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9. 7. 22:01ㆍ나의 이야기
진주 향교 홍살문 전경과 좌측의 충효교육원
진주향교는 한때 교관 1명에 30명을 가르쳤으나 과거제도가 폐지되면서 교육적 기능이
사라지고 제사만을 담당하다가 충효교육원을 만들어 훌륭한 인재를 배출한 향교 본연의
임무를 위해 유치원생부터 일반인까지 모두 배울 수 있는 유교 문화와 인성교육,
전통예절 등의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진주향교 안내판
진주에서 두 달 살기를 하면서 제가 머물던 이반성면 정수예술촌 근처에 충의사와 가호 서원이 있어서 그곳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그곳에서 충의공 정문부 장군의 후손인 정기민 가호 서원 논어 학교 교장선생님과 짧은 시간이지만 인연을 맺은 적이 있었습니다.
오늘 진주 시내로 민물낚시용품을 사러 나왔다가 점포 앞이 진주향교인 탓에 이곳 진주향교의 충효교육원에서 사무국장으로 낮에 겸무를 하신다고 하셨길래 찾아가 뵙고 그의 안내를 받아 진주 향교를 돌아봅니다.
진주 향교 외삼문인 풍화루 전경
진주향교(晋州鄕校)는 경상남도 진주시에 있는 조선 전기에 중건된 향교.
교육시설로 경상남도 시도 유형문화재 제50호로 지정되었습니다.
고려 말 조선 초 경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창건되었습니다.
1398년(태조 7)에 중건하였으며, 1558년(명종 13) 목사 김홍(金泓)이 대성전·동무(東廡)·
서무(西廡)를 중수하고 명륜당·동재(東齋)·서재(西齋)·풍화루(風化樓)를 신축하였습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03년(선조 36) 병사(兵使) 이수일(李守一)이 대성전을 중건하였고,
1644년(인조 22) 병사 김태허(金太虛)가 명륜당, 동·서재를 중건하였습니다.
1811년(순조 11)과 1907년에 중수하였고 1979년 동·서재를 중건하였으며,
1984년에 명륜당과 1985년에 풍화루를 각각 중수하였습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6칸의 대성전, 각 5칸의 동무와 서무, 내삼문(內三門), 7칸의 명륜당,
각 5칸의 동재와 서재, 풍화루, 그 밖에 부속건물 등이 있습니다.
대성전에는 5성(五聖), 송조 2현(宋朝二賢), 우리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관 1명이 정원 30명의 교생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奉行)하며 초하루·보름에 분향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서원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소장 전적은 대부분 산실 되었고
《진주향교 유계안 晉州鄕校儒稧案》 등 몇 권의 책만이 남아 있습니다.
하계방학 때는 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충효교육을 실시하고 있으며, 현재 향교의 운영은
전교(典校) 1명과 장의(掌議) 수명이 담당하고 있습니다.
진주시의 조선시대 교육기관으로 진주향교를 비롯해 남악 서원·운강 서원·
임천 서원·옥산서원·광제 서원·대각 서원 등이 있었습니다.
향교의 정문인 삼문 가운데는 영혼이 드나들고
사람은 양쪽 문으로만 출입을 하여야 합니다.
오른쪽은 동문 그리고 왼쪽은 서문이고 문루 이름은 백성들 풍속을
교화한다는 의미를 지닌 풍화루입니다.
사교당
진주향교는 전학 후 묘의 전형적인 배치이긴 하나 다른 향교와 다른 세 가지 특징이 보였는데
첫째는 우측의 명륜당과 좌측의 사교당이 나란히 배치되어 있어 마치 강당이 두 개인 것 같은
효과를 준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외삼문과 내삼문 앞에 한 쌍의 석사자상이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향교와 석사자상과의
연관 관계는 보기 어려운 조합으로 한 때 이곳은 사찰 자리였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셋째는 깎아지른 듯한 급경사지에 향교를 설치하였다는 것으로 이 때문에 강학 공간과 제향 공간이
같은 공간에 있기는 하지만 수십여 개의 석 계단으로 구분되어 있어서 기능적으로 정말 구분된
인상을 준다는 것입니다.
서재
동재
명륜당 전경
향교는 유교의 옛 성현을 받들고, 지역 사회의 인재 양성과 미풍양속을
장려할 목적으로 설립된 지방의 교육기관입니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소성왕 원년(799년)에 청주 거로현(지금의 진주)을 국학 학생들의
교육을 위한 녹읍으로 삼았다고 하는데, 학교가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고려 성종(成宗) 6년(987년)에 향학당(鄕學堂)을 짓고 중앙에서
교수를 파견한 것이 향교의 시초였습니다.
조선 태조 7년(1398년)에 공자를 모시는 문묘를 창건하고 성균관에서 교수를 파견하여
그때까지 이어져 오던 관학의 지위를 계승하였다고 전하여집니다.
《신 증 동국여지승람》에 수록된 하연의 사 교당기(四敎堂記)에는 고려 진주 강 씨 은렬공파의
파시조인 강민첨이, 조선 초에는 하륜(河崙), 정이오(鄭以吾), 하경복(河敬復) 등이
진주향교에서 수학하였다고 적고 있습니다.
돌계단을 올라가 내삼문을 열고 들어가면 제례 공간에 들어서게 됩니다.
정면의 대성전은 공자와 선현의 위패를 모시는 곳이고 제례는
양측의 동무와 서무에서 담당하고 있습니다.
향교는 외삼문을 지났을 때는 교육, 내삼문을 지났을 때는 제례 공간으로
구분되는데 이게 일반적인 향교의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각 건물 배치 방법을 전학 후 묘라고 부릅니다.
다른 향교와 달리 진주향교는 워낙 가파른 야산의 지형을 이용하여 향교가
건축되었기에 무척 장엄하게 느껴집니다.
진주향교 내삼문 전경
향교의 역할은 크게 교육과 제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으며, 유생이 학문을 연마하는 명륜당과
일상생활을 하는 기숙사 역할을 하던 동, 서재에서는 교육 기능을 담당하고, 공자와 저명한
유학자를 모시는 대성전 및 동·서무는 제례 기능을 각각 담당하고 있습니다.
진주 향교는 교육공간을 앞쪽으로 배치하고, 제례 공간을 뒤쪽으로 배치하는 전학 후 묘의
전형적인 양식을 따르고 있습니다.
중수 과정에서 많은 변형이 일어났는데, 특징적인 것은 교육 공간이 명륜당 이외에도 사교당을
배치함으로써 두 개의 명륜당이 중앙의 통로에 의해 좌우로 배치된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대성전의 영역이 너무 넓고 지대가 높아서 아래의 명륜당 영역이 왜소하게 보일 정도이며,
대성전의 외삼문 역시 너무 들어와 있어서 동·서무 사이를 가로막고 있습니다.
내삼문에서 내려다본 진주향교의 명륜당과 부속건물(교육공간)
동무
서무
대성전 전경
대성전 내부 전경
대성전 내부의 다양한 단청
진주향교의 단청과 건축양식은 사찰의 내부 전경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진주향교 내삼문 전경으로 이 구간부터는 제례 공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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