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담이 아름다운 산청 남사예담촌(진주 두달살기 2021.5.5)

2021. 8. 19. 13:14나의 이야기

 

산청 남사 예담촌의 안내 지도

 

산청 남사예담촌은 고즈넉한 담장 너머 우리 전통 한옥의 아름다움을 엿볼 수 있어

표면적으로는 옛 담 마을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내면적으로는 담장 너머

그 옛날 선비들의 기상과 예절을 닮아가자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리산 초입에 자리 잡은 남사예담촌은 안동 하회마을과 더불어

경상도의 대표적인 전통한옥마을입니다.

 

경남하면 산청 남사 마을이라고 할 정도로 옛날부터 그 명성이 자자했던

이 마을은 양반마을로 또한 전통한옥마을로 유명합니다.

 

전통가옥이 하루가 다르게 사라져 가는 요즘 평범하게 살아가면서 전통가옥을 보존하고,

일부러 찾는 사람들을 따뜻하게 맞아주는 지리산 초입의 이 작은 마을이 유난히 정감 있고

고풍스럽게 느껴지는 이유는 해묵은 담장 너머 엿볼 수 있는 우리 조상들의 정서와 삶의

모습을 아직까지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농촌전통 테마마을로 지정된 "남사 예담촌" 은 고즈넉한 담장 너머 우리 전통 한옥의 아름다움을

엿볼 수 있어 표면적으로는 옛 담 마을 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내면적으로는 담장 너머

그 옛날 선비들의 기상과 예절을 닮아가자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옥은 수천 년의 우리 역사 속에서, 우리 민족의 정체성에 뿌리를 두고,

그 시대의 삶의 양식을 반영하며 변화해 왔습니다.

 

한 민족의 문화가 전통을 바탕으로 하여 현재를 딛고 미래로 이어지는 것이라면,

그 변화는 언제나 현재 진행형이어야 할 것입니다.

 

농촌 전통테마 마을 남사 예담촌은 변화하는 현재속에서 옛 것을

소중히 여기고 지켜나가는 배움의 휴식터 입니다.

 

칠불사와 삼청궁 그리고 하동공원을 거쳐 방문한 남사 예담촌 전경으로 오늘은 저와 같이

정수예술촌에 공동으로 거주하는 은퇴자마을 입주 일행들과 함께한 여행이다 보니 일정이

조금은 자유롭지 못한 까닭에 시간 제약상 이곳 남사 예담촌의 일부분만 돌아볼 수

밖에는 없었는데 이런 탓에 예담촌 전체를 돌아볼 수가 없었다 보니 조금은 아쉬움이

많이 남는 곳이기도 하였습니다.

 

여러 사람들과 함께하는 여행은 함께하는 사람들만의 개성이 있는지라 제가 돌아보고 싶은

이런 분야를 좋아하는지도 의문이다 보니 가급적 지루하지 않게 빠른 시간 내에 돌아본다는

부담감이 있다 보니.....ㅜㅜ

 

 

남사마을 옛 담장 표시도

 

 

남사예담촌의 옛 담장들은 등록문화재 제281호

 

 

18~20세기 전통 한옥 40여 호에 85채의 전통 한옥이 있는 남사마을은 남부 지방 양반 가옥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어 마을 전체가 살아 있는 한국 전통 역사박물관이라고 평가되기도 합니다.

 

경북의 대표적인 한옥 마을이 하회마을이라면 경남에는

남사마을이 있다고 할 정도랍니다.

 

남사 예담촌이 특이한 것은 이곳이 다른 마을처럼 특정 성씨의 집성촌이 아니라는 점으로

많은 성씨가 수백 년간 마을 전통을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여러 양반 가문의 반가를 유지할 수

있는 경제력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으로 결속력이 남다른 씨족 마을이 근본인 조선 시대에

많은 성씨가 한 마을을 이루면서 함께 동고동락할 수 있었던 이유는 마을 자체에

특이한 내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을에는 지정 문화재도 많이 있는데 우선 남사 옛 마을 담장이 등록 문화재 제281호로 지정되어

마을 전체의 명성을 높여주고 최 씨 고가(문화재 자료 제117호), 이 씨 고가(문화재 자료 제118호),

면우 곽종석 유적(문화재 자료 제196호), 이사재(문화재 자료 제328호), 사양정사(문화재 자료

제453호), 배산 서원(문화재 자료 제51호) 등도 등록되어 있습니다.

 

 

남사마을은 마을 북쪽의 실개천을 경계로 상사마을과 인접해 있는데 과거에는 행정 구역상

개울을 경계로 남사는 진주, 상사는 단성에 속했는데 한때는 마을이 합쳐져 사월 마을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산청군으로 통합되면서 남사마을과 상사마을로 분리되었지만 두 마을을

사월 또는 남사라고 함께 지칭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동제를 지낼 때는 두 마을 사람들이 함께 참여하기도 하지만 이곳에서 다루는

전통 마을은 엄밀하게 남사마을을 뜻한답니다.

 

한국의 근·현대사를 되돌아볼 때 남사마을이 현재 같은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놀라운 일로 흙 돌담과 돌담이 공존하는 아름다움이 과거로부터 이어져

내려왔기 때문입니다.

 

담은 마을 사람들의 위계에 따라 달라지는데 반가 집은 말을 타고 가도 보이지 않을

2미터 정도의 높은 담장을 만들었고, 서민들이 거주하는 민가는 돌담을 주로 사용했습니다.

 

총길이는 5.7킬로미터에 이르는데, 이 중 3.2킬로미터가

대한민국 등록 문화재 281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예담촌'이라는 이름도 '옛 담 마을'이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반가 건축물 주위에 있는 토담은 길이 50~60센티미터 정도의 큰 막돌을 2~3층 메쌓기 한 뒤

위에 황토를 편 다음 막돌을 일정한 간격으로 벌리고 사이에 황토를 채워 넣어 만들었습니다.

 

상부는 전통 한식 기와 또는 평기와를 사용했는데 재료는 남사천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강돌을 사용했습니다.

 

사양정사와 최 씨고가 골목 등은 누구나 걸어보고 싶은 골목길로 추천됩니다.

 

남사마을의 기본은 지리산으로 지리산은 '어리석은 사람(愚者)이 머물면 지혜로운

사람(智者)으로 변한다'라고 해서 '지리산(智異山)'이라 불린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지리산 국립공원은 1967년 우리나라 최초의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국내 국립공원 중 최대 규모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남한에서 두 번째로 높은 봉우리인 천왕봉(1,915.4미터)의 위세에 알맞게 주변에 화엄사 같은

대사찰을 비롯한 수많은 문화재를 보유해 한국 남부의 문화권을 실질적으로 관할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런 명산인 지리산 천왕봉에서 흘러나온 봉우리 니구산을 배경으로 한 마을이 과거에

여사촌으로 불린 남사마을로 풍수적으로 해석할 때 니구산이 암룡의 머리이고 당산이

숫룡의 머리로 서로 머리와 꼬리를 무는 쌍룡 교구 형상을 하고 있으며, 아래를 휘감아

흐르는 사수천이 조화를 이루면서 넓은 들과 울창한 숲이 주위를 둘러친 천혜의

입지에 있습니다.

 

남사마을의 특이한 점은 마을 생김새가 반달 모양이므로 '달이 차면 기운다'는

말처럼 반월을 메우면 안 된다고 믿어 중심부에 집을 들이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마을로 들어가는 길에 있는 주차장이 중앙 부분입니다.

 

남사마을에서는 남다른 멋이 느껴지는데 마을의 간판스타라고

볼 수 있는 세 가지 고목 때문입니다.

 

우선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감나무는 수령이 약 600년이나 됩니다.

 

전형적인 반시(납작 감)로 산청 곶감의 원종이기도

하며 현재에도 감이 열린다고 합니다.

 

하 씨고가 안에 있는데 세종 때 영의정을

지낸 하연이 7세 때 심었다고 합니다.

 

 

사효제의 향나무(수령 520년)

 

 

사효제 전경

 

 

사효제 전경

 

 사효재는 이제의 8대손인 이윤헌의 효행을 기리기 위한 것으로 1687년 마을에

천연두가 만연하자 이윤헌은 부모를 모시고 산촌으로 피해 갔는데 산적이 부친에게

칼을 들이대자 부친을 보호하려고 막아서다가 온몸에 칼을 맞고 팔이 절단되었다고

합니다.

 

그로 인해 8년 뒤 사망하자 정부에서 정려를 건립하고 실행 록을

종가에 소장하도록 했다. 고 합니다. 

 

 

이곳 이 씨가에는 이제 개국공신 교서가 보관되어 있는데

국보 제324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남사마을에서 일가를 이루었던 성주 이씨 가문에는 대대로 전해 내려온

는 보물 제1294호이자 가보가 있습니다.

 

조선 개국 때 태조가 공을 세운 정무공 이제에게 내린 「이제 개국공신 교서」로 이제는 이성계의

셋째 딸 경순 공주의 남편이자 정몽주 격살에 참여한 개국 일등공신으로 책록, 흥안군에

봉해졌으며 의흥 친군위 절제사가 되었습니다.

 

이제의 아버지 이조년(1269~1343)은 한국인이라면 거의 외우고 있는

「다정가」의 작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데

일지 춘심을 자규야 알라만은 

다정도 병인양 잠 못 들어 하노라" 

 

 

삼연문

 

 

영모재

 

 

영모재의 편액

 

 

이제 개국공신 교서비

 

 

부부 회화나무를 배경으로

 

 

이상택 고가 입구에 있는 회화나무

 

회화나무는 우리 조상이 최고의 길상 목으로 꼽은 나무이며

연원은 중국의 주나라 때부터라고 합니다.

 

주나라 때 '삼괴 구극'이라 해 조정에 회화나무 세 그루를 심고 그 아래에서

서로 마주 보고 앉아 정사를 돌보았다고 합니다.

 

한국도 이를 따라 삼정승에 해당하는 삼공이 회화나무를 마주 보며 앉았고,

좌우에 각각 아홉 그루의 가시나무를 심어 조정의 대신들이 앉기도 했습니다.

 

이와 같이 회화나무를 우대한 이유는 회화나무에는 귀신이 접근하지 못하고

좋은 기운이 모여든다고 알려졌기 때문입니다.

 

조선에서는 회화나무를 매우 신성하게 여겨 아무 곳에나

함부로 심지 못하게 했습니다.

 

즉 선비의 집이나 서원, 궁궐에만 심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특별히 공이 많은 학자나 관리에게 왕이 상으로 내리기도 했습니다.

 

특히 집안에 급제자가 생기거나 벼슬을 하면 집 주위에 회화나무를 심었습니다.

 

따라서 회화나무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과거 급제자가 많았고 벼슬아치들이

많이 살았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이상택 고가 대문을 들어서면 바로 사랑 마당이며 또 한 그루의 거대한 회화나무가

방문객을 반기는데 마을에서 가장 키가 크며 수령이 약 450년이라 삼신할머니라고

불리기도 하는 나무입니다.

 

몸통에 난 배꼽 모양 구멍과 뿌리 위로 돋아난 돌기가

음양의 상징처럼 부각되어 보인답니다.

 

그래서인지 많은 사람이 배꼽에 손을 넣고 소원을 빈다고 하는데 대문은 북쪽을

향해 조금 낮게 만들었는데, 왕이 있는 방향으로 머리를 숙여서 충성심을 다지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 씨 고가 사랑채 전경

 

사랑 마당의 북쪽으로 정면 4칸, 측면 2칸 반의 팔작지붕

사랑채가 동남향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계자 난간 모양의 사랑채는 안채와 앞뒤로 나란한 병렬 배치되어 있습니다. 

 

 

안채

 

 

익랑채

 

 

안채에 걸린 편액

 

 

곳간채 전경

 

사당은 곳간채 뒤쪽이지만 안채 왼쪽 전면에 있으며 시각적으로 막혀 있는

특이한 배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익랑채 전경

 

익랑채는 초가지붕으로 정면 4칸, 측면 1칸 반 크기에 동향이며 남쪽에 부엌과 방, 대청 등을

배치하고 앞면에는 개방된 툇마루를 만들었습니다.

 

같은 ㅁ자형 집인데도 중부 지방과는 달리 남부 지역은 덥고 습하므로 공기의 흐름을 원활히

하기 위해 건물 사이에 공간을 두어 독채로 지은 것이 특징입니다.

 

명당 중의 명당에 위치한 탓인지 6·25 전쟁 당시 미군의 폭격으로 마을이

불바다가 되었을 때도 이 씨 고가는 멀쩡했다고 합니다.

 

 

안채의 대청

 

 

안채 전경

 

안채는 전형적인 남부 일자형 구조로 정면 6칸, 측면 3칸 규모의 집으로 앞뒤로 툇마루가 있고,

건넌방 툇마루를 대청보다 20센티미터가량 올리고 밑에 아궁이를 설치했습니다.

 

일반적인 사대부 주택에서는 부엌이 사당 방향과 반대편에 있지만 이 집에서는

부엌이 사당과 같은 동쪽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안채는 전형적인 한옥인 반면 사랑채는 과장된 규모와 장식이 눈에 띄는데 20세기

초반에 건설되어 다소 위세 감을 보이려고 의도했기 때문입니다.

 

사랑채와 안채가 건설된 연대가 거의 200여 년가량 차이 나므로 세월에 따른

한옥의 구조적, 조형적 차이를 비교해볼 수 있습니다.

 

 

사당

 

곳간채 뒤에 사당이 있는데 맞배지붕이며 붉은 옻칠을 한 4개의 위패(아버지, 조부,

증조부, 고조부)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나란히 모셨습니다.

 

 

이 씨 고가 회화나무 (수령 45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