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7. 21. 21:00ㆍ나의 이야기
자미단
비가 오는 날 옛 직장 동료와 무진정을 돌아보고 다음 코스로 찾은 고려동 유적지 전경으로
이곳 역시 내리는 비는 어쩔 도리가 없는지라 우산을 쓰고 돌아봅니다.
종택으로 향하는 도로에서 바라다본 효산정의 측면 전경
고려인 이오가 거처하던 종택 전경
함안 고려동 유적지(咸安 高麗洞 遺蹟址)는 경상남도 함안군 산인면 모곡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유적지로 1982년 8월 2일 경상남도의 기념물 제56호 고려동유적지로
지정되었다가, 2018년 12월 20일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습니다.
고려 후기 성균관 진사 이오(李午) 선생이 고려가 망하고 조선왕조가 들어서자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키기로 결심하고 이곳에 거처를 정한 이후 대대로 그 후손들이 살아온 장소입니다.
이오는 이곳에 담장을 쌓고 고려 유민의 거주지임을 뜻하는 ‘고려 동학(高麗洞壑)’이라는
비석을 세워 논과 밭을 일구어 자급자족을 하였습니다.
그는 아들에게도 조선왕조에 벼슬하지 말 것과 자기가 죽은 뒤라도 자신의 신주를
이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옮기지 말도록 유언하였습니다.
그의 유언을 받든 후손들은 19대 600여 년에 이르는 동안 이곳을 떠나지 않았고,
이에 고려동이라는 이름으로 오늘까지 이어 오고 있습니다.
현재 마을 안에는 고려동학비, 고려동 담장, 고려 종택,자미단,
고려 전답 3,000여 평, 자미정, 율간정, 복정이 있습니다.
후손들이 선조의 유산을 소중히 가꾸면서 벼슬길에 나아가기보다는 자녀의 교육에
전념함으로써 학덕과 절의로 이름 있는 인물들이 많이 배출되었습니다.
사당 전경
사당은 안채 뒤에 있으며 담장을 둘러 영역을 구분하였습니다.
이오 선생이 유훈으로 내 신주를 고려동을 떠나 다른 곳으로 옮기지 말라고
했기 때문에 자손이 대대로 고려동을 지키는 계기가 됐습니다.
또 선생은 아들에게 너도 고려의 유민이니 신왕조에서 벼슬을 하지 말라고 했으나 손자에 대하여
물으니 손자는 신왕조에서 태어났으니 벼슬을 해도 좋다고 허락한 일화가 전해져 옵니다.
복정
복정은 안채 서쪽에 있는 우물
고려 종택 안채
많은 건물들이 6.25 전쟁 때 피폭돼 주춧돌에 따라 복원했는데 안채는 정면 6칸, 측면 2칸으로
처음부터 큰 규모였음을 알 수 있고 부엌이 동쪽에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너른 텃밭
계모당 전경
계모당은 사랑채 격으로 안채 앞에 있으며 하인이 거주하고 광이 있는 행랑채가
대문과 떨어져 안채와 자미정 사이에 있습니다.
율간정
율간은 고려동 들판을 지나는 하천으로 이오 선생의 손자인 이중현이
그 이름을 따서 정자를 짓고 거주했습니다.
자는 도성이며 문장이 풍부하고 덕망과 도량이 있어 이름이 알려졌습니다.
벼슬이 병조 참지 및 홍문관 부제학에 달해도 귀한 품위를
향리에 드러내지 않았다고 합니다.
청간문의 안쪽 전경
모계 정사
자미정 담장 아래 화단에 방치된 석등
자미정 일각문 옆 화단에 방치된 석등은 제가 보아도 무척 역사가 깊어 보이는 오래된
석등 같아 보였는데 어떤 연유로 이곳 자미정 화단에 이렇게 무단 방치되고 있는 가를
문화재청에서는 조속하게 확인하실 필요가 있어 보였습니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라는 천원지방 사상을 표현한 연못
복원된 연지
자미정 전경
휴식공간인 자미정은 별채로 꾸며져 있는데 1883년에
창건하고 1878년에 중건했습니다.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경모당이란 편액이 있고
오른쪽 방은 우죽헌으로 되어 있습니다.
대문을 통하지 않고 별도로 드나들 수 있도록 되어 있으며
안채로 향하는 곳에는 일각문이 있습니다.
자미정의 주련은 이오 선생의 시 두 수를 싣고 있습니다.
자미정 주련 해설
밤마다 넓고 큰 바다에서 떠오르는 외로운 달을 맞이하네
해마다 작은 밭을 개간해 구기자를 기른다네
머리를 돌려 되돌아보아도 태평성세는 만날 수 없으니
초동 나무꾼과 동무됨을 사양치 않고 마음 달게 여기네
높은 나무는 있기만 하여도 꽃을 피울 수 있는데
이른 봄이 해저물어 가는 산그늘에 이르고 있는데
슬픈 노래 읊조리며 서로 술잔을 나누는 이 자리
서울로 가서 다시 벼슬아치 옷 입음을 부끄럽게 여기려네
자미정 현판
경모당
우죽헌
안채의 후면 사당과 장독대
장독대와 곳간채 전경
이오 종택을 돌아본 후 마을 탐방에 나서 봅니다.
화단을 무척 예쁘게 조성한 모곡마을 농가 주택 전경
덕양제
덕양제 안채
담장 밖에서 바라다본 이오 종택 전경
이오 종택은 고려 말 성균관(成均館) 진사(進士) 이오(李午)가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들어서자
고려의 유민으로 절의를 지키기로 결심하고 백일홍이 만발한 이곳을 택해 거처를 정한 뒤
그 후손들이 살아온 장소입니다.
고려가 망하자 선생은 여러 현인들과 송도의 두문동에서 망복수의(罔僕守義)의 결의를 표명하고
남쪽으로 내려와 거처를 찾던 중, 산간벽지에 띠만이 우거진 숲 속에서 백일홍이 만발한 것을 보고
그 자리에 마을의 터전을 일궜습니다.
그 자리는 오늘날 자미단(紫微壇)으로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이오는 끝까지 고려의 유민임을 나타내기 위해 은거지 주변에 담을 쌓아 밖은 조선의 영토라
할지라도 안은 고려 유민의 거주임을 명시하는 ‘고려 동학(高麗洞壑)’이라는 표비를 세웠습니다.
여기에서 ‘담안’ 또는 ‘장내’라는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이오 종택 모계정사 앞의 출입문 청 간문
호산정의 출입문인 효의 문( 미개방)
현재 이 마을에는 재령 이 씨 후손 30여호가 모여 살면서
선조의 뜻을 기리고 있습니다.
마을 안에는 고려동학표비, 고려동 담장, 고려 종택,자미단, 고려 전 3,000여 평,
자미정, 율간정, 복정 등이 있었으나, 이들 건물은 한국전쟁 동안에 대부분 소실되었으나,
이후 복원되었습니다.
호상 공의 생가로 알려진 주택만이 제 모습을 지키고 있으나,
그마저 200여 년 전의 것이라고 합니다.
고려 진사 모은 이선생 경모비
절개의 백비
이오 선생의 묘소는 가야읍 협곡리 인산재 뒷산에 있는데 그곳에는 이오의
유언에 따른 묘비로 백비를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선생은 유언으로 "나라 잃은 백성의 묘비에 무슨 말을 쓰겠는가 내가 죽으면 할 수 없이
담장밖에 장사할 것인즉 조선의 땅에 묘비를 세울 경우 내 이름은 물론이고 글자 하나
새기지 마라"라고 해 묘비를 백비로 세웠다고 합니다.
높이 95cm, 너비 40cm, 두께 15cm 통돌로 만들어졌으며 연꽃무늬로 갓을
장식하였는데 전체적으로는 검소하고 크기가 작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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