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장 충의공 농포 정문부를 기린 사당 진주 충의사와 가호서원(진주 두달살기 (2021.4.30)

2021. 9. 28. 15:43나의 이야기

 

가호 서원 주변 쉼터의 느티나무 고목

 

 

보호수 느티나무 (수령 400년)

 

 

 

가호 서원 담장 주변의 장승들

 

 

가호 서원 충의사 묘정비

 

 

외삼문

 

 

진주 충의사 안내판(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61호)

 

 

가호 서원 충의사 묘정비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정문부(鄭文孚)를 모시기 위해 세운 서원으로 당초 함북(咸北)에

있는 네 개의 사우에 향사하였다가, 1970년에 진주 향교 사람들의 공의와 선생 후손들의 협찬에

의해 현 위치에 사우를 건립하였습니다. 

 

 

외삼문

 

 

동재 출입문

 

 

동재와 후면의 농포 정문부 유물전시관

 

 

가호 서원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61호)

 

 

사랑채

 

 

가호 서원 소방 점검을 위한 건물 내부 내부 점검

 

독립운동가였던 정규섭 선생의 아들이자 정문부 장군의 14대 손인 정기민 씨가 소방점검을

위하여 내실의 문을 열어주는 장면으로 정기민 씨는 진주 향교 사람들의 공의를 모아 가호 서원을

설립하고, 진주시민을 위한 가을 달빛 음악회, 논어 학교. 힐링문화살롱 등 다양한 후세 교육

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사랑채 후면의 종택 

 

 

농포 정문부 선생 사적비

세상에 적은 공으로 큰 상을 받는 이도 있으되 큰 공을 세우고도 대가를 받지 못할 뿐 아니라

도리어 박해로 슬픈 최후를 마친 이가 계시니 문무겸전한 농포 정문부 선생이 바로 그 이시다.

공은 일찍 명종 20년 2월 19일에 나시어 27세에 함경북도 병마평사에 임명되어 나가 이듬해

28세에 임진란을 만났던 것이다.

 

그때 내란을 일으킨 반역자들을 소탕하는 한편 북으로 쳐들어간 억센 왜적들과도

싸워야 했고 또 틈을 타 침구 하는 오랑캐들까지 무찔렀다.

황막한 변방에 깃발을 꽂고 바람같이 달리면서 같은 때에 한 칼을 들고 삼중 전투를

감행하여 모두 대승첩을 거두었으니 어찌 그리 장하던고.

임진란이 끝나고 광해군 시대에는 숨어 살다가 인조 때 원수의 지위에 추천되기까지 하였으나

어머님을 봉양하기 위해 전주부윤으로 나갔더니 일찍 역사를 읊은 시 한 장으로 모함을 입어

옥에 갇히어 모진 고문 아래서 숨을 거두시니 인조 2년 11월 19일이었고 향년 60세 침통한

공의 죽음을 무슨 말로 위로할 것이랴.

 

숙종 때 충의의 시호를 내려 보답해 드렸었다.

일찍 9성을 쌓은 윤관과 6 신을 둔 김종서와 농포 정공이야말로 국경 수호의 3대 영웅이라

정부는 후손 세거지인 이곳에 사당을 중건하고 공을 추모하며 공의 행적을 적어 비를 세운다.

 

1980년 3월, 노산 이은상 짓고 고천 배재식 쓰다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 모형

 

북관대첩비는 임진왜란(1592~1598) 때 북평사(北評事) 정문부(鄭文孚, 1565~1624) 선생이

의병을 일으켜 함경도 길주, 백탑교 등지에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이끄는 왜병들을

격파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워진 승전비입니다.

 

그러나 정문부 선생의 업적을 모함한 무리에 의하여 혁혁한 전공은 가리어지고 

오히려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억울하게 돌아가셨습니다. 

 

그 후 선생이 돌아가신 지 43년 후에야 모든 것이 밝혀지고 선생이 돌아가신 지 85년 뒤인 

1708년에 그곳에 부임했던 함경도 북평사 최창대(崔昌大, 1669~1720)가 글을 짓고 이명필

(李明弼) 이 글을 써서 함경북도 길주군 임명(臨溟)에 고을 주민의 뜻을 모아 마침내

북관대첩비를 건립하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약 200년 후 러, 일전쟁(1804~1905)이 일어나자 이 지역에 주둔한 일본군 이케다

마 사스케(池田正介) 소장이 이 비석을 읽어보고 자기네 조상들의 패전 기록을 알게 되자

이 비석을 뽑아 일본으로 보내버렸습니다.

 

그 후 이 비석은 일본 황실에서 보관하다 야스쿠니 신사로 옮겨졌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당시 일본 유학생이었던 조소앙(1887~1958) 선생이 기고한 글을 읽고 처음

알게 되었으며 이 비석 또한 야스쿠니 신사(靖國神社)에 있다는 것도 확인되었습니다.

 

그 후 한국 정부와 민간단체들이 수차례 비의 반환에 노력을 기울여

2005년 10월 20일에 비를 반환받게 되었습니다.

 

이 비석은 임진왜란 때 의병 활동에 관한 귀중한 역사적 자료인 동시에 남북 간의 잃어버린

역사상을 회복하고 한, 일간의 불행했던 과거를 청산하는 증거입니다.

 

일본으로부터 반환된 북관대첩비는 남북 협의에 따라 2006년 3월 1일 북한에 인도되어

원소재지인 함경북도 김책시에 복원되었으며, 이 비석은 원래의 비를 그대로 복원하여

 경복궁과 독립기념관 그리고 의정부의 송산 묘소에 이어 네 번째로 세운 복제비입니다.

 

 

 

충의사 내삼문 

 

충의 정문부(鄭文孚, 1565년 3월 20일(음력 2월 19일)~ 1624년 12월 28일(음력 11월 19일))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임진란 일등 공신 우찬성 대제학 의병장입니다.

 

본관은 해주(海州)이며, 자는 자허(子虛), 호는 농포(農圃), 시호는 충의(忠毅)로

기념비로 북관대첩비가 있습니다.

 

경성의 창렬사, 부령의 청암사, 진주의 충의사(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61호)에 모셔졌고,

후일 숙종 때 이 전투를 기념하여 함경북도 길주 북관대첩비가 세워졌습니다.

 

농포 정문부는 임진왜란 때 혁혁한 전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공을 인정받지 못하고

오히려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옥중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세상을 떠나기 전 두 아들에게 벼슬을 구하지 말고 남쪽 지방인 진주에 가서 살라고

유언하였기에 그의 후손들은 오늘도 진주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습니다.

 

이곳 가호 서원에는 정중부의 문집 《농포집(農圃集)》이 보관되어 전해지고 있습니다.

 

정문부 장군묘는 경기도 의정부시 용현동에 있는데 1977년 10월 13일

 경기도의 기념물 제37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장판각 내부 전경

 

 

농포 문집이 보관된 장판각 내부 전경 

 

 

농포 정문부의 시집 목판은 우리나라 조선 후기의 목판 연구에 귀중한

자료(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67호)이기도 합니다. 

 

후손들이 조상의 문집을 나무판에 새겨 이를 기록하고 보관하고 내려왔다는 것은 그 당시로서는

엄청난 가세를 들였어야 하는 일이었기에 이 집안의 가세 또한 그 당시로선 대단하였겠단 생각과

조상을 공경하고 추앙했던 집안의 내력을 엿보는 곳 같아 참 대단하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충의사의 내부에서 바라다본 외삼문 전경

 

 

충의사 내삼문 전경

 

 

충의사 전경

 

충의사(忠毅祠)는 충의공 정문부(鄭文孚) 장군의 뜻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입니다.

정문부는 1588년 과거 시험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갔으며 임진왜란 때는 의병장으로 추대되어

함경도를 침공한 일본군을 물리치고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데 큰 공을 세웠습니다.

정문부는 1593년의 백탑교 전투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찔러

관북지방을 수복하는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왜란 종료 후에 여러 벼슬을 거쳤으나 ‘이괄의 난’에 연루되어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가 후에

무죄로 판명되어 좌찬성(左贊成)의 직위가 내려졌습니다.

사당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단층 목조 기와집으로 유물전시관에는 의복, 교지,

환도 등 장군의 유품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경내에는 정문부 장군의 유물전시관, 갑판각, 가호 서원(佳湖書院)이 있습니다.

 

남강댐 공사로 인해 1995년 진주시 귀곡동 255번지에서 현재의 장소로 옮겨 지었는데

충의사는 1983년 7월 20일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61호로 지정되었습니다.

 


 

가호 서원의 종택 내부 전경

 

종택 내부에서 농포 정문부의 직계 후손인 정기민 씨가 베푼 호의로 차 대접을 받으며

가호 서원과 충의사에 얽힌 담소를 나누었는데 평일 주간에는 진주향교에서 일을 보기에

낮에는 이곳을 비운다고 하시더군요.

 

그리고는 시간이 허락하면 진주향교를 방문해도 좋다는 말씀과 며칠 뒤 이곳에서 열리는

논어 학교 행사에도 초청을 하셨는데 그날은 서울의 가족들이 제가 머물고 있던 진주로

오는 날이어서 논어 학교 행사에는 참여할 수가 없었는데 이 점은 저로서도 무척 아쉽게

느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