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전등화같았던 조선시대 말의 시대상을 느끼게 하였던 운현궁 유물 전시관(2022.1.6)

2022. 1. 11. 10:46나의 이야기

 

운현궁 유물전시관  전경

 

 

※ 본 유물은 복제품으로 실제 유물은 서울역사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흥선대원군 이하응 초상화

 

조선의 마지막 봉건 주의자 흥선 대원군

 

흥선대원군은 조선 말 봉건제 해체의 위기를 체제의 내적 개혁으로 극복하려 했으며, 위정척사적

입장에서 서구 제국주의의 침략에 강력하게 대응했던 인물입니다.

 

그의 개혁 정치는 일시적으로 내부의 모순을 완화시키고 외세의 침략을 저지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으나,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여 조선의 근대화를 늦추었다는 근본적인 한계를 지닙니다.

 

명성황후와 대립하게 된 후에는 변화무쌍한 정치 노선을 걸었으나 초기 10년간의 집정은 강직한

성격과 과감한 개혁 정치로 내치(內治)를 안정시켰고, 서구 열강의 침략적 접근에서 민족을

수호할 수 있었습니다.

 

이하응은 영조의 현손 남연군 구(球)의 아들이며 고종의 아버지로 열두 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열일곱 살 때에는 아버지마저 여읜 뒤 사고무친(四顧無親)으로 불우한 청년기를 보냈으며,

1843년 흥선군에 봉해졌습니다.

 

당시는 안동 김씨가 세도를 누리며 왕실과 종친에 갖가지 통제와 위협을

가하던 시절이라 낮은 관직을 전전했습니다.

 

그러나 추사 김정희에게 붓글씨를 배우고, 청나라의 새로운 학문과 정치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마음속에 큰 뜻과 야심을 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실이 알려질 경우 종친으로서 받게 될 견제를

우려해 자신을 숨기려고 애를 썼습니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그는 신정 대비 조 씨에게 만약 철종이 후사 없이 세상을 뜨게 되면

자신의 둘째 아들 명복(命福, 고종의 아명)을 후계자로 삼을 것을 약속받았습니다.

 

마침내 1863년, 철종이 후사 없이 세상을 뜨자 그는 인생 최대의 전환점을 맞게 되었는데 신정왕후가

약속대로 열두 살의 명복을 익종의 양자로 들이고 익성 군으로 봉해 대통을 계승하자는 원로대신

정원용(鄭元容)의 말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60여 년간 권력을 쥐고 흔들던 안동 김씨와 풍양 조 씨의 세력은

무너지고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시대가 도래하게 되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이 집권하던 시기는 격변의 시기로 조선왕조의 통치 규범이던 중화적 질서와 성리학적

사상이 무너지기 시작했고, 수천 년을 이어온 전제군주제와 신분제가 밑바닥부터 흔들리기

시작했으며, 외세의 침략에 대처하기 위해 새로운 질서에 대한 모색이 이루어지고 있던

때였습니다.

 

대권을 잡은 그는 조정에서 안동 김씨를 몰아내고 당파를 가리지 않고 인재를 등용했으며,

부패한 관리를 적발하여 파직시켰습니다.

 

이와 함께 세도 정권기를 거치면서 실추된 왕족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왕족을 집중적으로

발탁해 권력의 핵심부에 등용했습니다.

 

또한 국가 재정의 낭비와 붕당의 요인이던 서원을 대거 철폐해

정치 폐단을 근본적으로 막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지방 양반들과 유생들의 반발을 초래하여 훗날 대원군이

정계에서 물러나는 원인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운현궁 현재 배치 모형도 

 

 

흥선대원군 낙관

 

 

교지와 흥선대원군의 작품

 

대원군은 서화에 능했으며 특히 난초를 잘 그렸는데 10년간의 집권기를 통해 왕권강화를 꾀하면서

체제의 내적 개혁으로 봉건제 해체의 위기를 극복하려 했으며, 서구 제국주의의 침략에 대해서는

위정척사적 입장에서 국력을 모아 강력하게 대응했습니다.

 

그의 개혁정치는 일시적으로 내부적 모순을 완화시키고 외세의 침략을 저지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으나, 모두 근본적으로 해결되지는 않았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왕실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 경복궁 중건사업을 했으며, 그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거목(巨木)·거석(巨石)을 징발하는 한편 재원 마련을 위해 원납전(願納錢) 징수,

결두전(結頭錢) 부가, 성문세(城門稅) 부과, 당백전(當百錢) 주조 등을 했습니다.

 

이어 종묘·종친부·6조 이하의 각 관서와 도성까지 수축함으로써 한양의 면모를 일신했습니다.

 

 

 

척화비

 

 

교의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제왕이 아니면서 제왕의 권력을 누렸고,

왕통이 아니면서 왕통을 이어 주었습니다.

 

통치자로서의 그의 여러 면모는 영민하고 뛰어났다고 하나 새로운 시대를 보는 안목이 부족해서

비운을 겪은 불행한 노인이기도 했는데 이렇게 그에 대한 평가는 뚜렷하게 갈립니다.

이런 대원군의 풍운사를 통해 용기와 결단을 고루 갖춘 뛰어난 인물이라도

시대의 운을 감당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느끼게 해 줍니다.

 

그리고 아무리 뛰어난 통치술을 가지고 있더라도 국내외적으로 밀려오는 대세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면 나라를 지킬 수 없다는 사실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운현궁을 돌아보면서 그 혼란한 시기에 이만한 저택과 경복궁 재건이라는 발상을 하고

이것을 실행한 조선의 왕족들과 지배계층들이란게 참 한심스럽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정도의 재정을 투입할 여력이 남아있었다면 이런 쓰잘데 없는 재정을 조선의

근대화나 자주 국방에 투자하였더라면 쓰라린 내세의 침입은 받지 않았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ㅜㅜ 

 

 

잠저의 정이품 대부송 경송 모형(고사)

 

 

상궁의 청녹색 당의와 명성황후의 홍색 노의

 

 

 

운현궁과 후면 중앙에 보이는 양관

 

 

노안당 전경

 

 

운현궁유물전시관

 

 

운현궁의 단계적 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