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7. 9. 18:29ㆍ나의 이야기
대정읍성의 추사유배지에 세워진 추사의 동상
조선의 위대한 서예가 추사 김정희(1786~1856)는 쉰다섯에
제주도로 유배와 예순세 살에 육지로 돌아갔습니다.
사랑하는 아내도 그사이 머나먼 육지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추사는 제주도에서도 가장 벽지인
대정현 유배지에서 감내하기 힘든 고통을 견디며 추사체를 완성했고 명작으로 이름난
‘세한도’를 그렀습니다.
유배의 고장 대정고을엔 추사 유배지와 추사가 즐겨 찾았던
단산(바굼지오름)과 그 아래에 대정향교가 있습니다.
제주도의 깊은 속살을 보여주기 위하여 여행을 함께한 여동생 내외
제주 서귀포시 대정고을은 온통 ‘추사’의 흔적으로 뒤덮여 있는데 추사 김정희 선생이 유배생활을
한 대정고을은 대정읍 동부에 있는 인성·안성·보성·구억·신평리 등 5개 마을을 합쳐 이르는 곳으로
평화로를 타고 도착한 대정 지역에서 처음 맞닥뜨리는 곳은 대정읍성입니다.
대정읍성은 조선시대 제주도의 3개 읍성 가운데 하나로
대정현에 만들어진 성곽 유적지입니다.
복원사업이 거의 끝난 대정성지는 길이 1467m, 높이 5.22m로 남문과 동문, 서문과 문 앞에
있던 각 4기씩의 돌하르방들이 제주도 민속자료로 보존되고 있습니다.
추사는 이곳에서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고난과 좌절, 체념을 딛고 글씨와 그림, 시,
산문에 이르기까지 후대에 길이 남을 업적을 이루었습니다.
그를 당대 최고의 학자로 올려놓은 추사체라는 서체와 훗날 국보 제180호로 지정된
‘세한도(歲寒圖)’도 그의 유배 시절 완성됐습니다.
이를 기리기 위해 대정읍성 동문 터 옆에는 제주 추사관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추사는 자신의 적거지를 귤중옥(橘中屋)이라 하고, 한겨울 은은한 향기를 내뿜는 수선화를
아끼고 사랑할 정도로 제주의 자연을 예찬하였다고 합니다.
“때마침 수선화를 대하니 아름다운 선비가 몹시 생각났다(政對水仙花甚思佳士)”
제주추사관에는 추사의 글씨를 탁본으로 찍어 만든 수선화부가 있습니다.
추사 김정희는 영조의 사위였던 김한신(金漢藎)의 증손으로, 조선 순조 19년(1819)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대사성·이조참판 등의 벼슬을 지냈습니다.
그러다 조선 헌종 6년(1840) 55세 되던 해에 동지부사로 임명되어 중국행을 앞두고
안동김씨 세력과의 권력 싸움에서 밀려나 제주도로 유배되었습니다.
유배 초기에 포도청의 부장인 송계순의 집에 머물다가 몇 년 뒤 현재의 유배지로
지정된 강도순의 집으로 이사하였습니다.
이 집은 1948년 제주도 4·3 사건 때 불타버리고 빈 터만 남았다가 1984년
강도순 증손의 고증에 따라 다시 지은 것입니다.
김정희는 이 곳에 머물면서 추사체를 완성하고, <완당 세한도>(국보 제180호)를 비롯한 많은 서화를
그렸으며, 제주지방 유생들에게 학문과 서예를 가르치는 등 많은 공적을 남겼습니다.
추사유배지는 추사 김정희선생이 제주에 남긴 유배 문학의 커다란 문화적 가치뿐만 아니라
그가 남긴 금석학과 유학, 서학의 의미는 역사적·학술적으로 크게 평가되고 있습니다.
초의선사에 관해서는 제 불로그에 올린 적이 있기에 참고하셔도 좋습니다.(https://blog.daum.net/kyh0221/3215#none)
추사는 초의 선사에게 많은 편지를 썼는데 척박한 제주도 유배지까지 찾아온
선사의 마음에 늘 고마움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靜坐處茶半香初(정좌처다 반향초)
妙用時水流花開(묘용시 수류화개).”
“고요히 앉아 차를 마시는데
반나절 후에도 그 향은 처음 그대로이고
묘한 마음을 쓸 때는 물이 흐르고
꽃이 피는 듯하네.”
‘명선(茗禪)’의 글씨는 동갑내기인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가
초의(草衣, 1786~1866) 선사에게 써준 것입니다.
두 분은 차를 매개체로 깊은 우정을 나누었는데 추사의 부친 김노경은 유서 깊은 유학자 가문의
아들이 절간의 중과 교류를 걱정하여 하루는 일지암(一枝庵)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됩니다.
요즘 부모와 옛 부모의 심정은 시간만 다를 뿐, 자식 걱정은 똑같은 모양으로
추사의 부친은 초의 선사에게 일지암의 유천(乳泉)을 물었습니다.
차의 기본이 되는 물에 대해서 질문한 것으로 이는 곧 초의 선사의
살림살이를 보여 달라는 것이지요.
“내가 사는 산에는 끝도 없이
흐르는 물이 있어
사방 모든 중생의 목마름을
채우고도 남는다.
각자 표주박을 하나씩 들고 와
물을 떠 가거라
갈 때는 달빛도 하나씩
건져가라.”
복원된 적거지는 유배 생활의 대부분을 보냈던 당시 대정고을의 부자 강도순의 집으로
제주 남제주군(현재의 서귀포시)이 1983년 복원한 적거지는 고증에 따라 60여 평의 터에
초가 다섯 채를 지었습니다.
(2007년 7월에는 사적 제487호로 지정)
강도순의 집은 안거리(안채), 바깥채(바깥채), 모거리(별채), 쇠막과 말방아까지 갖춘 부잣집으로
거리에는 추사와 초의선사가 차를 앞에 두고 앉아 대담을 나누는 모습이 재현돼 있고,
바깥채에는 추사가 제주의 청년들에게 학문과 서예를 가르치던 모습을 재현하였습니다.
대정고을에 도착한 추사의 첫 유배지는 안성리 송계순의 집이었습니다.
추사는 이곳에 위리안치됐다가 2년 여가 지난 뒤인 1842년 제주도 전통 이사철인 신구간에 인근
강도순의 집으로 적거지를 옮겼고, 유배가 끝날 무렵에는 식수의 불편 때문에 안덕계곡이 있는
창천리로 옮긴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대정읍성 안의 돌담이 아름답던 마눌밭에서
대정읍성 안의 우물터 전경(물이 고갈되어 말라버린)
대정읍성의 성곽을 배경으로
추사관에 전시된 추사의 흉상(임옥상 작품)
세한도 (국보 제180호)
추사 김정희의 대표작으로 조선 말기를 풍미했던 김정희의 문인화 이념의 최고 정수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제자인 역관 이상적의 변함없는 의리를 날씨가 추워진 뒤 제일 늦게 낙엽 지는 소나무와
잣나무의 지조에 비유하여 1844년 제주도 유배지에서 답례로 그려준 것입니다.
그림 끝에 작화 경위를 담은 작가 자신의 발문과 청대 16 명사들의 찬시가 적혀 있고, 이어 뒷날
이 그림을 본 김정희의 문하생 김석준의 찬문과 오세창·이시영의 배관기 등이 함께 붙어 긴
두루마리를 이루고 있습니다.
세한도는 문인화이므로 그림의 미술적 기교보다는 그 그림을 그리게 된
동기나 제목 부시 등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이 그림은, 추사 김정희가 문인화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사의(寫意)를 가장 잘 나타내는 그림이기
때문에 유명한데, 사의란, 그림은 그림 자체보다, 그 의미가 중요하다는 주장으로 세한도는
추사가 이 그림을 그리게 된 과정과 그 감정을 잘 나타냈다는 점에서 유명한 것입니다.
세한도
세한도(歲寒圖)라는 제목은 논어 자한편에서 따왔는데, 사람은 고난을 겪을 때라야
비로소 그 지조의 일관성이나 인격의 고귀함 등이 드러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건축가 승효상이 의도한 세한도처럼 추사관에서 찾은 아름다운 풍경 ㅎ
대정향교 동재에 걸렸던 의문당 현판
대정향교 학생들의 기숙사이자 공부방인 동재에 걸렸던 ‘의문당(疑問堂)’이라는
현판은 추사가 제주에 있는 제자들과의 교류 흔적을 보여줍니다.
현재 추사관에 전시된 이 현판 뒷면에는 훈장 강사공의 요청으로 1846년 11월 추사가 쓰고
향원 오재복이 새겼다고 돼 있습니다.
대정향교는 유배지에서 2㎞ 남짓 떨어진 단산(바굼지 오름) 아래 있는데 제 블로그에도
올린 적이 있사오니 제 블로그 검색창을 통하여 확인하실 수가 있습니다.
제 블로그에 올려진 대정향교 바로가기 https://blog.daum.net/kyh0221/3015
추사가 유배생활을 하는 고난 속에서도 독서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제자 이상적 덕분이었는데
그는 역관으로 드나들던 청나라에서 여러 책을 구하여 추사에게 보냈습니다.
이런 그의 정성에 감동한 추사는 제주도에 유배 온 지 5년이 지난 59살 때인 1844년,
생애 최고의 작품으로 꼽히는 ‘세한도’를 그려주었습니다.
‘세한도’라는 표제와 소나무와 잣나무, 가옥 등으로 이뤄진 유배지의 풍경을 그려 “이상적은
감상하라(藕船是賞)’’라고 쓴 뒤 “날이 차가워 다른 나무들이 시든 뒤에야 비로소 소나무가
늘 푸르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내용이 담긴 발문을 썼습니다.
제주 추사관에 있는 ‘세한도’는 당대 최고의 추사 연구자였던 후지츠카 치카시(1879~1948)가
1939년 복제해 만든 한정본 100점 가운데 한 점이라고 합니다.
공산 무인 수류화개
"빈산에 사람 없고 물 흐르고 꽃이 핀다"
홍도촌사
추사가 행서체로 쓴 현판으로 홍도는 벼의 일종이나 홍두에서 따와
"사랑이 있는 집"이란 의미입니다.
천개사경편
풍사실
시례고가
여군 사청
소요암
전북 변산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소요암의 현판 글씨로
추사체의 시작을 알리는 글이라 합니다.
탐광실
시경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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