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9. 30. 11:06ㆍ나의 이야기
어머리해변 안쪽의 대파밭 전경
어머리해변과 용난굴을 돌아보고 나가던 길에 이곳으로 들어오면서 차량밖으로 보았던
이흑암리 마을 귀퉁이에 세워진 기념비에 호기심이 생겨 나가는 길에 차를 세워 기념비를
확인을 해보았더니 뜻밖에 조희룡과 관련된 유적지가 있길래 잠시 들려 봅니다.
임자도 용난굴과 어머리해변 그리고 조희룡 유배 적거지 위치 지도
신안군 임자도 이흑암리 마울 귀퉁이에 세워져 있는
조선 문인화의 영수 조희룡 기념비 전경
조희룡의 본관은 평양. 자는 치운, 호는 우봉(又峰)·석감(石)·철적(鐵笛)·호산(壺山)·
단로(丹老)·매수(梅叟). 중인 출신으로 오위장(五衛將)을 지냈습니다.
1846년(헌종 12) 헌종의 명으로 금강산을 탐승하고 시를 지어 바쳤으며,
1848년에는 궁궐 편액의 글씨를 쓰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1851년(철종 2) 김정희(金正喜) 일당으로 지목되어 임자도로 유배되었습니다.
20대에는 이학 전(李鶴田)·이재관(李在寬) 등과 교유했으며, 1847년에는 유 최진(柳最鎭)·전기(田琦) 등과 벽오사(碧梧社)를 결성하고 김정희 파의 여항 문인 서화가들과 시·서·화를 통해 교유했습니다.
김정희의 문하에서 학문과 서화를 배우고 19세기 중엽 화단에서 중추적 구실을 했습니다.
고서화와 함께 골동품을 좋아했고 중국과 우리나라 회화사에 관심이 많았으며, 청나라 화적을
직접 소장하고 비평을 하는 등 그림에 대한 인식의 폭이 넓었습니다.
화론에서는 수예(手藝)를 강조하고 재능을 중시하여 서화가에게는 학식뿐만 아니라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손의 재주, 즉 기량이 있어야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산수와 함께 사군자를 특히 잘 그렸으며, 김정희가 강조했던 간일한 남종 문인화풍에 토대를 두되
다양한 구도와 담채의 대범한 구사, 필치의 자유로운 운영, 새로운 기법을 시도하는 실험 의식,
거리낌 없는 표현력을 통해 자신의 독자적인 화풍을 이룩했습니다.
글씨는 추사체를 따랐는데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매화서 옥도 梅花書屋圖〉
(간송미술관) 등이 있습니다.
저서로는 중인 전기집인 〈호산 외사 壺山外史〉, 귀양 시의 기록인 〈해외 난 묵 海外蘭墨〉,
회고록인 〈석우 망년 록 石友忘年錄〉 등이 있습니다.
만구음관 조희룡 유배 적거지 알림 표지판
조희룡은 추사 김정희 등이 도입한 중국 남종 문인화로부터 이념 미를 배제한 조선적 감각을 가미한 화풍의 세계를 연 인물로, 조선 후기 예송논쟁에 휘말려 1851년 임자도로 유배되었습니다.
신분에 대해 개방적이었던 추사 김정희의 제자는 여러 갈래였는데 흥선대원군을
비롯한 사대부도 많았지만 중인 쪽에 특별히 많았습니다.
이상적 같은 역관 제자는 중국을 여러 차례 오가면서 새로운 문물을 전해 주었으며,
조희룡 같은 화가는 그의 글씨를 그대로 배워 웬만한 호사가들도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글씨를 잘 썼습니다.
조희룡은 중인 시인들의 모임인 직하 시사(稷下詩社)와 벽오사(碧梧社)의 동인이었으며,
중인 42명의 전기를 지어 중인 문화를 정리 ·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조선 후기의 중인 문화는 그를 통해서 중간 결산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흑암리 마을 담벼락에 그려진 매화도
그림이면 그림, 글씨면 글씨, 문장이면 문장, 조희룡(趙熙龍, 1789~1866)이야말로
조선 후기 르네상스적인 인물 가운데 대표적인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수많은 그림을 그렸지만, 정작 자신의 모습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둥근 머리와 모난 얼굴, 가로 찢어진 눈에 성긴 수염을 한 6척 장신이었다고 하는데 역시 문화의
다방면에서 활약했던 역관 오세창은 서화가 사전인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에서 그의 모습을
마치 학이 가을 구름을 타고 훨훨 날아가듯이 길을 걸어 다녔다고 묘사했는데, 신선이라기보다는
병자 같았던 듯합니다.
조희룡은 수많은 호를 사용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수도인(壽道人)으로
그는 ‘수도인’이라는 호를 짓게 된 사연을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나가 어렸을 때에는 키만 훌쩍 크고 야위어, 옷을 걸치기에도 힘겨울 만큼 약했다.
그래서 내 스스로 수상(壽相)이 아닌 줄 알았으니, 다른 사람들이야 말해 무엇하랴.
14세 때에 어떤 집안과 혼담이 있었는데, 그 집에서는 내가 반드시
일찍 죽을 것이라고 하여 퇴짜를 놓고 다른 집안과 혼인하였다.
그런 지 몇 년이 안 되어 그 여인은 과부가 되었다.
내가 이제 70여 세가 된 데다 아들 · 딸에 손자 · 증손자까지 많이 있으니,
지금부터는 노인이라고 큰 소리를 칠 만하다.
그래서 스스로 수도인(壽道人)이라고 호를 지었다."
일찍 죽을 것이라 여겨져 혼담까지 깨졌지만 칠십을 넘겨 장수했기에, “장수할 상이 아닌데
늙은 나이 되었고, 매화를 사랑하여 백발 되었다.”라고 그림에 썼습니다.
매화의 맑은 향과 기운을 그리다 보니 몸까지 깨끗해져 장수했다는 뜻이지요.
조희룡은 19세기 대표적 여항 시사인 벽오사(碧梧社)의 중심인물로 활동하였고
58세에는 헌종의 명을 받아 금강산의 명승지를 그리기도 했습니다.
유배 중에도 자신의 거처에 예서체(隷書體)로 쓴 ‘화구 암(畵鷗盦)’이라는 편액을 걸고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여 기량이 더욱 완숙해졌습니다.
그는 시·글씨·그림에 모두 뛰어난 재주를 보였는데, 글씨는 추사체(秋史體)를 본받았고,
그림은 난초와 매화를 특히 많이 그렸습니다.
난초 역시 김정희의 묵란화(墨蘭畫)의 정신을 본받아 그렸습니다.
『석우 망년 록(石友忘年錄)』이라는 자서전적인 저술과 그 당시의 미천한 계층 출신의 인물 중
학문·문장·서화·의술·점술에 뛰어난 사람들의 행적을 기록한 일종의 열전적인 저술인
『호산 외사(壺山外史)』를 남겼습니다.
특히 여기에 수록된 일곱 명의 화가(김홍도·최북·임희지 등)들에 대한 비교적 상세한
인물 묘사와 그들 상호 간의 교우 관계의 기록은 조선 후기의 회화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입니다.
유작 중 가장 많은 수가 매화 그림인데 이와 같은 자신의 매화 벽(梅花癖)을 『석우 망년 록』에
상세히 적었는데 자신이 그린 매화 병풍을 방 안에 둘러치고 매화를 읊은 시가 새겨져 있는
벼루와 매화서 옥장 연(梅花書屋藏烟)이라는 먹을 사용했으며, 매화시 백영(梅花詩百詠)을
지어 큰 소리로 읊다가 목이 마르면 매화 편차(梅花片茶)를 달여 먹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기 거처를 매화백영루(梅花百詠樓)라고 이름 짓고
자신의 호를 매수(梅叟)라고 하였습니다.
현재 간송미술관 소장의 「매화서 옥도(梅花書屋圖)」는 이와 같은 그의 생활
주변의 모습을 표현한 듯한 재미있는 그림이라고 합니다.
매화그림 중 그의 새로운 구도적 특징을 잘 나타내는 것은 길고 좁은
축화(軸畫: 두루마리 그림) 형식의 그림이라고 합니다.
그 대표적인 예로 「홍매 대련(紅梅對聯)」을 들 수 있는데 굵은 노수간(老樹幹: 늙은 나무의 줄기)이
힘찬 용의 꿈틀거림과 같이 두세 번 크게 굴곡지면서 화폭의 높이를 가득 채웁니다.
그리고 그중 몇 군데로부터 꽃을 가득히 피운 가느다란 가지들이 사방으로
힘차게 뻗어 나가 주간(主幹)과 서로 대조와 조화를 이룹니다.
비백 법(飛白法: 서예에서 굵은 필획을 그을 때 운필(運筆)의 속도와 먹의 분량에 따라서 그 획의
일부가 먹으로 채워지지 않은 채 불규칙한 형태의 흰 부분을 드러나게 하는 필법)을 사용한
수간에는 역시 대조되는 윤묵(潤墨)의 짙은 점을 찍어 요소요소를 강조하였으며 매화꽃은
몰골법(沒骨法: 그림을 그릴 때 윤곽을 그리지 않는 화법)으로 그렸습니다.
그의 백매화(白梅花)는 율동적인 경쾌한 붓놀림으로 꽃잎 하나하나의 윤곽선을
그리고 예리한 선으로 꽃술을 장식하였습니다.
이들 그림에는 항상 추사체 글씨의 화제(畫題)를 곁들여
문인화다운 운치를 더욱 북돋았습니다.
그의 묵매화는 사임당 신 씨(師任堂申氏) 이래의 조선 중기 묵매도의 구도에서
탈피하여 후기 묵매화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습니다.
김정희는 조희룡의 난초 그림이 서법에 의한 문인화답지 않게 아직도 화법만을
중시하는 태도를 면하지 못하였다고 낮게 평가하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묵란화들을 보면 절제 있고 힘찬 필선으로
된 우수한 작품들이 많습니다.
조희룡 유배지 표지판
전라남도 신안군 임자면 이흑암리에 있는 복원된 조희룡 유배지 전경
(2009년 12월 16일 신안군의 향토유적 제4호로 지정)
우물
만구음관 앞에 조성된 조희룡의 대표 작품들 전경
중인 조희룡은 사대부 김정희에게서 글씨뿐 아니라 문인적인 삶의 자세를 배웠는데 김정희는
난을 좋아했는데, 조희룡은 매화를 좋아해서 “좋은 종이와 먹이 있으면 가장 먼저 매화가
생각났다.”라고 할 만큼 매화를 많이 그렸습니다.
8폭 병풍 가운데 1폭인 「홍매도(紅梅圖)」는 뒤틀린 가지가 비스듬하게 뻗어 내리며
붉은 꽃이 만발한 고매(古梅)를 그린 것이지요.
가지는 수묵 농담(濃淡)으로 처리하고 담홍색 꽃송이를 넉넉하게 그려,
8폭을 다 펼치면 부귀익수(富貴益壽)라는 제화 그대로 장관이라고 합니다.
그림 오른쪽에 “종 모양의 옛 벼루에 시험하다(試古鐘硏)”라고 쓰여 있는데, 좋은 종이나
먹뿐만 아니라 기이한 벼루만 보여도 그 벼루에 시험 삼아 매화를 그려 보고 싶었던 것이지요.
조희룡은 중국을 드나들며 옹방강 등의 당대 최고 서화가들과 교유했던 추사를 통해
서화 문물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으며, 『석우 망년 록(石友忘年錄)』이란 책에 스승의
가르침을 많이 기록했다고 합니다.
그는 추사가 북청으로 유배 갈 때에 연루되어 임자도에 3년간 유배 생활을 했을
정도로 추사를 가장 가까이서 모셨던 그림 제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직업적인 화가는 그림 그리는 솜씨만 익혔는데, 조희룡이 박학다식한 서화관으로 체계를
이룬 것은 추사 같은 학자를 스승으로 모신 덕분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추사는 그의 난 치는 법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하지 않았는데 심지어 아들 상우에게
편지를 보내 난 치는 법을 가르치면서, 조희룡같이 하지 말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당대 최고의 학자였던 추사 수준에서 볼 때 문자향과 서권기가 그림 솜씨에 비해
떨어진다는 뜻이지, 조희룡의 그림 자체가 못하다는 뜻은 아니라고 합니다.
실제로 산수나 매화는 조희룡의 그림이 추사보다 더 나은데 이는 자기의 글씨를
너무 똑같이 배운 조희룡에 대한 경고인 동시에 매너리즘에 빠져 있던 중인 화단에
대한 경고라고 볼 수 있습니다.
추사의 글씨 제자 8명과 그림 제자 8명이 1839년 6월과 7월에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써서
추사에게 품평을 받았는데 추사의 품평은 글씨를 제출했던 전기(田琦)가 기록해 두었다가
『예림 갑을 록(藝林甲乙錄)』이라는 책으로 만들었습니다.
화루(畵壘)에 출전했던 화가 8명의 작품으로 만든 병풍을 호암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는데,
그 화제를 모두 조희룡이 썼습니다.
이것으로 보아 추사 제자들 사이에서 조희룡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조희룡의 글씨는 추사 글씨를 빼박은 듯해 구별하기 힘드나, 추사 글씨보다
부드러워 금석기가 덜 느껴진다는 평입니다.
조희룡은 자신을 직업적인 화가와 구별하였는데 사대부가 수양의 여기(餘技)로
그림을 그렸던 것처럼, 그도 문인 화가로 자처했습니다.
그는 「해외난묵(海外讕墨)」이란 글에서 “(직업적인) 화가의 사생 법(寫生法)은 우리 (위항시인)
무리가 할 바 아니다. 매 · 난 · 석 · 죽과 같은 그림은 오로지 그 뜻을 옮기는 데 있고, 유희로써
이루어진다.”라고 말하며 자기의 그림은 있는 그대로 베껴내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하였습니다.
한 포기 난을 치는 것은 단순해서 그림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은 사대부도 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8폭 병풍의 「홍매도」는 문인화를 넘어섰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餘技)가 아니라, 일삼아 그려야 했기 때문으로 그런 의미에서 조희룡은 전문적인 화가입니다.
그는 직업적인 화가가 되기를 거부했지만, 중인들은 그에게 많은 그림을 부탁하였는데
중인이면서도 사대부의 문인 취향을 즐겼던 위항시인들이 직업적인 화가보다 사대부의
문인 취향을 몸에 익힌 조희룡에게 그림을 많이 부탁한 것이지요.
복원된 조희룡 유배 적거지 만구음관 전경
만구음관이란 1만 마리의 갈매기들이 우짖는 집’이란 뜻으로 이곳의 현재 위치는 간척으로 인하여
임자면 이흑암리로 변경되어 있지만 원래는 임자도에 맞대어 있던 작은 목섬이었다고 합니다.
그런 까닭에 조선 후기 유배 당시에는 이곳 유배 적거지 바로 앞이
바다였던 까닭에 이런 표현을 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조희룡 적거지 앞 양파밭 울타리에 샛노랗게 익은 유자
이 유자는 양파밭에서 일하시던 부부의 부군이 낫으로 직접 잘라서 제게 주신것 입니다.
유자 열매가 무척 탐스럽다고 하였더니 오래 전에는 가치가 있었지만
이젠 상품 가치도 없는 유자라고 하시면서 .....
아직도 이렇게 시골 인심은 말만 이쁘게 하시면 ㅎ
조희룡 적거지앞의 양파밭에서 일하시는 부부 전경
이흑암리 대파밭 가운데에 자리를 잡은 마을 정미소 전경
이제는 이런 독특한 모양의 옛 정미소 건물도 보기가 어렵다 보니
사진 소재로는 아주 좋다는 생각에 몃 컷 앵글에 담아 올려봅니다.
정겨운 이런 옛 건물들이 낡고 퇴락해져 사라져 가야만
한다는 사실이 아쉽게만 느껴집니다.
때론 이런 건물들도 문화유산으로 보존하여 우리 후손들이 선대의 유산들을
볼 수 있도록 해야 되리란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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