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2. 12. 11:13ㆍ나의 이야기
이른 새벽 시기리야 고성의 일출을 보기 위하여 어제 낮에 걸었던 해자 산책로를 따라
출입구 쪽으로 향하여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산 후 시기리야 고성을 향해 걸어갑니다.
그러나 이곳 시기리야 고성은 전체적으로 조명이 어두운 탓에 탐방로의 돌부리나 계단 턱에
부딪히지 않게 조심해 걷다 보니 신경은 곤두서고 무더위에 땀이 흐르는....
핸드폰 플래시에 의지해 앞으로 나가지만 워낙 어둡다 보니
지척을 구분하는 것도 어렵습니다.
어두운 정원과 돌계단 그리고 급 경사진 철책 계단을 고소 공포증 조차 느끼지 못한 채로 쉼을 반복하
고 흐르는 땀을 닦아가며 오르기를 반복한 끝에 드디어 성의 정상부에 다다릅니다.
그러나 아직도 정상부는 어둠이 가시지 않은 탓에 고성 잔해 축대에 앉아 멋진 일출을
기대하며 날이 밝아지기를 기다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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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출을 기다리는 수많은 여행객들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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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리야 고성위로 날이 밝아오기 시작하지만 날씨가 흐린 탓인지 화려한 일출은
희망에 그쳐버리고 이런 상태로 날은 밝아오기만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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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밝자 드러나기 시작하는 고성의 페허 건축물 흔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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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리야 고성에 살고 있는 원숭이들
455년부터 스리랑카를 지배했던 아누라다푸라왕국의 모리야 왕조 시조인 다투세나 왕(429~473)에게는
장남 카샤파(449~495)와 차남 목갈라나(450~515)라는 아들이 두 명 있었습니다.
그런데 장남인 카샤파의 어머니는 평민 출신이었지만 차남 목갈라나의
어머니는 왕가의 출신이었습니다.
카샤파가 장남이긴 하지만 왕위를 상속받기에 불리한 조건이었는데 473년에 카샤파는 다투세나의
조카이자, 군대의 지휘관인 미가라의 도움을 받아 쿠데타를 일으켜 아버지인 다투세나를
투옥시킨 후 스스로 왕위에 올라 카샤파 1세가 되었습니다.
왕이 된 카샤파 1세에게 미가라는 다투세나가 숨겨둔 보물에 관한 얘기를 하였고 카샤파 1세는
투옥한 다투세나에게 그 보물이 있는 곳의 위치를 알려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런데 다투세나가 보여준 보물이라는 것은 카샤파 1세의 기대와 달리 그가 재임 중일 때
만들었던 관개 시설용 저수지였습니다.
이에 화가 난 카샤파 1세는 아버지를 죽이고 말았다. 그리고 아버지를 죽인 일 때문에
카샤파 1세의 평판은 스리랑카 전역에서 크게 떨어지고 말았다.
한편, 동생 목갈라나는 이 쿠데타를 피해 인도로 도망쳤는데 왕권의 정통성을 가진 동생이 언제
돌아올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이를 두려워한 카샤파 1세는 477년, 수도였던 아누라다푸라를
떠나 시기리야로 천도하게 됩니다.
시기리야 일대는 기원전 3세기부터 사람들이 살고 있던 곳으로
특히 불교 승려들의 거주 지였었습니다.
카샤파 1세가 천도한 이후 시기리야 일대는 왕의 요새로 변모하게 되었는데 바위 정상에는 궁전과
부속 건물들, 바위를 파서 만든 거대한 수조가 만들어졌으며 중턱에 위치한 작은 평지에는 사자의
문이라 불리는 관문, 바위를 깎아 만든 거대한 벽에는 프레스코화와 낙서들, 그리고 지상에는
정원과 해자, 성벽이 만들어졌습니다.
하지만 시기리야의 영화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는데 약 20년 후인 495년, 인도에서 세력을 키운
목갈라나가 돌아오면서 동생과의 전투에서 패한 카샤파 1세가 자결하고 만 것입니다.
이후 왕이 된 목갈라나 1세는 이곳을 원래 수도원으로 사용하고 있었던 승려들에게
돌려주면서 왕도의 위상은 사라졌습니다.
이후 시기리야는 1831년 영국인 조나단 포브스(Jonathan Forbes)에 의해
세상에 다시 알려지게 될 때까지 잊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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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산 꼭대기 면적은 1만 5000㎡로 옛 위용을 가늠할 수 있는 왕궁 건물 터와 저수지, 정원,
연회장 터, 그리고 이들을 이어주는 비좁은 계단 길, 카시 아파 1세가 앉아 무희들의 춤을
감상했다는 대리석 의자가 남아 있습니다.
1982년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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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리야 고성에서 절친과 나
줌으로 당겨 본 시기리야 고성의 하단부 정원 전경
워터 가든은 서쪽 구역의 중앙 부분에서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세 개의 주요 정원이 있는데 첫 번째 정원은 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것은 네 개의 둑길을 사용하여 주요 구역과 연결되어 있으며
각 둑길의 머리에 연결하는 길이 있습니다.
두 번째는 경로의 양쪽에 설정된 두 개의 길고 깊은 연못을 포함합니다.
두 개의 얕은 구불구불 한 물줄기가 이 웅덩이로 이어지고 원형 석회암
판으로 만든 분수가 여기에 배치됩니다.
지하수도관은 특히 장마철 동안에도 작동하며 여러 분수에 물을 공급합니다.
두 번째 워터 가든의 양쪽에 두 개의 큰 섬이 있는데 이 섬의
평평한 표면에 여름 궁전이 세워졌습니다.
두 개의 섬이 더 북쪽과 남쪽에 위치해 있는데 이 섬은 첫 번째 물의 정원
섬과 비슷한 방식으로 지어졌습니다.
세 번째 정원은 다른 두 정원보다 높은 층에 위치해 있으며 북동쪽 구석에
연단이 올라간 커다란 팔각형 연못이 있습니다.
성채의 큰 벽돌과 돌담은 이 정원의 동쪽 가장자리에 있으며
정원은 동서 축에 대칭으로 지어졌습니다.
이 정원은 서쪽의 외부 해자와 시기리야 바위 남쪽의 큰 인공 호수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계단식 정원은 시기리야 바위 기슭의 자연 언덕에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일련의 테라스가 바위 정원의 통로에서 바위 위의 계단까지 솟아 있고 이들은 벽돌 벽의
구조로 만들어졌으며 바위 주변의 대략 동심원 구획으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계단식 정원을 통과하는 경로는 석회암 계단으로 형성되고 이 계단의 바위
측면에는 덮인 길이 있으며 사자 계단이 있는 최상층 테라스로 연결됩니다.
고성의 저수지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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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의 저수지를 배경으로 절친과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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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 정상부에서 살아가고 있는 개
이 넘은 새끼인데 관광객들의 귀요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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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 모델로 섭외한 유럽 여행객들로 자기들이 이런 포즈를 잡는다는 게
생각만 해도 우스운 모양인지.....
이들은 내게서 좋은 추억과 사진을 얻고 저는 좋은 작품을 얻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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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돌의자
줌으로 당겨 본 피도랑 갈라 전경
이 산 정상부에서 이곳 시기리야 락을 바라보는 경치가 멋지다고 하지만 이곳도 오르기가 힘든데
또 하산하여 이곳을 한 낮 무더위를 안고 오르기에는 무리란 생각에 포기를 하고 맙니다.
원래 이 바위산 계단은 모두 대나무였었다고 하니 얼마나 아슬아슬했을까요.
현재의 이 철제 계단은 식민지 시절 영국인들이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
하늘에서 촬영된 시기리야 고성 전경(참고자료)
스리랑카 중부에 있는 유적지로 이곳은 6세기경 절벽 위에 세워진 사자산이라는
고대 성채의 유적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성채가 세워진 암석절벽은 경사가 급하며 상단부가 양쪽으로 돌출되어 있으며 정상부의 해발고도는
349m이며, 정상에 오르려면 거대한 사자(sinha)의 벌어진 입처럼 생긴 입구와 목구멍처럼 생긴
좁은 통로(giriya)를 거쳐야만 합니다.
사자의 오른쪽 발톱 전경
시기리야 고성의 원래 출입문은 사자가 입을 벌린 머리 아래 아치형 몸통을 통과하도록 만들어
졌다고 하는데 지금은 훼손되어 양쪽의 발톱만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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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리야 락을 배경으로
스리랑카 중부의 담불라에 위치한 정글 가운데 우뚝 솟아있는 높이 약 180m 정도의 거대한 화강암 덩어리
위에 만든 요새와 그 일대. 시기리야(Sigiriya 또는 Sinhagiri)는 사자 바위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자의 도시라는 이름을 가진 싱가포르의 Singapura와 유사한 어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곳은 6세기경 절벽 위에 세워진 사자산이라는 고대 성채의 유적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성채가
세워진 암석절벽은 경사가 급하며 상단부가 양쪽으로 돌출되어 있습니다.
정상부의 해발고도는 349m이며, 주변 평야를 기준으로 한 높이는 180m에 이릅니다.
477년에 카시야파 1세는 적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 정상부의 평지에 궁전을 세웠는데 정상에 오르려면
거대한 사자(sinha)의 벌어진 입처럼 생긴 입구와 목구멍처럼 생긴 좁은 통로(giriya)를 거쳐야만 합니다.
시기리야라는 이름은 사자산 꼭대기로 연결되는 통로 모양에서 유래되었습니다.
폴란드 관광객 시실리아
산 아래 평원의 고대 유적지는 물을 주제로 한 전원도시로 5개의 성문을
가진 도시 성벽에는 이중으로 해자를 둘렀습니다.
크고 작은 방형의 연못을 대칭적으로 배열해 도시의 중심축으로 삼았고,
비정형적 연못을 삽입하여 자연스러운 경관도 만들었습니다.
사자문으로 오르는 진입로에 자연 암석을 이용한 바위 정원도 가꾸었습니다.
첫 천년의 세계 도시유적으로 가장 창의적인 사례라 꼽습니다.
스리랑카의 연대기 『쿨라밤사』는 카샤파를 가장 어리석은 패륜아로 기록했지만 전혀 다른 기록도
전하는데 시기리야는 부왕 대에 건립한 별궁이었고, 왕위 승계도 정상적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희대의 난봉왕으로 이곳을 쾌락의 궁궐로 바꾸었고 끝내 내연녀의
독살로 멸망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어떤 권력도 민심을 외면하면 천상의 왕국이라도 망한다는.....
벽화가 그려진 동굴로 올라가는 나선형 계단
하산길에 벽화가 그려진 동굴로 향하지만 내부 촬영은 금지가 된 탓에
여러 분들께 보여드릴 수가 없다 보니 아쉽기만 합니다.
관리하는 직원에게 카메라로 찍는데 벽화들이 손상하는 것도 아니고 여러 나라들의 귀중한 유산들도
다 사진을 찍을 수가 있는데 이런 관리 방법은 고쳐야 한다고 말은 해보지만 직원도 이해는
한다면서도 말단 직원이다 보니 웃기만 하는.....ㅎ
시기리야 고성 동굴 벽화 (참고 사진)
시기리야 중턱 평지 지대에는 바위를 깎아 만든 길이 140미터 높이 40미터에 달하는, 거울의 벽이라고
불리는 거대한 갤러리가 있는데 현재 이곳에는 위와 같은 프레스코화가 약 20여 점이 남아있습니다.
여기에는 여러 세대에 걸쳐 이곳을 찾아온 사람들이 쓰고 간 낙서들도 남아 있는데 낙서들의 내용에
따르면 원래 이곳에는 최대 500여 점 이상의 그림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낙서라고는 하지만 싱할라어로 쓰인 오래 전의 시 같은 것들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기록으로서의 가치가 있습니다.
이른 새벽에 어두운 곳을 따라 걷다 보니 전혀 보이지도 않았던 통로길도
이제야 제대로 보게 되는.....ㅎ
시기리야 도시의 정원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조경 정원 중 하나이기 때문에
이곳을 방문하신다면 중요하게 돌아볼 가치를 가진 곳입니다.
정원은 물의 정원, 동굴 및 볼더 정원, 계단식 정원의 세 가지 별개이지만
다 연결된 형태로 나뉘어 있습니다.
시기리야 랔 기념품 상가 지역
주차장 옆 연못
시기리야 랔 주차장 전경
시기리야 랔 투어를 마치고 돌아온 숙소에서 차와 간단한 식사로 조식을 먹은 후
툭툭이를 불러 타고 다시 담불라로 가서 그곳에서 버스 편으로 캔디로 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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