랑을

 얻고자 한다면 저 구멍을 채울 만큼의 돈을 가지고 와야만 한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현재에는 현금이  없으면 카드도 받는다는 이야기가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