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흥망성쇠에 따라 잊혀져 버린 고대도시 에페소스.3(2016.5.5)

2016. 12. 4. 23:30나의 이야기








에페소스(에베소) 셀수스 도서관 기둥에 기대어 기념사진을 찍는 어린 소녀들














셀수스도서관(두란노서원)



135년 줄리어스 아퀼라가 아시아주 총독으로 에페소에 부임했다가 죽은 그의 부친 셀수스를

 위해 지은 것으로 아고라시장 앞에 2층 건물로 세워졌으며, 1만2천권의 양피나 파피루스로 된

 책을 소장하고 있었는데, 습기나 좀, 벌레의 피해를 막기 위해 통풍이 잘 되도록

 설계를 하였다고 합니다.


사도바울이 2년동안 열심히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강론하며

 복음을 전한 곳도 바로 이곳입니다.(행19:9참고)




에페소스에 대한 역사적 고찰 :


에페소스(Ephesus)에 대한 역사적 사료는 기원전 13세기경 Hittite(힛타이트, 성경에 햇족)

비문에서 부터인데, 그 비문에 Apasas라고 불렸던 도시입니다.


그러나 역사에 자주 오르내리기 시작한 것은 리디아(Lydia)왕국의 크로수스(Croesus)왕이

이 도시를 기원전 560년 에 처음으로 침략하면서 부터라고 합니다.


그 후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기 시작하면서 페르시아와 그리스 사이의 각축장으로 변해 때로는 파괴되고,

 때로는 융성하면서 영고성쇠를 거듭했다고 합니다.


즉, 아테네와 스파르타 간의 유명한 델로스(Delos)동맹이나, 그리이스의 도시 국가와 페르시아 간의

 펠레폰네소스(Peloponnesos) 전쟁도 이 시기에 에페소스가 위치한 지중해 연안을 중심으로 발생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소용돌이 속의 에페소스도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으로 평온을 되찾고 융성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죽은 후에는 그의 장군 중에 한 사람이었던 리시마쿠스(Lysimachus)가 이 곳을 지배하면서

피온산 기슭에 새로운 도시의 건설을 명하여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유적은 바로 이 시대 때 부터의

 유적이라고 보시면 정확합니다.


그 후 로마가 지배하면서 아시아의 수도를 페르가뭄(Pergamum)에서 이 에페소스로 옮기고

 도시를 아름답게 꾸며 나갔다고 합니다.


안토니우스가 그의 정적 옥타비아누스(후에 아우구스트스 황제)와 대치하던 중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이곳에 머물기도 했습니다.


기원 후 1세기에 에페소스는 그리스도인 들에게 중요한 도시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7-8세기 들어와 다른 지중해 연안의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아랍인들의 침략을 감수해야 했으며

결국 1304년 오스만 투르크의 수중으로 떨어져서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 동안 잦은 지진과 이 지역을 흐르는 멘델레스 강의 범람으로 지각 변동에 의해 오늘날 바다는

 이곳에서 5Km 떨어진 쿠샤다스 지역까지 밀려나가 오늘날은 내륙에 위치하게 된 것입니다.








 







셀수스 도서관(Celsus)



 세계 고대3대 도서관에 해당되는 셀수스 도서관전경으로 에페소 유적들 가운데 가장 훌륭한 것 중

하나로 손꼽히는 셀수스 도서관은 오스트리아 고고학자들의 도움으로 최근에 재건되었습니다.


높은 초석 위에 세워진 이 건축물은 넓은 계단을 통해 올라갈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셀수스 도서관은 서기 135년, C. Aquila에 의해 아시아 지역의 통치자였던 그의 아버지,

셀수스 플레마이아누스(Celsus Polemaeanus)를 기리기 위한 목적으로 지어졌다고 합니다.


셀수스는 당시 이 지역의 총독으로 부임해 통치하였으며 이곳에서 생을 마쳤다고 합니다.


도서관은 많은 부분이 무너졌지만 외벽은 아직도 굳건히 서 있으며

벽에는 화려한 문양과 글자들이 새겨져 있습니다.


셀수스의 무덤은 중앙 적소 아래 지하에 위치해 있습니다.


세계 3대 고대 도서관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페르가문 도서관 및 셀수스 도서관입니다.


쥴리우스 셀수스는 소 아시아주의 총독으로 114년에 70세의 나이로 죽게 되자 그의 딸 쥴리우스 아퀼라가

 그의 아버지 셀수스를 기리기 위해 이 도서관을 건축하여 125년에 완성하였다고 합니다.


도서관 내부는 습기를 방지하기 위하여 이중 벽으로 되어 있어서 당시에 소장되어 있던

수 천 권의 두루마리 책을 보호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262년 코트족 침략 때 모두 소실되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리저리 연결된 도서관의 지하가 홍등가(사창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원래 이 지하터널은 목욕탕과 공중 화장실을 만든 스콜라스스티카가 목욕탕 옆 자신의 저택에서

셀수스 도서관까지 지하 비밀통로를 만들어 저녁이면 남성들만 이용할 수 있었던 도서관에서 책을 보았다고 하는데

후대에 그녀가 만든 비밀 통로는 도서관 바로 앞에 있던 사창가로 가는 통로로 이용되었다고 합니다.


도서관과 목욕탕 시설은 사창가와 서로 연결되어 있었으니 도서관을 이용하던 그 당시의

점잖았던 학자들도 에페소스 시민들의 눈을 피해 사창가를 드나들기에 좋았던 모양입니다.


당시에 매춘업은 일반적인 직업 중의 하나로 여겼다고 하며 항구와 가까운 곳에는 항상 매춘업소가 있어

오랜 기간을 바다에서 보낸 뱃사람이나 상인들이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고 합니다.


역사가들은 당시 에페소스(에베소)의 도시 규모에 비하여 유곽 건물이

아주 작은 것에 오히려 놀라워했다고 합니다.


고대의 매춘업소로 추정되는 유곽은 크레테스 거리와 대리석이 깔린 거리가 만나는 모서리에 있습니다.


이 건물은 다수의 작은 방들이 정원을 둘러싸고 있는 형태로써 4세기 무렵에 지어진 것입니다.


매춘부들이 일을 하던 유곽에는 창문이 없으며 방은 벽감(벽에 우묵하게 파놓은 부분) 위에 촛불을 두어

실내를 밝혔으며,유곽 건물 바닥에는 사계절을 표현하는 모자이크들이 아직도 남아 있으며 대리석으로

만든 살롱은 비너스 조각으로 장식하였다고 합니다.


이 도서관에는 세개의 문이 있는데 각각의 문은 지혜, 운명, 지식을 상징하며

 정결한 4명의 여신상들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지혜의 여신














미덕의 여신















지성의 여신















지식의 여신


※이 여신상들은 다 가품으로 이를 발굴하였던 오스트리아가 현재 보관하고 있습니다.
















2,000년전에 세워진 건물이라고 믿기엔 너무나 정교하고 아름다운......





















이 곳에는 건축되었을 당시 셀수스 플레마이아누스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에는 유실이 된 탓에.....
















환기구

























도서관 옆 건물안에 놓여져 있는 발견된 기념물들 가품



















셀수스도서관과 아고라를 구분하는 아치형 출입문 전경




















셀수스 도서관에서 아고라로 연결된 아치문 전경













아고라 터(Low Agora)


원형 경기장과 셀수스 도서관 사이에는 넓은 아고라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아고라는 지금의 시장과 같은 모습으로 무역이 이곳에서 이루어졌으며 많은 상품들을

 팔기도 한 대형 시장터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큰 아고라(상업아고라,commercial agora)


이 시장 터(상업 아고라)는 가로와 세로 110 m인 커다란 아고라로서 에베소 도시 생활의 중심이었다고 합니다.


이 아고라에서는 주로 청동 제품, 도자기 제품, 아라비아에서 온 향료들과 약용식물, 보석, 비단 등이 거래되었다고

 하는데, 로마의 집정관이었던 안토니우스와 이집트의 크레오파트라 여왕이 이곳을 자주 다녀갔다고 합니다.


이 아고라로 통하는 길은 에페소스 항구로 이어지는 항구대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아고라(시장)의 거리


시장 구역인 아고라(Agora)는 사방 100m 넓이의 사각형 구조로 되어 있는데

아고라의 기념문은 셀수스도서관 바로 옆에 있습니다.


셀수스 도서관에서 아고라로 들어가는 입구에 마제우스와 미트리다테스라는 두 개의 문을 말합니다.


국제적인 상업 도시인 에페소스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곳이기도 합니다.


상점들은 주랑을 따라 있고, 상점들의 뒤쪽에는 둥근 원통형의 지붕으로 된 창고가 있었으며

 해시계와 물시계가 아고라 중앙에 놓여 있었다고 합니다.

















대원형극장 전경















최상부까지 걸어서 올라가보았는데 너무 경사가 가파르고 높은 탓과

날씨마져 더워 땀깨나 흘렸다는 이야기가 .....ㅋㅋ




















원형 대극장 상단은 바라 보기만 하여도 무척 높다는 생각이.....

















이 곳에서 인증사진 한 장 정도는 남겨야 하는게 정도란 생각에 밑에 사진에 나오는

 젊은 유럽 여행객의 도움으로 인증 샷을 찍어 봅니다.


















사실 우리 일행들은 저렇게 원형대극장 하단부에서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있습니다만,

저는 제 본업인 자료 사진찍기에 열중하다보니 저런 설명은 무시 한채로 제 할 일만

 열심히 할 수 밖에는......ㅎㅎ


 그러한 이유로 이 곳에 올려드리는 글들은 많은 자료들을 찾아 복습을

 하며 올리는 쌩고생이 따른 답니다. 


 하긴 가이드라고 해보아야 유럽쪽에서 인문학을 제대로 공부를 한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에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어서 어차피 설명을 들어본다 한들 그닥 큰 도움은 안되지만.......



















무대 후면의 건물들은 사나운 동물들과 검투사들이 체류하였던 장소 
















유럽여행객들로 제 사진을 찍어 주신분들인데 두 부부의 자세가 참 독특합니다.ㅋ








 











반원형 대극장 (Great Theatre,야외극장)




 대 극장의 무대 바닥에서 관중석 맨 꼭대기까지 높이가 60m인 이 대극장의 관중석은 3 구역으로 나뉘어 있었으며

 약 25,000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었던 커다란 야외극장입니다.


음향 장치가 없어도 말을 하면 관객석의 뒷자리까지 들리도록 말을 할 수 있습니다.

마치 확성기를 사용하여 말하는 듯 하는 느낌을 준다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고대 도시의 인구를 추정할 때, 사용되는 척도가 대극장의 수용 인원수라고 하는데

예를 들면 대극장의 수용인원이 25,000명이라면, 그 도시에 살고 있었던 인구는 대략적으로 그

10배를 곱한 250,000명이 거주 하고 있었다고 추정한다는 것 입니다.


그러므로 에페소스(에베소) 인구는 약 250,000명 정도였었다고 추정을 합니다.


이곳 대 극장은 사도행전 19장에 기록되어 있는 사건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대 극장의 오케스트라는 반원보다 조금 더 큰 그레코로만(그리스, 로마) 양식으로 만들어져 있으며,

 그 뒤로 무대 건물이 있습니다.


 헬라 시대 때에 처음으로 만들어졌으나 로마의 네로 황제 때(AD 54-68) 변형되어, 확대되었으며

(230 m×30 m)이곳에서 음악회나 연극보다는 투사들의 전투 경기, 전차 경기들이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2만 5천명 이상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의 이 야외 원형 극장은

헬레니즘 시대에 처음 만들어졌다고 하나 현재 남아있는 것은 서기 1-2세기경의 유적입니다.


로마식 극장으로 재건된 것은 클라우디우스(34-41 AD) 시대를 첫 시작으로 하였고 이후 극장의 ,

3층이 네로 황제(54-68 AD)와 셉티무스 세베루스(193-211 AD) 시대에 지어졌습니다.


3단 구조의 이 원형극장의 각 단은 22개의 계단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총 높이가 18미터에 달하는 이 곳의 실내 정면은 각종 부조와 원주, 창으로 장식되어 있고

 최상위 단인 3층 윗부분에는 다양한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이 이곳에서 설교를 했던 반원형 대극장

에페소스는 사도 바울이 서기 53년부터 2년간 '신은 하나뿐이다'며 예수의 복음을

 전파한 곳으로 그가 로마 감옥에 갇혔을 때 쓴 편지 '에베소서(書)'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특히 기독교가 심한 박해 아래 있을 당시 많은 기독교인들을 잡아다가 맹수들의 밥으로 잔인하게

 죽였던 곳이었으며 에페소스의 시민들이 그 장면을 즐기던 장소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이곳을 발굴하면서 검투사들의 소품이 발견되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밀라노 칙령에 의해서 기독교가 공인되자, 기독교인들이 원형 경기장의

 좌석들을 다 뽑아버리고 그곳의 석재들을 가져다가 기독교 건축물을 세우는데 사용하기도 하였으며

 에페소스(에베소) 옆에 있었던 셀축의 사도요한 교회 건축에 많은 부분이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항구 대로(Harbor Street),아르카디네(Arkadiane)


“아르카디네(Arkadiane) 대로”라고 불리기도 하는 항구대로는 대리석으로 포장되어 있었으며,

그 길이 549 m고, 넓이는 11m 정도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길 양쪽으로 조각상 등으로 장식된 원주(둥근 기둥)가 늘어서 있는 회랑이 있었고

 밤에는 횃불로 길을 밝혔다고 합니다.


이 도로는 4세기 말에 플라비우스 아르카디우스 황제가 강의 범람으로 인하여

토사가 점점 높게 쌓이자 이 지역의 지반을 높여서 만들었던 길이라고 합니다.


고대에는 에페소스로 들어오는 많은 배들이 정박하였던 항구였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북적이던 곳이었지만,

얼마가지 못하여 바닷물이 빠져 나가고 풀밭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오랫동안 흙속에 묻혀있던 에페소스의 유적들은 1895년부터 발굴 작업이 진행되어 오고 있는데

지금까지 발굴되어진 에페소스의 유적들은 사실 일부에 지나지 않으며 계속되여 발굴되고 있습니다.


항구대로 부근에 성모 마리아가 에베소에 있었을 때 머물러 있었다고 하는 곳에 그녀를 기념하여 세워진

 “성모 마리아 교회”, “7인의 잠든 동굴”, 크레테스 길 뒤 언덕에 있었던 주택가, 등 수 많은 보물과 같은

 유적들을 눈으로 보며 손으로 만져보고, 안토니우스와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가 걸었던 길, 그리고

 뜨거운 햇빛이 반사되는 대리석 길을 걸어 가면서 2,000년 전으로 돌아가서 복음을 전하는

사도 바울의 신앙심을 느껴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에페소스란 생각이 .......

















여기저기 쌓여 있는 석관들

















유럽 방송국의 촬영장면





















후문 매표소 전경
















후문의 상가지역
















이 제 이 곳 에페소스(에베소)의 유적 관람을 마치고 오늘 저녁 묵을 숙소가 있는

해변의 도시 아이발맄으로 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