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7. 21. 02:11ㆍ나의 이야기
※ 무진정은 두 번을 방문하였는데 한 번은 비가 오던 날이었고,
한 번은 맑은 날이어서 사진을 두 종류로 올려드립니다.
비가 오던 날의 사진은 갤럭시 노트2 0 울트라로 찍었던 사진이고
맑은 날의 사진은 소니 7RM3로 직은 사진임을 알려드립니다.
이수정 연못 언덕위에 세워진 무진정
함안 무진정(咸安 無盡亭)은 경상남도 함안군 함안면에 있는 정자로 1976년 12월 20일
경상남도의 유형문화재 제158호 무진정으로 지정되었다가, 2018년 12월 20일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습니다.
이수정 연못의 전경
함안낙화놀이에 대한 안내
조선 중엽부터 시작되어 매년 4월 초파일에 무진정에서 열리는 함안 낙화놀이는
우리나라 무형문화재 가운데 불놀이 문화로는 최초로 문화재로 지정된 행사입니다.
참나무 숯가루를 한지에 싸서 댕기머리처럼 엮은 것을 '낙화봉' 이라고 하는데,
이것을 줄에 매달아 저녁 무렵 불을 붙이면 숯가루가 꽃가루처럼 무진정
연못 위로 흩날리는 불꽃놀이입니다.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 33호)
홍예교 전경
부자 쌍절각(조삼 선생님의 증손 조준남의 효와 조준남의 아들 조계선의 충을 기리는 정려각)
무진정 연못의 거목 옆에서
연못가의 2층 카페 전경
괴산재의 출입문 돈화문(화목함이 두텁다는 의미)
괴산재 (함안 조 씨 재실로 조려의 손자 조삼을 향사함 )
함안군의 동헌인 금학헌(琴鶴軒)의 목재가 팔리자 집의 공파에서 매입한 후 1899년
수평 이동해 지은 것으로 전면 5칸 측면 2칸으로 짜임새가 매우 아름답고 고졸한
홑처마 단층 맞배 목조 건물입니다.
무진정 전경
무진정은 풍류를 즐기기 위해 언덕 위에 지어진 정자로 조선 명종 22년(1567)에
무진 조삼 선생의 덕을 추모하기 위해 그의 후손들이 세우고, 조상의 호를 따서
무진정이라고 하였습니다.
무진은 조선 성종 14년(1483) 진사시에 합격하고 중종 2년(1507) 문과에 급제하여
함양·창원·대구·성주·상주의 목사를 지냈고, 사헌부 집의 겸 춘추관 편수관을 지냈습니다.
앞면 3칸·옆면 2칸의 건물로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 자 모양과 비슷한 팔작지붕구조로
앞면의 가운데 칸에는 온돌방이 아닌 마루방으로 꾸며져 있고, 정자 바닥은
모두 바닥에서 띄워 올린 누마루 형식입니다.
기둥 위에 아무런 장식이나 조각물이 없어 전체적으로 단순하고 소박한 건물로
조선 전기의 정자 형식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앞뒤의 퇴를 길게 빼고 중앙 한 칸을 온돌방으로 꾸며놓은 건물에 ‘無盡亭’이라고
쓴 편액과 정기(亭記)는 주세붕(周世鵬)의 글씨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경남 유형문화재 제158호 지정연도 : 1976년 12월 20일 시대 : 조선시대 종류 : 누(정) 각
중앙 한 칸의 마루방
무진정의 이름은 조삼 선생의 호를 따서 지은 것으로
"다함이 없다"란 의미입니다.
비가 내리는 무진정 누각에서
무진정의 편액들
먼저 올린 채미정과 서산서원에서 함안 조 씨의 대부격인 조려의 이야기를 올린 적이 있었는데
할아버지인 조려는 단종을 폐위하고 세조가 등극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해서 은둔 생활을 하였지만
손자인 조삼은 증종때에 이르러 벼슬길에 나갔는데 어떻게 보면 참 모순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려는 세조를 왕으로 모실 수 없다고 불사이군을 주장하여 생육신으로 추앙을 받았는데
어떻게 그 손자는 세조의 후손인 증종때에 어떻게 벼슬길에 나갈 생각을 할 수가 있었는지.....
3대가 지나가게 되면 대의명분도 다 부질이 없다는 이야기 밖에는......ㅎ
무진정의 출입문인 동정문
동정 문의 의미는 "학생은 언제나 격물해야 한다"란 뜻으로 "사물의 이치를
끝까지 파고들어 궁극에 도달함이란 뜻입니다.
이수정 연못의 거목 위에서
영 송루(맞이하고 보내는 뜻을 지닌 누각)
영 송루 편액
무진정에서 500여 m 떨어진 곳에 있는 대산리 석조 삼존상 전경
대산리 석조 삼존상(보물 제71호)
왼쪽 보살상 151㎝, 오른쪽 보살상 162㎝, 좌상 86㎝. 대사골로 불리는 마을 앞 절터에 있는데,
두 보살상은 손 모양만 다를 뿐, 같은 조각 수법을 보여줍니다.
어느 불상의 양 협시보살상(脇侍菩薩像)이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왼쪽 보살상은 머리에 두건과 같이 생긴 보관을 쓰고 있는데 길쭉한 얼굴에 가는 눈, 길고
납작한 코, 작고 두꺼운 입술 등이 평판적으로 조각되어 불성(佛性)이 둔화된 경직된
모습을 보여줍니다.
귀는 옆에 바짝 달라붙었으며, 목에는 5줄의 선이 형식적으로 표현되었고 신체는 굴곡이나
양감이 별로 표현되지 않은 딱딱한 모습을 보이며 다소 위축되었습니다.
왼손을 아래로 내려 정병(淨甁)을 잡았고 오른손은 배 부근에 대었습니다.
착의 법(着衣法)은 보살상의 형식으로는 독특한 것인데, 마치 불의(佛衣)를 입는 형식처럼
천의(天衣)를 가슴에서 Y자형으로 여미고 허리에 띠를 묶었습니다.
양쪽 다리 위에는 동심 타원형(同心楕圓形)의 주름을 표현하였고 가슴과 팔에는
음각선(陰刻線)으로 평행한 옷 주름을 나타냈습니다.
왼쪽 어깨에는 옷자락을 묶은 매듭이 보입니다.
대좌는 상대와 하대로 이루어졌으며 원형의 상대(上臺)에는 단판 연화문(單瓣蓮花文:
홑잎의 연꽃잎 무늬)이 3단으로 표현되었고, 하대에는 연판이 긴 복판 중엽 연화문
(複瓣重葉蓮花文)이 돌려져 있습니다.
그 아래에는 각 면에 안상(眼象)이 새겨진 8각의 안상석이 놓여 있습니다.
오른쪽 보살상은 왼쪽 보살상과 세부 모습에서 약간 차이가
날 뿐, 표현 수법은 거의 같습니다.
왼쪽 보살상보다 어깨가 좀 더 넓어 강직한 느낌을 주며 왼손은 배에,
오른손은 가슴에 대어 손바닥이 보이게 하였습니다.
두 보살상 사이 약간 뒤에 놓인 불좌상은 머리 부분과
광배, 신체 일부가 파손되었습니다.
조각 수법은 보살상들과 마찬가지로 신체의 굴곡이 표현되지 않은 평판적인 것으로
가슴에는 우견 편단(右肩偏袒)의 법의가 대담하고 간략하게 선각(線刻)되었습니다.
두 손은 결가부좌한 다리 위에서 아미타 상품인(阿彌陀上品印)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불상 중 상품인의 불상은 매우 희귀한 것으로 중요한 예에 속합니다.
하체는 결가부좌한 상부만 남아 있으며 발이 두드러지게 조금 표현되었을 뿐이고
광배는 많이 파손되어 전체 형태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凸자형으로 두광·신광과 덩굴무늬를 조각한 것이 남아 있습니다.
양감이 결여된 평판적이며 직립한 신체의 모습이라든지 두 다리에 표현된 좌우대칭적인
동심 타원형 옷 주름, 가슴과 팔에 표현된 도식적인 옷 주름 등의 특징은 고려에 이르러 형식화된
불상 양식을 잘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미뤄 이 불상들의 조성 연대는 고려 초기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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