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의 신과 곡식을 맡은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직단(2021.4.2)

2021. 4. 4. 23:56나의 이야기

 

딜쿠샤를 돌아본 후 사직공원 방향으로 내려와 사직단으로 향했습니다.

 

이 곳 사직단은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거나 직장 생활을 하면서 수 차례에 걸쳐

앞으로 지나치기만 하였기에 오늘은 작심하고  사직단을 돌아봅니다.

 

제가 생각을 해보아도 이 곳 안에 있는 어린이 도서관은 가보았어도

제대로 돌아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는 생각이....ㅎ

 

그런 탓에 사직단의 정문이 보물이었는지도 몰랐다는 사실에 자괴감이 듭니다.

 

 

사직단 정문(社稷壇 正門보물 제177호)

 

정면 3칸, 측면 2칸. 익공계 단층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로

1963년 1월 21일 보물로 지정되었습니다.

 

이 문은 사직단(사적 제121호)의 정문으로 1394년(태조 3) 사직단을 지을 때 함께 지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후에 새로 지은 것으로 여겨집니다.

 

지금 있는 자리는 1962년 서울시 도시계획에 따라 원래의

자리에서 14m 뒤쪽으로 옮긴 것입니다.

 

전체적으로 기둥 간격이 넓은데 중앙칸은 특히

좌우칸보다 간격을 더 넓게 잡았습니다.

 

기둥의 높이는 비교적 낮으며 지붕이 커서 평활한 인상을 주는데 3칸 모두

널문[板扉]을 달았으며, 옆면은 담과 연결하기 위해 벽을 쳤습니다.

 

지붕 처마를 받치는 장식 구조는 새부리 모양의 부재를 이용해

기둥 위에서 보를 받치고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소박한 기법과 튼튼한 짜임새를 갖추고 있습니다.

 

 

 

 

사직단 안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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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나라를 개창하며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왕조의

가장 중요한 두 축은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입니다.

 

사직단은 조선의 정신세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곳으로 유교문화의

경제적 기반인 농업 신들을 숭상하는 가시적 공간입니다.

 

종묘가 조선시대 역대 왕과 왕비들의 혼을 담은 궁궐이었다면 사직은 토지신과 농사 신의

혼을 담은 제궁으로 통치자와 함께 조선의 흥망성쇠를 같이 한 곳이기도 합니다.

 

 

 

 

사직단 전경

 

조선의 사직 제사는 1년에 3번, 봄·가을 납일(臘日)에 제사를 지내고,

기고(祈告) 제사도 사직에서 지냈습니다.

 

사직단에서는 중춘(仲春)·중추(仲秋)·납일(臘日:동지 뒤의 셋째 成日)이 되면

국가와 민생의 안전을 기원하는 대향사(大享祀)를 지냈으며, 정월에는 기곡제를,

가뭄 때에는 기우제를 각각 행했습니다.

 

이러한 각종의 제례와 관리를 위해 1426년(세종 8)에는 사직서(社稷署)를

담장 밖 북쪽에 설치했습니다.

 

그리하여 1908년 칙령에 의해서 폐지될 때까지 사직단에서

국가제사가 계속되었습니다.

 

주현에서 지내는 사직 제사는 봄·가을 두 번 지냈으며, 국왕 대신

그 지역의 수령이 제사를 지냈습니다.

 

사직단은 종묘와 더불어 ‘국가’ 자체를 지칭하는 대명사로

쓰일 정도로 상징적인 곳이었습니다.

 

1897년 10월 조선왕조는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원구단에서 천지제를

행한 후 황제 위(皇帝位)로 나아간 고종은 사직단의 지위도 올려 태사(太祀)·

태직(太稷)으로 고쳤습니다.

 

그러나 사직단은 대한제국이 일제에 의하여 강점됨에 따라

그 기능을 상실해버리고 말았습니다.

 

대신 일제는 사직단 일원을 공원으로 만들었는데, 그와 관련된 부속건물들을

철거했을 뿐 아니라 일부는 학교 부지와 관공서로 일부가 분할되어 현재 일부

옛 건물 들을 복원 중에있습니다.

 

 

줌으로 당겨 본 사직단 (사적 제121호. 면적은 43,587㎡) 전경

 

사직은 토지를 관장하는 사신(社神)과 곡식을 주관하는 직신(稷神)을 가리킵니다.

 

두 신을 제사 지내는 단을 만들어 모신 곳이 사직단(社稷壇)으로 조선시대

사직단을 관장하던 관청은 사직서(社稷署)였습니다.

 

국토와 오곡은 국가와 민생의 근본이므로 고대에는 국가와 민생의 안정을

기원하는 의미로 사직을 설치하고 제사를 지냈습니다.

 

따라서 사직은 왕실의 조상들을 제사 지내는 종묘와 함께 국가적 차원에서

중요시되어, 국가를 가리키는 뜻으로도 사용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사직단이 설치된 것은 삼국시대부터인 것으로

기록에서 확인되고 있습니다.

 

고려 시대에도 991년(성종 10)에 사직을 세웠는데, 1014년에

강감찬의 건의에 따라 수축되었습니다.

 

조선 왕조가 들어선 1393년(태조 2)에는 한양 천도와 관련된

종묘·사직의 지형도를 만들었습니다.

 

그 이듬해에 사직의 터를 잡았는데, 경복궁 서쪽의

인달방(仁達坊)으로 정했습니다.

 

1395년 사직단의 축조공사가 시작되어 단의 설치가 완성된 이후 담장을 둘렀으며,

담장 안에는 신실(神室)과 신문(神門)을 세웠고 1474년에 간행된 〈국조오례의〉에

의하면 사직단은 정 4 각형의 평면으로서 한 변의 길이는 2장 5척 즉 25척,

높이는 3척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단의 사방 중앙에는 3층의 섬돌이 설치되어 있으며, 사단과 직단

사이의 간격은 5척으로 되어 있습니다.

 

 

 

『국조오례 서례(國朝五禮序禮)』에 기록되어 있는 조선 초기의 사직단을 보면,

한가운데에 사단과 직단이 각각 동쪽과 서쪽에 위치하였는데 너비는 2장 5자이고

높이는 3자였다고 합니다.

 

유의 한쪽 면의 길이는 25보(步)였으며, 사방으로 홍살문이 있었으며 그 밖으로

다시 네모난 담장이 둘러쌌으며 이 담장에도 역시 사방으로 홍살문이 있었습니다.

 

특히 홍살문은 모두 문이 하나인데 담장의 북문은

3개의 문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신이 출입하는 문이므로 격을 높이기 위한 것으로 유의 바깥 서남쪽에 신실(神室)이 있고

유의 북문과 담장의 북문 사이에는 국왕이 서 있는 자리인 판 위(版位)가 있었습니다.

 

 

우측의 어린이 도서관 담장 너머로 곱게 핀 벚꽃 

 

 

사직단을 돌아본 후 서울역사박물관 후면에 있는 경희궁으로 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