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어머니가 된 일곱 후궁의 신주를 모신 사당 칠궁(2022.1.6)

2022. 1. 8. 09:55나의 이야기

 

청와대 사랑채 건너편의 무궁화동산 공원에 있는 칠궁 안내 부스

 

칠궁을 문화재 해설사와 함께 돌아보는 시간은 약 50여분 정도가 소요되며 이곳을 관람하시려면

청와대 사랑채가 있는 무궁화동산 칠궁 안내 부스로 가셔서 신분증 지참 신청을 하시면

무료로 관람을 하실 수가 있습니다.

 

일요일과 월요일은 휴무이며 1일 7회로 나누어 1회(50인) 관람을 하실 수가 있는데

현재는 코로나의 영향으로 기다림 없이 관람이 가능합니다.

 

칠궁 부스에서 나눠준 표찰을 목에 걸고 칠궁 관리자가 평상시에 막혀 있는 인도 도로를

개방해주면 도로를 건너 칠궁 입구에 가면 문화 해설사가 기다리고 있더군요. 

 

저는 옛 직장 동료와 지하철을 이용 경복궁역에 하차하여 20여분을 걸어가서 3회 차인

11:20분에 단 둘이 해설사와 함께 돌아보는.....ㅎ 

 

관람 회차 시간은 09:20,10:20,11:20,13:20,14:20,15:20,16:20

 

단 이지역은 청와대 담장 바로 옆이라서 사진 촬영 시 주의가 요구됩니다. 

 

 

칠궁의 외삼문 전경

 

 

재실 정문

 

 

재실 전경

 

한성부 북부 순화방에 영조의 생모 숙빈 최 씨의 사당인

육상궁(毓祥宮)이 있었습니다.

 

연잉군은 왕위에 오르자 어머니를 위해 사당을 짓는데, 처음에는 ‘숙빈묘’,

그 후에는 ‘육상 묘’였다가 1753년에 ‘육상궁’으로 승격되었습니다.

 

이후에는 왕을 낳은 후궁 7명의 신위를 모시게 되어

‘칠궁(七宮)’으로 불렸습니다.

 

즉, 육상궁(숙빈 최 씨), 연호궁(정빈 이 씨), 저경궁(인빈 김 씨), 대빈궁(희빈 장 씨),

선희궁(영빈 이 씨), 경우궁(수빈 박 씨), 덕안궁(순빈 엄 씨)을 말합니다.

 

 

재례를 준비하는 재실 전경

 

재례를 준비하는 재실로 앞쪽 건물에는 풍월현 , 송죽재라는 현판 두 개가 한 건물에

동서로 걸려 있으며 뒤편 건물에는 삼락당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영조는 육상궁에 거동하여 예를 올린 후에 삼락당과

풍월현에서 신하를 접견했다고 합니다.

 

1772년(영조 48)에 육상궁에 예를 올리고 시보 책을 풍월현에

모셨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송죽재

 

 

풍월현

 

 

 

칠궁은 근래에 와서 붙여진 명칭으로 조선시대에 왕을 낳은

후궁들의 신주를 모신 사당입니다.

 

이곳은 원래 영조가 어머니 숙빈 이 씨를 기리기 위해 1725년 (영조 1) 애

지은 사당으로 처음에는 숙빈묘라 하였습니다.

 

이후 1744년 (영조 20)에 "상서로움을 기른다"는 의미의 육상이라는 묘호를 올렸고

1753년(영조 29)에 궁으로 승격하여 육상궁이 되었습니다. 

 

영조는 재위 기간 중 총 200여 차례나 육상궁을 방문하였다고 합니다. 

 

조선 후기 도성 안에는 육상궁 외에도 왕을 낳은 후궁의 신주를 모신 사당이 여럿 있었습니다.

 

고종과 순종 때 저경궁, 대빈궁, 연호궁, 선희궁, 경우궁의 신주를 옮겼고 1929년에

덕안궁을 옮겨와서 육상궁에는 일곱 분의 신주를 모시게 되었습니다.

 

선희궁과 경우궁, 육상궁과 연호궁에는 각각 두 분의 신주를 모시고 있어서

신주는 일곱이지만 사당 건물은 모두 다섯입니다.

 

동쪽 육상궁 권역에는 나지막한 담이 둘러싸고 서쪽 권역에는

네 개의 사당이 서로 접하여 세워져 있습니다.

 

이 두 권역 사이에 냉천정과 냉천, 자연이라는 네모난 연못과 뒤쪽의 산자락이

어울려 한국식 정원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곳은 세계문화유산인 종묘와 더불어 조선 시대 왕실에서 사당을 어떻게 짓고

운영했는지 알 수 있게 해 주는 귀중한 문화유산입니다.

 

이곳에서는 매년 10월 넷째 주 월요일에 칠궁제를 지냅니다.   

 

 

칠궁의 베치도와 해설

 

 

칠궁의 주인들

 

칠궁의 첫 번째 주인은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 씨입니다.

 

1718년(숙종 44년) 숙빈 최 씨가 죽고 나서 7년 후인 1725년에 아들 연잉군이 영조로 등극했는데

영조는 즉위년에 경복궁 북쪽에 사당을 마련하여 ‘숙빈묘(淑嬪廟)’라 하였고, 이후 ‘육상묘’,

‘육상궁’으로 이름을 올렸습니다.

고종 때에 흩어져 있는 후궁들의 사당을 정리하기 시작했는데 1870년 추존왕 원종의 생모

인빈 김 씨 · 숙종의 간택 후궁 영빈 김씨 · 정조의 간택 후궁 화빈 윤 씨의 사당은 경우궁 안의

별묘에 함께 모시고, 경종을 낳은 희빈 장 씨 · 진종(효장세자)을 낳은 정빈 이 씨 · 장조

(사도세자)를 낳은 영빈 이 씨 · 문효세자를 낳은 의빈 성씨의 사당은 육상궁 안의

별묘에 함께 모시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영빈 김 씨와 인빈 김 씨의 이봉은 취소되었습니다.

1878년에는 육상궁에 화재가 나서 고쳐지었으며, 1882년에 다시 화재로

신주가 타버려 다음 해에 육상궁을 재건했습니다.

 

1887년에는 대빈궁의 신위(희빈 장 씨)가 옛 사당 자리로 돌아갔으며 1896년 선희궁(영빈 이 씨)의

신위를 육상궁 별묘로 옮기고, 다음 해 다시 옛 선희궁으로 이전하여 육상궁 별묘에는 연호궁

(정빈 이 씨)과 의빈궁(의빈 성씨) 신위만 남게 되었습니다.

순종은 1908년에 제사 제도 개정안인 ‘향사 이정에 관한 건’을 반포했습니다.

 

이때 아들이 왕이 되지 못한 영빈 김 씨 · 화빈 윤 씨 · 의빈 성씨의 신위는 땅에 묻었고,

아들이 왕위에 오른 후궁들의 신위를 모신 저경궁 · 대빈궁 · 연호궁 · 선희궁 · 경우궁에

봉안한 신위는 육상궁 내로 합사(合祀)하여 육 궁(六宮)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1929년에 덕안궁을 옮겨오면서 ‘칠궁(七宮)’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칠궁의 재실을 배경으로 우측의 건물은 청와대 부속건물

 

 

재실 측면 전경

 

 

삼락당 후면

 

 

중문으로 향하는 길

 

 

재실 후면과 삼락당 후면 전경

 

 

삼락당(국립 고궁박물관 제공 사진)

 

 

하측의 네모 난 연못 자연과 수복방 전경 그리고 상부의 냉천정

 

 

삼문

 

 

삼문의 측면 전경

 

 

회랑 너머로 보이는 연호궁과 육상궁

 

 

안쪽에서 바라다본 삼문

 

 

동쪽 이안청

 

 

서쪽 이안청

 

 

 

연호궁 전경

 

연호궁은 추존 왕 진종의 어머니이며 영조의 후궁인 경빈 이 씨의 사당입니다.

 

정조는 영조의 명에 따라 효장세자의 뒤를 계승하여 왕으로 즉위하였습니다.

 

즉위 직후 효장세자를 진종으로 추종하고 1778년(정조 2) 정빈 이 씨의

사당을 북부 순화방에 세웠습니다.

 

연호궁은 1870년(고종 7)에 육상궁 안의 별묘로 옮겼는데 현재와 같이 한 건물 안에

숙빈 최 씨와 합사 된 내력은 분명하지 않습니다.  

 

 

 

연호궁 현판 후면의 육상묘 현판

 

죽어서도 시어머니를 모시는 정빈 이 씨

 

연호궁(延祜宮)은 영조의 후궁이자 추존왕 진종(효장세자)의 생모인 정빈 이 씨의

사당으로 정빈 이 씨는 영조가 연잉군 시절에 맞은 후실입니다.

 

창의궁에서 일찍 죽은 딸과 경의군(진종)과 화순옹주를 낳았습니다.

 

1721년 연잉군이 왕세제로 책봉되자 세자궁에 속한 내명부 종 5품 ‘소훈’이 되었고, 영조가

왕으로 즉위하자 ‘소원’으로 승격되었으나 남편이 왕이 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갑자기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때 경의군은 3세, 화순옹주가 2세였으니 어린 아들과 딸을 두고 눈을 감은 것으로

1725년에 경의군이 효장세자로 책봉되자 ‘정빈’으로 추증되었습니다.

영조는 사도세자가 죽자, 세손 정조를 죽은 효장세자의 아들로

입적시켜서 왕위를 이어받게 했습니다.

 

정조는 즉위 후 양부 효장세자를 ‘진종’으로 추존하고, 1778년에 진종의 생모인 정빈 이 씨의 묘를

‘수길원(綏吉園)’으로 높였으며, 경복궁 추성문 밖 서북방(한성부 북부 순화방)에 사당을 정하고

‘연호궁’이라 했습니다.

연호궁은 1870년(고종 7년)에 육상궁 별묘로 이전했으며, 이곳은

경복궁 신무문 밖 후원으로 편입되었습니다.

 

연호궁은 육상궁과 가까운 거리에 있다가 육상궁 내에

옮겨져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8 · 15 광복 후 이곳에 청와대가 들어섰는데, 연호 궁의 옛 위치는

현재의 청와대 영빈관 부근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현재 육상궁과 연호궁은 한 건물 안에 있어 영조의 생모와 영조의 후궁, 즉 시어머니와 함께 있습니다.

 

정빈 이 씨는 숙빈 최 씨 사후 3년 후에 죽었으니

죽어서도 시어머니를 모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육상묘의 현판이 안쪽에, 연호궁의 현판이 바깥쪽에 있어서 마치 연호궁 내에

육상궁이 들어간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육상궁이 아닌 육상묘라고 쓰인 현판이 무수리에서

왕의 어머니가 되기까지 파란만장한 숙빈 최 씨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는 듯 보입니다.

 

사당뿐만 아니라 고부간의 묘인 숙빈 최 씨의 소령원과 정빈 이 씨의

수길원도 가까이에 있습니다.

 

조선 왕실에서 유일하게 묘도 사당도 함께하는 고부간으로 정빈 이 씨의 아들 효장세자는

10세에 죽었고, 딸 화순옹주는 월성위 김한신과 혼인하여 월성위궁에 살다가 남편을 따라

죽었습니다.

 

 

어머니의 은혜를 온전히 보존하는 육상궁

 

영조의 어머니 최 씨는 어려서 궁궐에 들어가 궁녀 생활을 시작했는데 무수리라고도 하고

침방나인이라고도 하는데, 궁궐의 온갖 궂은일을 다 거쳤습니다.

 

최 씨는 인현왕후가 폐서인으로 강등되어 궁궐에서 쫓겨난 후 인현왕후를 위해 기도를 올리다가

이곳을 지나던 숙종의 눈에 띄어 승은을 입어 종 4품 ‘숙원’이 되었습니다.

첫째 아들 영수를 낳고 종 2품 ‘숙의’가 되었으며, 둘째 아들

연잉군을 낳고 종 1품 ‘귀인’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숙종은 최 씨가 아들을 낳을 때마다 품계를 올려주었고, 1699년에 단종 복위가

이루어진 경사로 ‘숙빈’으로 승급되었습니다.

 

숙빈 최 씨가 낮은 계급의 궁인으로 궁궐에 들어와 숙원이 되고 아들을 낳을 때마다 품계가

올라가 숙빈이 되었으니, 그 과정을 보더라도 당시 왕실에서 왕자의 출산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숙빈 최 씨는 희빈 장 씨의 권세 속에서도 숙종의 총애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들 연잉군이 왕세제가 되는 것도, 왕위에 오르는

것도 보지 못하고 죽게 됩니다.

숙빈 최 씨의 출산 전후 과정은 호산청에서 기록한 《최숙원 방 호산청 일기》를 통해 알 수 있는대

이 일기에는 ‘숙원’으로 첫째 아들을 낳았고, ‘숙의’로 둘째 아들을 낳았으며, ‘귀인’으로

셋째 아들을 낳았다고 쓰여 있습니다.

영조는 즉위한 뒤 생모의 사당을 잠저인 창의궁에 건립하기를 원했지만 대신들의 반대로 경복궁의 북쪽(한성부 북부 순화방)에 사당을 건립했습니다.

1725년 건립 당시 묘호를 ‘숙빈묘’라 했다가 1744년에 ‘육상묘(毓詳廟)’로 고쳤으며,

재위 29년째 되던 해인 1753년에 다시 ‘육상궁’으로 승격하였습니다.


그리고 ‘전자 은어 사묘(全慈恩於斯廟)’라는 현판을 직접 내렸는데

‘어머니의 은혜를 온전히 보존하는 사당’이라는 뜻입니다.

 

영조는 틈날 때마다 거둥 하여 어머님의 명복을 빌었고, 재실인

냉천정에는 자신의 어진을 걸어 봉안했습니다.

 

어진을 사당 앞 재실에 걸어두고 밤낮으로 생모를 모신다는 마음을 나타낸 것으로

이 어진을 모사한 것이 현재 남아 있는 보물 제932호 ‘영조 어진’입니다.

육상궁의 모습은 정선이 그린 〈정선필 육상 묘도(鄭敾筆毓祥廟圖)〉(보물 제873호)와

〈장안 연우(長安烟雨)〉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1739년에 그려진 〈정선필 육상 묘도〉에는 육상궁으로 승격되기 전인 숙빈 묘일 때의

모습으로, 초가집의 형태와 홍살문이 보인다고 합니다.

 

그리고 1741년 그려진 〈장안 연우〉에는 숙빈 묘가 기와집 형태로 바뀌었습니다.

 

숙빈묘는 이후 육상묘, 육상궁으로 바뀌었고 1878년과 1882년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난 화재로 다시 지어졌던 것입니다.

 

 

※ 칠 궁 내에 있는 재실 내부 사진으로 재실 내부는 공개가 안 되는 까닭에

국립 고궁박물관이 제공하는 자료 사진으로 보여드립니다.

 

 

육상궁과 연호궁의 재실 내부 사진(국립 고궁박물관 제공사진) 

 

 

 

이안청과 이안청을 사이에 두고 있는 회랑

 

 

냉천 위쪽의 원두막

 

 

냉천 전경

 

냉천정 옆에 있는 우물로 제사 때 이곳의 물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둥그런 냉천에서 흐르는 물은 수로를 따라 냉천정 앞 연못으로 흐릅니다.

 

냉천 북쪽의 석축에는 영조가 냉천과 냉천정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고자 지은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냉천 글자가 새겨진 화강암(국립 고궁박물관 제공 사진)

 

 

냉천과 원두막

 

 

육상궁 권역 전경

 

 

네모난 형상의 연못 자연

 

 

냉천정

 

이곳은 영조가 어머니의 제사를 준비하면서 휴식을 취하던 장소입니다.

 

건립기록이 자세히 전해지지는 않으나 숙빈 묘라는 명칭으로 육상궁이

처음 건립된 영조 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영조의 어진을 모신 곳이라 통 인각이라고 하였으나 순조 이후

냉천정이라고 부른 것으로 보입니다.

 

냉천정이라는 당호는 옆에 냉천이라는 우물이 있어서 붙은 것입니다.

 

서쪽 두 칸은 온돌방 동쪽 한 칸은 대청으로 되어 있습니다.  

 

 

냉천정의 측면 전경

 

 

수복방 전경

 

 

삼문

 

 

덕안궁 전경

 

덕안궁은 영친왕의 어머니이며 고종의 후궁인 순헌 귀비 엄 씨의 신주를 모신 사당입니다.

 

1897년 고종이 경운궁(현재의 덕수궁) 안에 엄 씨가 거쳐할 곳을 짓고 경선궁이라고

하였다가 1911년 엄 씨가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 덕안궁으로 개칭하였습니다.

 

1913년 태평로에 사당을 새로 지어 모셨다가 1929년에 육상궁 안으로 옮겼습니다.

 

 

덕안궁의 내부 전경(국립 고궁박물관 제공 사진)

 

 

이안청

 

 

저경궁

 

저경궁은 추존 왕인 원종의 어머니이자 선조의 후궁인 인빈 김 씨의

신주를 모신 사당입니다.

 

영조는 1743년(영조 19) 인빈 김 씨의 사당을 원종의

옛집이었던 송형반에 마련하였습니다.

 

이후 종실인 이증의 집으로 옮겨 모셨다가 1755년(영조 31)에 다시 송현방으로

옮기면서 저경궁이라 개칭하였습니다.

 

1870년(고종 7)에 순조의 어머니 수빈 박 씨의 사당인 경우궁 안 별모에

모셨다가 1908년 육상궁으로 옮겼습니다.  

 

 

저경궁 내부 전경 (국립 고궁박물관 사진)

 

 

대빈궁

 

대빈궁은 경종의 어머니이자 숙종의 후궁인 희빈 장 씨의 신주를 모신 사당입니다.

 

경종은 1722년(경종 2)에 희빈 장 씨의 사당을 교동에 경행방을 건립하였습니다.

 

1870년(고종 7)에 육상궁 안으로 옮겨졌으나 1887년(고종 24)에

원래대로 경행방으로 옮겼습니다.

 

1908년에는 다시 육상궁 안으로 옮겼습니다.

 

대빈궁 내부 전경(국립 고궁박물관 사진)

 

 

경우궁

 

경우궁은 순조의 어머니이자 정조의 후궁인 수빈 박 씨의 신주를 모신 사당입니다.

 

1824년(순조 24)에 계동의 양덕방에 사당을 세워 경우궁이라고

하였고 이듬해 신주를 모셨습니다.

 

1864년 갑신정변 때 고종이 이곳에 머물렀고 1886년에는

경우궁을 인왕동으로 옮겨지었습니다.

 

1908년 신주를 육상궁 안으로 다시 옮겨서 현재는 선희궁과 한 건물에 있습니다. 

 

 

 

선희궁

 

선희궁은 추존왕 장조(사도세자)의 어머니이자 영조의 후궁인

영빈 이 씨의 신주를 모신 사당입니다.

 

영조는 1765년(영조 41)에 순화방에 사당을 세우고 의열묘라고 하였습니다.

 

정조는 1788년(정조 12)에 묘호를 선희궁이라고 개칭하였습니다.

 

1870년(고종 7)에 육상궁 안으로 옮겨 모셨다가 1897년(고종 34)에

원래 있던 순화방으로 옮겼습니다.

 

1908년 다시 육상궁으로 옮겨서 현재는 경우궁과 같은 건물에 있습니다.

 

 

경우궁과 선희궁 내부전경(국립 고궁박물관 제공사진) 

 

※ 국립고궁박물관 제공사진으로 이 사당은 한 개의 사당으로 2개의 신주가

있어야 하는데 한 개의 신주만 올려져 있었는데 좌측에 동일한 신주가 모셔져 있는 것으로

여겨 짐을 알려드립니다.

 

 

재를 올린 후 축문을 태우는 장소 

 

 

지경궁,대빈궁,경우궁(선희궁)

 

 

삼문

 

 

오래된 향나무 고목

 

 

삼락당

 

 

재실의 아름다운 협문 창살 전경

 

 칠궁을 돌아보고 근처에서 점심을 한 후 경복궁 역으로 가서 안국역에

하차하여 4번 출구로 나가 운현궁으로 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