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 올란바토르 자이승 전승탑 전망대와 애국지사 이태준 기념 공원(2022.9.6)

2022. 9. 21. 08:53나의 이야기

 

Zaisan Hill Complex 건물 전경

 

자이승 승전탑이 있는 전망대를 오르기 위해서는 자이산 힐 컴풀렉스 쇼핑센터 안의

승강기를 이용하여 오르는 게 편합니다. 

 

 

그랜드 힐 울란바토르 호텔에서 뷔페식으로 아침 식사를 한 후 오늘 첫 여행지로 찾았던

자이승 승전 기념탑은 울란바토르 외곽의 신도시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자이산은 영문 표기 방식이기 때문에 자이승이란 몽골식 표기법이

정확하다는 생각이.....ㅎ 

 

 

자이승 지역의 울란바토르 신도시 전경

 

 

화단에 곱게 핀 초화들

 

 

Zaisan Hill Complex 쇼핑몰 내부 천장

 

 

Zaisan Hill Complex 쇼핑몰 내부 벽면을 장식한 몽골의 유화들

 

 

Zaisan Hill Complex 쇼핑몰 상층부 내부 천장의 아름다운 조명

 

 

Zaisan Hill Complex 쇼핑몰 상층부 연결 통로로 자이승 승전탑 전망대로

오를 수 있는 계단을 만나게 됩니다.

 

 

Zaisan Hill Complex 쇼핑몰과 자이승 승전탑 전망대로 연결되는 상층부 연결 통로의 투명한 바닥

유리 아래쪽에는 몽골에서 많이 발견되는 공룡 화석을 주제로 한 테마 시설이 있는 것 같아 보였는데

코로나 영향 때문인지 썰렁하게 내려다 보였습니다.ㅎ

 

 

자이승 승전탑 전망대로 오르는 가파른 계단 전경 

 

 

계단을 오르면서 바라다보는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 시가지 전경

 

 

가죽 표면에 유화로 몽골의 자연들을 그린 전통 몽골 채색화 그림들로 이곳에서는 한화로 한 장당

5,000원에 판매를 하고 있었는데  이런 그림들은 크기와 판매 장소에 따라 가격이 조금 달랐는데

시내 중심가 쪽에서는 이것보다 조금 큰 그림인 경우 보통 30,000원 정도에 판매를 하고

있습니다. 

 

 

자이승 전승탑은 울란바타르 시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곳으로 세계 제2차 대전 때 러시아

연합군이 일본군에 승리한 것을 기념하면서 러시아에서 1971년에 세운 전승탑입니다.

 

정상에는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상황을 전하는 그림으로

모자이크가 원형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제가 코카서스에 여행 갔을 때 아르메니아에서도 이와 비슷한 전승탑을 본 적이 있었는데

꼭 판박이 같아서 조금 웃음이 나왔습니다. 

 

수흐바타르 광장(현 칭기즈칸 광장)에서 남쪽으로 3Km 지점인 자이산 정상에 있는 자이승 전승탑

울란바토르에 주요 관광지로 꼽히고 있습니다

 

. 전승탑에는 ‘소련사의 기억은 하늘의 태양처럼 영원하고, 대지를 태우는 불처럼 신성하다.’

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것을 기념하는 몽-소 우호친선의 상징물인 자이승 전승탑은

 1938년과 1945년 두 차례에 걸쳐서 일본군의 침공을 러시아군과 연합하여 막아냈는데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 전쟁 영웅과 전사자들을 기리기 위해 혁명 50주년을 맞아

1971년에 소련의 기증으로 전망 좋은 보그드(Bogd) 산 정상에 세워졌습니다.

 

이 전승탑의 기원이 된 할힌골 전투(노몬한 전투)는 일본 관동군과 만주 군대 소련군과 몽골

연합군 간의 전투로 1939년 5월 몽골군이 할하강을 건너오자 일본군은 불법 월경으로 간주하여

충돌했는데, 이때 소련이 기계화 부대를 투입하여 일본군을 전멸시켰습니다.

 

그러자 일본은 만주에 주둔해 있던 항공과 전차 병력을 총동원하여 대공세를 취하였으나,

G.K. 주코프가 지휘하는 소련군과 몽골군의 반격으로 참패했는데 사상자가 무려 17,500여 명이나

되었고 소련과 몽골군도 18,500여 명의 사상자가 났다고 합니다.

 

이때는 세계 2차 대전 직전으로 양국은 서로 극동에서의 전쟁을 피하려 하였기 때문에 그 해 9월

정전협정이 성립되어 수개월간의 국경분쟁은 일단락되었고, 이듬해 두 나라는 만주와 몽골의

국경선을 소련의 중재안대로 확정했습니다.

 

이 전투에서 많은 몽골과 소련 연합군은 일본군을 포로로 잡아서 국토건설과

건축 공사에 강제노동을 시켰다고 합니다.

 

 

자이승 전승탑 내부에 설치된 불이 24시간 타고 있는 제단 전경

 

 

자이승 전승탑 모자이크 벽화 전경

 

 

자이승 전승탑을 배경으로

 

 

자이승 전승탑 전망대에서 바라다 보이는 울란바토르의 젖줄인 톨강 전경

 

 

자이승 승전탑 전망대를 돌아본 후 도로 건너편에 있는

이태준 선생 기념공원으로 향합니다. 

 

 

이태준 기념 공원은 몽골의 중요한 관광지의 하나인 자이승 전승탑 근처에

위치하여 많은 한국 관광객들이 방문하는 명소입니다.

 

 

대암 이태준 선생은 그동안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 크게 알려지지는 않았던 분으로 1980년 우리 정부에

의해 건국공로 포상이 수여되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으로 훈격이 격상되었습니다.

 

일제 강점기 조국으로부터 약 2,000km 떨어진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에서 항일 독립운동가로

그리고 몽골 마지막 왕의 어의(御醫)로써 뜨거운 38년의 삶을 살다가신 이태준 선생이 우리의

주목받게 된 것은 한. 몽 수교 이후였습니다.

 

수교 이후 선생의 모교인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봉사단, 한인회, 공동 학술 조사단 등에 의해

이태준 선생의 발자취가 하나둘씩 알려지기 시작했고, 몽골 연세 친선병원(1994년 건립) 원장이자

재몽골 한인 회장을 맡고 있었던 전의철 박사 등 뜻있는 분들의 노력으로 200년 7월 8일 이곳에

기념비와 가묘가 세워졌습니다.

 

몽골 정부가 제공한 2,000평의 부지와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총학생회, 대한민국 국가보훈처 및

독지가들의 후원으로 2001년 7월 19일 기념공원이 준공되었습니다.

 

공원에는 선생의 가묘, 기념비, 한국 전통 건축양식의 팔각정 등이

자리하고 있으며 산책로 등이 꾸며져 있습니다.

 

 

이태준 선생님 기념 공원 비

 

 

애국지사 이태준 선생의 가묘

 

이태준 선생의 본관은 인천이며, 1883년 11월 23일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명관리 1144번지에서 태어났습니다.

 

인천 이씨는 김해 김씨에서 사성을 받아 변하게 된 성씨로

가락 김해 김씨 종친회의 일족입니다.  

 

이태준 선생은 어려서는 고향의 서당에서 수학했으며 당시 풍습대로

일찍 결혼해 두 딸을 낳았습니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조국이 반식민지 상태가 되고 1906년 부인을 잃자 상경하여

서울역 맞은편 세브란스 병원 앞에 있던 김 형제 상회에 취직했다고 합니다.

 

이 상회를 운영하던 김필순(金弼淳)은 제중원(세브란스병원)에서 의학을 공부하는

중이고 도산 안창호(安昌浩)와 의형제를 맺은 사이였습니다.

 

안창호 등 독립지사들은 이 상회를 비밀 회합 장소로 이용하였는데 이태준은 1907년 8월1일

일본군에 의한 강제 해산에 맞서 전투를 벌이다 한국 군인들이 세브란스병원으로 이송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이런 영향으로 이태준은 1907년 10월 1일 세브란스병원 의학교

(현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했습니다.

 

이 의학교는 1885년 4월 개원한 한국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제중원에 뿌리를 두었는데 1908년 6월

스승이자 동지인 김필순이 졸업해 한국 최초의 의사 7명중 1명이 됐으며,모교에 남아 후학을

가르치면서 일제의 침략에 맞서 활발한 할동을 벌였습니다.

 

의학생 이태준은 1909년 말 안중근의 이토히로부미 암살 사건으로 체포됐다가 1910년 2월에 석방돼

세브란스병원에 입원중인 안창호의 권유로 항일 비밀결사단체인 신민회(新民會)의 자매단체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에 가입했습니다.

 

그가 4학년이던 1910년 8월 조국은 일제에 의해 강제로 병합 당했습니다.

 

이태준 선생은 1911년 6월 2일 세브란스병원 의학교를 제2회 졸업하고

의술개업인허장 (제92호)을 수여받았습니다. 

 

이태준은 김필순과 함께 조국의 독립을 위해 다각도로 노력하였는데 일제는 1911년 말 한국의

애국지사들을 대량 검거하기 위해 이른바 105인 사건을 조작하였고 김필순도 검거 대상에

포함되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김필순이 먼저 중국으로 망명하기로 하여 1911년 12월 31일 망명길에 오르는

김필순을 배웅하고 돌아온 이태준은 병원에 두 사람이 망명한다는 소문이 퍼져 있는 것을

알게 되자 신변에 위험을 느껴 급히 망명길에 오르게 됩니다.

 

이태준은 중국 남경의 '기독회의원'에서 의사로 활동하면서 나라의 독립을 위한 계획을 모색하다가

훗날 자신의 처사촌이 되는 애국지사 김규식(김필순의 매제)의 권유로 1914년 몽골의 고륜

(庫倫,몽골어로 Huree,러시아로 Urga,혁명후에는 Ulaan-baatar)으로 활동무대를 옮겼습니다.

 

까우리(高麗)고려 의사 이태준은 '동의의국'(同義醫局)이라는 이름의 병원을

개설해 화류병 퇴치에 앞장섰습니다.

 

이태준은 울란바트로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이름이 알려졌는데 몽골 사람들은

그를 '신인(神人)'혹은 '극락에서 강림한 여래불(如來佛)'을 대하듯 하였다고 합니다.

 

마침내 몽골 마지막 왕인 보그드칸 8세의 어의가 됐으며,1919년 7월

'에르데닌오치르'라는 높은 등급의 훈장을 받았습니다

 

몽골 사회에서 두터운 신뢰를 쌓은 이태준은 각지의 애국지사들과 긴밀한 연락관계를

유지하면서 주요한 비밀 항일 활동에 큰 공적을 남겼습니다.

 

한인사회당 주도로 소비에트 정부로 부터 확보한 이른바 크민테른 자금 40만 루블(그중 4만 루불을

이태준이 직접 운송)상당의 금괴 운송에 깊숙히 관여 하였으며 김원봉이 이끄는 의열단에 가입하여

우수한 폭탄제조자인 마쟈르를  소개시킴을써 보다 체계적이고 효과적인 항일 운동이 이루어지는데

큰 역활을 하였다고 합니다.

 

선생의 비극적 최후는 러시아 혁명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1921년 2월 러시아 백위파로 잔인하기가

악명 높은 '미친 남작'운게른(Ungeln Sternberg)이 몽골을 점령한 후 이태준 선생은 38세의 나이에

울란바트르에 거주하는 있던 많은 외국인들과 함께 운게른의 부하들에 의하여 밧줄에

교살되었다고 합니다.

 

선생님의 묘는 몽골의 성산(聖山)보그드산 근처로

이 기념 공원 근처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이태준 기념관 전경(코로나로 한국인 관광객이 줄어선지 현재 미개방 상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