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인처럼 살았던 정온의 은둔처 우곡정(진주 두달살기 2021.5.3)

2021. 6. 8. 16:41나의 이야기

 

절의문

 

 

우정 감고 비문

 

 

효열각

 

효자 통정대부 예조참의 진양 정규노 지려


고종 32년 열 부 증 숙부인 성산이 씨 지려 라 비문에 새겨져 있습니다.

 

 

금실 향촌가 비

 

 

節義門(절의문) 좌측 옆 우곡 선생 신도비

 

고려 대사헌 우곡 정선생 신도비


거북 모양 비석 받침돌과 용을 새긴 비석 머릿돌이
비신과 더불어 자태를 뽐내고 있습니다.

 

 

절의문

 

 

우곡정(隅谷亭)은 고려 말 ‘우곡(隅谷) 정온(鄭溫)’이라는

인물이 은거하던 정자입니다.

 

진주 출신인 고려 후기 문신인 정온은 정사를 논의하고 풍속을 바로잡으며 관리의 비행을

조사하는 사헌대의 으뜸가는 관직인 사 헌대부에 이른 인물이었습니다.

 

당시는 고려왕조 말기, 조정의 상황은 고려왕조를 유지하면서 개혁하자는 쪽과 모든 것을

완전히 변화시키는 역성혁명을 도모하는 쪽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결국, 이성계와 신진사대부들이 함께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게 되었고, 정온은 태조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반대해 두문동과 청학동에 은거하다가 낙향하여 본인의 호를 따 우곡 정이라는

 정자를 짓고 은거하였습니다. 

 

 

절의문의 안쪽 전경

 

 

우곡정

 

 

진주 우곡정(晉州 隅谷亭)은 경상남도 진주시 사봉면 사곡리에 있는, 고려말 대사헌을

지냈던 우곡 정온이 태조 2년(1393)에 지은 정자입니다.

 

1983년 7월 20일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65호 우곡정으로 지정되었다가,

2018년 12월 20일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습니다.

 

 

우곡정은 고려말 대사헌을 지냈던 우곡 정온이 조선 태조의 역성혁명에 반대하여

고향으로 돌아와 조용히 지내고자 태조 2년(1393)에 지은 정자입니다.

 

그 뒤 헌종 15년(1849)에 고쳐 짓고, 1976에 다시

수리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정온은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켜 은둔생활을 하였습니다.

 

태조가 사위인 이제를 보내 모셔가려고 하자 차마 왕의 명을 거역할 수 없어, 겉보기에는

멀쩡해도 앞을 보지 못하는 장님이라는 핑계를 대고 사양하였습니다.

 

이에 사실을 확인하고자 솔잎으로 눈을 찌르니 눈동자는 움직이지 않고

선혈만 낭자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우곡정 건물은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 자 모양인 팔작지붕입니다.

 

대문 밖 앞뜰에는 낚시하던 연못을 예전의

모습대로 보존하고 있습니다.

 

 

정자 한쪽에 우곡 선생의 충절을 기려 쓴 이제의 시가 적혀 있습니다.


“松葉豈能撓確節(송엽기능요확절)솔잎이 어찌 곧은 절개를 꺾을 수 있으랴
令名千載日爭光(령명천재일쟁광)그 이름 천년토록 햇빛같이 빛나리
    

후대 사람들은 포은 정몽주의 죽음과 야은 길재의 은둔, 우곡 정온의 청맹(靑盲)을

공자가 말씀한 은나라 삼인(은유 삼인‧殷有三仁)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우곡 정자 내에 걸린 각종 편액

 

 

이성계의 사위 이제는 정온의 청맹 진위를 시험하기 위해 정자 앞에있던 푸른 소나무의 솔잎을

한 줌 뜯어 정온의 눈을 찔러보았는데 그러나 눈동자는 일체 움직이지 않고 피만 낭자한 채

스스로 시를 지어 자신의 마음을 나타냈다고 합니다.


進鳳山前戴笠人(진봉 산전 대립인) / 진봉산 아래 삿갓 쓴 사람은
人蔘花下舊王民(인 삼화 하고 왕민) / 인삼 꽃밭 옛 나라 백성이라요


托盲去後今來見(탁 맹거 후 금래 견) / 장님을 핑계하고 돌아와 이제 보니
有目無言不死身(유목 무언 불사신) / 눈은 있어도 말 못 하는 죽지 않는 몸인데

 

 

茅山齋(모산재) 솟을삼문 전경

 

 

모산제 솟을대문 하단부를 바치고 있는 돌거북과 솟을삼문을 장식한 용머리 

 

 

모산제 전경

 

 

정온은 정자 앞뜰에 못을 파고 백일홍 나무 여섯 그루를 심고, 충절을

지키며 은둔생활을 이어갔다고 합니다.

 

이후 태조 이성계는 정온을 다시 부르고자 사신을 보냈습니다.

 

두 임금을 섬길 수도, 왕명도 거슬릴 수 없었던 정온은 자신이 눈은 뜨고 있지만 앞을

보지 못하는 청맹(靑盲)이라 관직에 나설 수 없다는 핑계를 대고 사양합니다.

 

사실을 의심했던 사신이 진짜인지 알아보기 위해 정온의 눈을 솔잎으로 찔렀는데도

눈동자는 움직이지 않았다고 전해지는데, 한 임금을 섬기고자 하는 정온의 충절을

알 수가 있는 일화입니다.

 

정온은 생전 이곳에서 낚시를 즐겼다고 하는데 낚시를 하던 곳 치고는 규모가

작다 보니 제 생각에는 세월을 낚았다는 표현이 어울릴 듯하였습니다.

 

 

우곡정 연지 앞에서 

 

 

삼두 거북이가 배치된 연지의 주변에는 무산 12봉을 표시하는 12개의 작은 암반들과 둔덕이 연지 주변에

있는 것 같아 보였는데 제대로 관리가 안되어 있는 탓인지 구분이 애매하였습니다.

 

 

고려 말 문신 정온(鄭溫)은 진주인으로 고려 말 대사헌으로 있었으나 나라가 망하자 두문동으로

들어갔다가 말년에는 이 곳에 정각을 짓고 연당(蓮塘)을 만들어 여생을 보낸 곳입니다.

 

조선 태조가 개국하여 여러 차례 초빙하였으나 청맹(靑盲 : 보기에는 멀쩡하나

실제로는 못 봄)을 핑계로 다시 출사 하지 않았습니다.

 

1393년(태조 2)에 처음 건립되었으나, 지금 건물은 1849년(헌종 15) 중수된 것으로

팔작지붕이며, 여기에 우곡 선생 유허비가 있습니다.

 

 

연지 중앙에는 삼두 거북이가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이 형상이 무엇을

나타내는지에 대한 설명은 아쉽게도 없었습니다.

 

정온 씨 후손들의 진주 정 씨 우곡 공파 종중에서는 이런 배치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한 유래는

알고 있을 것 같아서 진주시청 문화재 담당부서에 전화를 하여 관리인의 전화번호를 알아내어

통화를 시도해보았지만 당분간 전화가 불통이라는 메시지만....ㅜㅜ

 

 

기이하게 자란 소나무 한 그루가 우곡정의 은둔했던 정온을 기리는 듯한

풍경을 뒤로하고 애마로 부사정으로 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