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정원 문화를 간직한 무기연당(진주 두달 살기 2021.6.10)

2021. 6. 10. 22:46나의 이야기

 

무기연당이 있는 주재성의 고옥 출입문 전경(솟을삼문)

 

 

솟을삼문에는 붉은색의 정려 2개가 편액 되어 있으며 전형적인

기와의 형태를 지니고 있습니다.

 

정려란 충신 효자 열녀 등을 그 동네에서 정문을 세워

표창하는 일을 이야기합니다.

 

정려문인 정문은 국담의 충신정려와 감은재의 효자정려를 기리기 위한

충효 쌍 정려문(忠孝雙旌閭門)이라 일컫습니다. 

 

 

주 씨 고가는 경상남도 민속자료 제10호로, 무기연당은

중요 민속자료 제208호로 등록되어 있습니다.

 

대개 중요 민속자료로 살림집이나 단일 건축물이 등록되는 것이 일반적인데, 별당 정원이

등록된 곳은 영양 서석지와 무기연당밖에 없을 정도로 드문 편입니다.

 

그만큼 그 가치를 독립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셈 이입니다.

 

 

 주재성 가옥의 사랑채인 감은재 전경

 

감은재 오른쪽에 안채가 있는데 사랑채와 달리 안채는 현재에도 후손들이

거주하는 공간이다 보니 원형이 많이 훼손되는 안타까움이.....ㅜㅜ 

 

 

감은재 현판 

 

감은재는 주재성의 장남인 주도복(周道復)의 호이며 ‘부모의 은덕에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가진다.’는 뜻입니다.

 

 

감은재 편액

 

 

무기연당의 출입문인 한서문 전경

 

 

한서문 현판

 

 

한서문을 열고 들어가자 바라다 보이는 무기연당이라는 사각형의 작은

조선시대 후기의 아름다운 정원이 펼쳐집니다.

 

사각형의 연못은 하늘과 땅을 상징하는 장방향과 원의 조화, 네모진 연못 가운데 만들어진

인공 석산은 그렇게 화려하진 않지만 단아하고 소박하였지만 무척 아름다웠습니다.

 

 

무기연당은 주재성의 생가에 있는 조선 후기의 연못으로 주재성은 조선 영조 4년(1728)

이인좌의 난 때 의병을 일으켜 관군과 함께 난을 진압한 인물입니다.

 

관군들은 돌아가는 길에 그의 덕을 칭송하여 마을 입구에 '창의 사적비(倡義事蹟碑)'를

세우고 서당 앞 넓은 마당에 연못을 만들었습니다.

 

연못 가운데에는 섬을 만들고 산의 모양을 본떠 놓았습니다.

 

이후 주재성은 연못의 이름을 '국담(菊潭)'이라 하고 호를 삼았으며, 연못가의

서당에서 학문에 전념하며 유유자적하였다고 합니다.

 

연못의 서북쪽에는 오래된 정침 한 채가 남아 있으나, 많은 부분을

고쳐서 그 가치를 잃고 말았습니다.

 

연못가에는 후대에 풍욕루(風浴樓)와 하환정(何換亭)을 지었고,

최근에 충효사(忠孝祠)를 지었습니다.

 

연못 주위에는 담장을 쌓고 일각문을 내어 한서문이라고 하였습니다.

 

비교적 원래의 형태를 잘 간직하고 있는 조선 후기의 연못으로, 조선 시대 후기

정원문화(庭園文化) 연구에 좋은 자료이기도 한 이곳은 1984년 12월 24일

중요 민속자료 제208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주재성의 존영

 

 

촛불이 켜진 충효사 내부 전경

 

오늘이 음력으로 초하루 라선 지 주재성 씨 종부님께서

조상님들께 재를 올리고 있었습니다.

 

 

무기연당 중요 민속문화재 제208호

 

연당을 이름하여 국담(菊潭)이라 이르고 석가산(石假山)을 쌓은

당주를 양심대(養心臺)라 하였습니다.

 

또, 담장을 쌓고 일각문을 내니 그 문을 영 귀문(詠歸門)이라 하였습니다.

 

고마움을 보답하려는 병사들의 정성이었습니다.

 

이 후로 주재성은 국담이라 자호(自號)하고 서당에서 학구에

전념하면서 유유자적하였다고 합니다.

 

연당은 주재성의 생가 일곽에 조성되어서 고래의 정침(正寢) 한 채가

연당 서북쪽에 지금까지 남아 있습니다.

 

一자형 평면이고 칸반 통(間半通)의 전퇴(前退) 있는 홑집인데, 정면이 5칸입니다.

 

지붕은 맞배이며 기와를 얹었는데 사는 사람들이 편리하게 많은 부분을

개수하여 학술적 가치를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방형(方形)에 가까운 국담의 연당은 산석(山石)으로 호안(護岸)을 쌓되 이 급(二級)으로 하여

석축의 높이를 완화시켰고 중앙에 당주 하나를 모았는데, 산석을 써서 봉래산(蓬萊山)을

형상하는 석가산을 쌓았습니다.

 

연당의 연못가에 하환정(何換亭)과 풍욕루(風浴摟)를 세웠고

충효사(忠孝祠)를 건립하였습니다.

 

하환정은 동쪽가에 있는데, 정면 2칸, 측면 2칸의 규모이고

연당 쪽으로 난간을 설치하였습니다.

 

마루가 고설되지 않은 것이어서 그저 사기(四起)하였을 정도입니다.

 

홑처마의 팔작기와지붕을 지녔습니다.

 

풍욕루는 댓돌을 높이 쌓고 앞 뒤퇴가 있는 3칸을 구조하였습니다.

 

역시 홑처마의 팔작지붕인데 이들은 후대에 세운 건물들입니다.

 

이 연당은 비교적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는 조선 후기 연못의 실례로서,

정원문화 연구에 좋은 자료입니다.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함안 일대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공을 세운 의병장 주재성(周宰成)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한 것입니다.

 

그는 초모한 의병은 물론이려니와 관군에게도 사재로 넉넉히 음식을

제공하고 공급하니 칭송이 자자하였습니다.

 

이인좌의 난이 평정되자 관군들은 원대 복귀하는 길에 주 씨(周氏) 향리에 모여 마을 어귀에

창의 사적비를 세우고 서당 앞 넓은 마당에 연당을 파고 당주(塘洲)를 만들었습니다.

 

연당을 이름하여 국담(菊潭)이라 이르고 석가산(石假山)을

쌓은 당주를 양심대(養心臺)라 하였습니다.

 

또, 담장을 쌓고 일각문을 내니 그 문을 영 귀문(詠歸門)이라 하였습니다.

 

고마움을 보답하려는 병사들의 정성이었습니다.

 

이 후로 주재성은 국담이라 자호(自號)하고 서당에서

학구에 전념하면서 유유자적하였습니다.

 

연당은 주재성의 생가 일곽에 조성되어서 고래의 정침(正寢) 한 채가

연당 서북쪽에 지금까지 남아 있습니다.

 

一자형 평면이고 칸반 통(間半通)의 전퇴(前退) 있는 홑집인데, 정면이 5칸으로

지붕은 맞배이며 기와를 얹었는데 사는 사람들이 편리하게 많은 부분을 개수하여

학술적 가치를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방형(方形)에 가까운 국담의 연당은 산석(山石)으로 호안(護岸)을 쌓되 이 급(二級)으로 하여

석축의 높이를 완화시켰고 중앙에 당주 하나를 모았는데, 산석을 써서 봉래산(蓬萊山)을

형상하는 석가산을 쌓았습니다.

 

연당의 연못가에 하환정(何換亭)과 풍욕루(風浴摟)를 세웠고

충효사(忠孝祠)를 건립하였습니다.

 

하환정은 동쪽가에 있는데, 정면 2칸, 측면 2칸의 규모이고

연당 쪽으로 난간을 설치하였습니다.

 

마루가 고설되지 않은 것이어서 그저 사기(四起)하였을 정도입니다.

 

홑처마의 팔작 기와지붕입니다.

 

이 연당은 비교적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는 조선 후기 연못의 실례로서,

정원문화 연구에 좋은 자료입니다.

 

 

 

무기연당의 구조와 형태 

 

연당은 직사각형으로 그 한가운데 당주(當洲)가 있는데 봉래산(蓬萊山)을

연상시키는 가산(假山)이라고 합니다.

 

주위에는 호안(護岸)을 쌓고 북쪽에 하환정(何換亭)·풍욕루(風浴樓)를 지었습니다.

 

 

 

연당 서쪽에는 영귀문(詠歸門)이라는 일각문이 있고 서쪽에는 1745년에

건립된 충효사(忠孝祠)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연당 주위의 담 서쪽은 1700년대에 지어진 함안 무기리 주 씨 고가

(경남 민속자료 10)로서 감은재(感恩齋)·영정각(影幀閣) 등이 있습니다.

 

감은재는 국담의 장남인 주도복(周道復)의 서실로서 국담 문집 책판

(菊潭文集冊板:경남 유형문화재 242)이 보관되어 있고, 그 대청 북쪽 벽이

영정을 모셨던 영정각입니다.

 

 

 

 조선 후기의 연못, 함안 무기연당

 

 

무기마을의 '무기'는 '무우기수(舞雩沂水)'의 줄임말로 공자가 살던

노나라 도성 남쪽에 기우제를 지내던 곳이라고 합니다.

〈논어〉 '선진' 편에 나오는 말로 공자가 네 제자에게 장래에 무엇을 하고 싶은지를 물었을 때

오직 증점만이 늦봄에 봄옷이 이루어지면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에서 바람 쐬고,

노래하면서 돌아오겠습니다"라고 했다는 구절에서 유래했습니다.

 

 

풍욕루 전경

 

풍욕루는 댓돌을 높이 쌓고 앞 뒤퇴가 있는 3칸을 구조하였으며 역시 홑처마의

팔작지붕인데 이들은 후대에 세운 건물들입니다. 

 

 

 

풍욕루는 댓돌을 높이 쌓고 앞뒤퇴가 있는 3칸 규모이며

역시 홑처마의 기와로 된 팔작지붕입니다.

 

 

풍욕루 현판

 

 

풍욕루에 걸린 편액들

 

 

하환정의 측면 전경

 

 

무기연당(국담) 중앙에 자리 잡은 석가산 

 

양심대 아래 바위에는 백세청풍(百世淸風)을 새겼는데 오랫동안 부는 맑은 바람은

영원토록 변치 않는 맑고 높은 선비가 지닌 절개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선비의 철학을

다짐한 것입니다.

 

 

 

 

 

하환정은 정면 2칸, 측면 2칸 규모이고 연당 쪽으로 난간을 설치하였습니다.

 

마루는 고설(高設說) 하지 않고 그저 사기(四起)한 정도이고

홑처마의 기와로 된 팔작지붕입니다.

 

이 건물들은 1984년에 정화 보수하였습니다.

 

 

하환정 현판

 

 

화환정에 걸린 편액들

 

 

화환정에서 내려다본 무기연당(국담)과 건너편의 충효사

 

 

무기연당은 작은 규모이나 답답하지 않고 고요하되 심심하지 않은 매력을 지닌

조선시대 후기의 전통 정원의 아름다운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소박하면서도 절제되어 자연과 소통하고자 하였던 선비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건축물 같아 보였습니다.

 

하환정 누각에 앉아 무기연당을 바라다보니 제가 마치 조선시대의

선비가 되어 버린 듯 한 느낌이 듭니다.

 

 

풍욕루 전경

 

 

하환정과 풍욕루 전경

 

 

무기연당(국담)을 빛내고 있는 250여 년 된 멋들어진 소나무

 

 

무기연당 모서리에 심어져 있는 오래된 향나무 

 

 

국담을 내려갈 수 있도록 만든 모서리 돌계단 

 

 

​탁영석 전경

 

무기연당(국담)은 ​전남 담양 소쇄원과 더불어 전통 정원 가운데

 으뜸으로 꼽힐 만큼 경관이 빼어납니다.

 

국담은 의로운 인물로 이인좌가 일으킨 반란을 백성을 모아 막았으며

재산을 털어 군량미까지 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벼슬길에 나아가지는 않고 이 곳 무기연당에서 유유자적하며 주재성만의

이상(理想)을 꿈꿨는데 연못과 마당을 잇는 돌계단 아래 놓인 작은 돌 탁영석(濯纓石)처럼

 "물이 더러우면 발을 씻고 깨끗하면 갓끈을 씻겠다"라는 뜻으로 여생을 보냈다고 합니다.

 

고고했던 조선시대 참 선비의 진면목을 이 곳 무기연당에서 느낄 수가 있다 보니

오늘 이 곳을 찾았던 저에게 있어서도 좋은 여행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도 한 가지 궁금증이 있었는데 250여 년 된 소나무 아래의 탁영석 부근이

무기연당(국담)의 인입 수원 같아 보였는데 정확한지에 대하여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