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 9. 23:33ㆍ나의 이야기
고종의 잠저이자 흥선대원군의 자택이었던 운현궁(사적 재 257호) 전경
서울특별시 사적 제257호로서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일대로에 있는 운현궁은 조선조 제26대
임금인 고종의 잠저(潛邸)이며 흥선대원군의 사저이며, 한국 근대사의 유적 중에서
대원군의 정치활동의 근거지로서 유서 깊은 곳입니다.
운현궁은 흥선군 이하응이 왕실 집권을 실현시킨 산실이자 집권 이후 대원군의
위치에서 왕도정치로의 개혁 의지를 단행한 곳이기도 합니다.
대원군이 권력에서 하야한 이후에도 계속해서 정치적 영향력을 내외에 행사한 곳으로써
고종이 즉위하기 전까지 살았던 잠저(潛邸)였기 때문에 역사적 상징성이 더욱 큽니다.
흥선군의 사저가 운현궁으로 불리게 된 것은 1863년 12월 9일 흥선군을 흥선대원군으로,
부인 민 씨를 부대부인으로 작호를 주는 교지가 내려진 때부터였습니다.
고종이 12살까지 살았던 운현궁은 철종 때 옛 관상감 터였던 운현궁에 왕기가 있다는 내용의
민요가 항간에 유행하였으며, 고종이 등극한 후 대원군이 운현궁 터를 다시 확장하였습니다.
운현(雲峴)이란 당시 서운관(書雲觀)이 있는 그 앞의 고개 이름이었으며, 서운관은
세조 때 관상감(觀象監)으로 개칭되었으나 별호로 그대로 통용되었습니다.
즉 운현이란 서운관의 약칭으로 고종이 즉위한 뒤 운현궁으로 부르게 된 것은 왕의 잠저시의 거처를
본궁이라고 하는 선례와 ‘운현’이라는 지명에 유래하여 운현궁으로 불리게 된 것입니다.
고종의 잠저는 당시 대왕대비 교지를 받들어 영의정 김좌근, 도승지 민치상, 기사관 박해철·김병익 등
일행이 명복(明福-고종의 이름)에게 익종의 대통을 계승하게 하도록 고종을 맞이하러 최상급의 가마
행렬을 갖추어 관현(觀峴)의 흥선군 사저에 갔을 때 흥선군의 위엄 있는 자세와 그의 둘째 아들인
명복의 천진스러웠던 모습에 대한 사실적 묘사에서 운현궁이 고종의 잠저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일 강제 병합 후 일제는 1912년 토지조사를 하면서 대한제국의 황실 재산을 몰수하여 국유화하고
이왕직 장관을 시켜서 운현궁을 관리하게 하였는데 그러나 실제로 운현궁을 유지·관리하는 일은
소유권과 관계없이 이로당의 안주인들이 계속 맡아서 했습니다.
운현궁의 소유권이 다시 대원군의 후손에게 넘겨지게 된 것은
1948년 미군정청의 공문에 의해서였습니다.
이후 그 소유권을 중심으로 대한민국 정부와 대원군 후손 사이에 법정 공방이 있었으나 그해 9월 21일 결국 대원군의 5대손 이청(李淸, 1936- ) 씨에게 운현궁 소유권이 확정되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1991년 운현궁을 유지, 관리하는 데 여러 가지 어려움이 생기면서 양도 의사를 이청 씨가
밝힘에 따라 서울시에서 매입하게 되었고, 1993년 12월부터 보수공사를 시작하였고 현재의 모습으로
정비되었습니다.
현재 운현궁 영역에 남아 있는 주요 건물들은 노안당, 노락당, 이로당이 있으며, 지금은 소유가 바뀌어
서울시 민속자료로 지정된 김승헌 가 역시 큰아들 이재면 부부가 거처하던 경로당으로 운현궁의
일부였습니다.
대원군의 정치 생애와 운현궁의 성쇠는 불가분의 관계였기에 운현궁의 역사적 보존 가치는
대원군이 한국 근대사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맥을 같이합니다.
고종의 잠저였던 운현궁은 대원군이 집권하기 전까지는 왕족으로서의
권위를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보잘것없었습니다.
그러나 고종 즉위 후 10년 동안 대원군의 위세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의
운현궁은 그 위용이 자못 왕궁과도 같았습니다.
운현궁의 대표적 건물인 노락당, 노안당의 사대문이 웅장하고 화려하여
그 모습이 엄숙한 분위기였다고 합니다.
수직사 전경
노안당 전경
조선시대 말기는 혼란스럽고 위태로웠는데 적통이 끊겨 멀리서 왕가의 친척을
데려다 국새를 맡기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럴수록 임금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고, 권문세가가 정국을 좌지우지했는데 19세기 중엽에
즉위한 철종은 강화도의 촌부였고, 고종은 쇠락한 왕가의 자제였습니다.
서울 운현궁(雲峴宮)은 고종이 평범한 소년 시절에 살던 잠저(潛邸)이자 그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생활했던 가옥으로 흥선대원군은 이곳에서 아들을 주상으로 만들고, 스스로 그에 버금가는
권세를 누렸습니다.
사실 대원군은 신왕의 친아버지를 가리키는 칭호로 조선시대에 대원군으로 추존된 인물은
모두 네 명이었는데, 그중 살아서 대원군이 된 사람은 이하응뿐이었습니다.
그는 본래 인조의 직계 후손이었으나, 아버지가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신 군의 양자가
되면서 영조의 고손이 됐습니다.
1820년에 태어나 10대에 부모를 여읜 뒤 24세에 흥선군으로 책봉됐습니다.
그러나 이때는 외척의 세력이 워낙 강해 왕손이라는 지위가 결코 달갑지 않은 시기여서
자칫하면 역모를 꾸몄다는 죄목으로 생을 마감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이하응은 흥선군이 된 뒤에 '상갓집 개'처럼 살았는데 김동인이 쓴 장편소설 '운현궁의 봄'에는
그가 굴욕을 감내하는 과정이 자세히 묘사돼 있습니다.
행색은 "해어진 도포, 떨어진 갓, 어느 모로 뜯어보든지 표랑객" 같았고, 생활은 "주린 배를 움켜쥐고
투전판이며 술집을 찾아서 시정의 무뢰한들과 어깨를 겨루고 배회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는 모멸과 수치에 대해 무신경해질 정도로 바닥에 떨어진 삶을 영위했는데
목숨을 부지하고 가족을 지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철종이 왕좌에 올랐을 때 왕실의 최고 어른은 순조의 비인 순원왕후였습니다.
안동 김 씨인 순원왕후는 손자인 헌종과 철종을 대신해 수렴청정을 했는데 당연히
안동 김 씨는 세도가로서 막후에서 막강한 힘을 휘둘렀습니다.
철종 8년에 순원왕후가 세상을 뜨자 대왕대비의 존호는 헌종의 어머니인 신정왕후에게
넘어가게 되었고 풍양 조 씨인 그는 안동 김 씨 천하를 뒤엎고자 했습니다.
흥선군은 신정왕후에게 접근해 후사가 없는 철종이 붕어하면 둘째 아들을
왕으로 지명해 달라고 설득했습니다.
철종과 항렬이 같은 자신보다는 나이가 어린 아들인 명복이 후계자가
되는 것이 자연스러웠기 때문입니다.
.
1863년 12월 철종이 대를 이을 자식을 두지 못한 채 눈을 감았는데 흥선군이 고대하던 순간으로
마침내 신정왕후는 흥선군의 아들을 새로운 왕으로 책봉한다는 교서를 내렸습니다.
명복이 상감 자리에 오르면서 흥선군은 흥선대원군으로, 흥선군 사택은
운현궁으로 명칭이 바뀌었습니다.
흥선군의 입장에서는 "오랫동안 쓸쓸하기 짝이 없던 운형궁에도 드디어 봄이 찾아온 것"으로
보잘것없던 그의 사저 역시 "정치의 중심지이자 이 나라의 중심지"로 부상했습니다.
노안당 전경
노안당은 지붕도 눈길을 잡아끄는데 처마 앞쪽에 햇볕과
비를 막는 차양이 달려 있습니다.
차양은 나무 막대기 위에 판재를 깔고 함석을 덮은 형태로,
강릉 선교장의 열화당처럼 두드러지지는 않습니다.
노안당은 편액을 정면에서 바라봤을 때 오른쪽에는 누마루,
왼쪽에는 행각이 있습니다.
'영화루'(迎和樓)로 불리는 누마루는 대원군이 손님맞이를 위해 사용했던 장소이고,
행각은 대원군의 시중을 드는 사람들이 머물던 곳입니다.
노안당 편액
정면 6칸, 측면 3칸인 노안당에서 먼저 눈여겨볼 곳은 편액으로. 대원군의 먼 친척이자
스승이었던 추사 김정희의 글자를 집자해 만들었는데, 필치가 부드럽고 독특합니다.
노안'이라는 당호는 '노인을 편안하게 한다'(老子安之)는 논어 구절에서 유래했는데
물론 노인은 고종의 친부인 흥선대원군을 뜻합니다.
노안당은 대원군이 평상시 거처하는 사랑채였으며,
그가 1898년 임종한 곳이기도 합니다.
흥선대원군은 12세에 군주가 된 고종을 대신해 정치에 깊숙이 관여했는데
신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했지만, 오히려 대원군의 목소리가 컸다고 합니다.
그는 노안당에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다양한 정책을 논의했는데 붕당의 진원지로
지목된 서원을 철폐하고, 양반에게도 과세하도록 지시했습니다.
그의 개혁 정치는 논란을 일으켰지만, 대놓고 반대하는 세력은 없었지만
흥선대원군의 치세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1872년 고종이 친정을 선언하면서 차츰 정계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었는데 솟을대문의
자물쇠가 지금은 안쪽에 있지만 바깥쪽에 있었던 이유도 대원군의 움직임을 막기 위한
조치였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노안당 영화루 내부 전경
노안당 후면 전경
노안당 동면의 협문
협문에서 바라다본 노안당의 북면 전경
노안당의 후면
노안당의 후면
노안당 서행각
노락당의 동면 전경
운현궁의 우물
노락당
노락당 전경
운현궁에서 중심이 되는 건물은 노락당으로 노안당과 함께 세워진
노락당은 정면 10칸, 측면 3칸으로 광대합니다.
운현궁 건물 중 유일하게 기둥머리에 날개 모양의 장식인 공포를 달아
멋스러움을 표현했고, 지붕도 겹처마로 처리했습니다.
노락당은 집안의 중요한 의식을 치르는 공간으로 고종과 명성황후가
혼례를 올린 곳도 노락당이었습니다.
1866년 두 사람의 가례가 거행됐고, 모든 준비는 노락당에서 이뤄졌습니다.
노락당 남행각
노락당 전경과 후면의 양관(현재 덕성여대 부속 건물)
노락당 전경
노락당 편액
노락당 내부 전경
오동나무 뒤주
노락당 후면 전경으로 좌측 건물은 노락당 북행각
노락당의 협문
이로당 전경
노락당 북쪽에 있는 이로당은 고종의 혼인이 끝나고 3년이 지난 1869년에 지어졌는데
늘어나는 살림을 감당하지 못해 안채를 따로 만든 것입니다.
이로당 전경
이로당 편액
'두 노인을 위한 건물'을 의미하는 이로당은 금남의 구역으로 안살림의 최고
책임자였던 부대부인과 여성들이 기거했습니다.
정면 7칸, 측면 7칸으로 크기는 노안당과 비슷하며, 세부적인 장식도 흡사합니다.
노락당과 행각으로 연결돼 있기는 하지만, 전반적인 구조는 무척 폐쇄적으로.
입 구(口) 자 모양을 띠고 있으며, 안쪽에 따로 정원이 있습니다.
밖에서는 정원에서 하는 일을 볼 수 없도록 설계됐습니다.
이로당 주변에는 소소한 볼거리가 많은데. 건물 뒤쪽으로 돌아가면 얼음을 보관하는 석빙고와
대원군이 난을 올려놓았다는 무승대(茂承臺)가 보이고 또 고종이 어렸을 때 즐겨 오르던
소나무가 있던 자리에 세워진 비석인 경송비(慶松碑)도 눈에 보입니다.
이로당 내부 전경
이로당 앞의 수조 형태의 석물에는 "운하 연지"라고 새겨져 있었는데 뜻 그대로 추측하건대
석조 연못 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연유는 운현궁의 연못이란 의미로 생각이 들었기 때문으로
정확한지에 데하여서는?
이로당과 동행각 전경
이로당의 북쪽 후면 전경
이로당의 동쪽 후면 전경
경송비 전경(원래의 자리에서 이전되어 보관된 것)
정이품 대부송 모형
이로당 동행각 협문에서 바라다본 이로당 뜰
이로당 동행각 협문에서
함께한 옛 직장 동료와
이로당의 후면 전경으로 이 건물은 ㅁ자 형태인지라 내부는 관람 불가
정원에서 바라다 본 노락당
이로당과 동행각 전경
이로당은 안채의 부속적인 성격의 건물인지라 제법 정원도 아름답고 운치가 있게
건물을 지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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