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속에 묻혔던 600년 한양의 도심 (2021.3.23 공평도시유적 전시관)

2021. 3. 26. 11:42나의 이야기

 

 

오늘은 옛 직장동료와 함께 오전 10시경  인터넷으로 사전 예약을 한

공평 도시유적전시관을 찾았습니다.

 

서울의 도심속 지하에 숨겨져 있던 폼페이 같은 역사 유적지인 견평방을

통하여 한양 600여 년의 가려진 역사를 들여다 봅니다.

 

 

공평 도시유적전시관 안내 데스크 전경

 

2015년 공평 1·2·4 지구 도시환경정비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조선 한양에서 근대 경성에

이르는 역사도시 서울의 골목길과 건물터가 온전하게 발굴되었습니다.

 

이에 서울시는 도시유적과 기억을 원래 위치에 전면적으로 보존하고자

공평 도시유적전시관을 조성하여 2018년 9월 12일 개관하였습니다.

 

도심정비사업에서 발굴되는 매장문화재를 최대한 ‘원 위치 전면 보존’한다는

‘공평동 룰’을 적용한 첫 사례이기도 합니다.

공평동 룰은 도심정비사업에서 발굴되는 매장문화재를 최대한

‘원 위치 전면 보존’한다는 원칙입니다.

 

이에 따라 사업 추진 시 매장문화재에 대한 전면 보존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갖고 매장문화재를

고려한 건축설계를 하고 매장문화재 보존 면적에 따른 용적률 인센티브를 부여해서

사업시행자의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하였습니다.

 

아울러 유적전시관 조성에 따른 가이드라인을 제시하여 서울시 총괄건축가와 협의를 하고,

이런 과정을 거쳐 조성된 전시관은 서울시에서 운영합니다.

2014~15년에 걸쳐 실시된 발굴조사를 통해 조선 초기부터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총 108개 동 건물지와 중로, 골목길 등의 유구 와 1,000여 점이 넘는 생활유물이

확인되었습니다.

 

그중 유구의 상태가 가장 온전히 남아있는 16~17세기 Ⅳ문화층 유구를

전시관 내부로 이전하여 복원하였습니다.

 

이중 전동 큰 집, 골목길 ㅁ자 집, 이문안길 작은 집의 3개 건물지가 핵심 콘텐츠로

각 건물지별로 1/10 축소 모형, 가상현실인 VR 체험, 출토된 유구 위에 1:1 복원 모형 등

다양한 전시기법을 통해 16~17세기 한양의 모습을 보여드리고 있습니다.

 

이와 함께 조선시대부터 현대까지 사용했던 골목길이 확인되어 이문안길과 전동 골목길을

직접 걸으면서 조선시대에 와 있는 느낌을 직접 체험하실 수 있습니다.

 

 

견평방의 위치

 

조선시대 한양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 쌓여 있는 곳으로 적으로부터 한양을 보호하기

위하여 산 능선을 따라 성벽을 쌓고 사람들이 드나들 수 있도록 4개의 커다란 문과

4개의 작은 문이 있었습니다.

 

성안에는 왕이 사는 궁궐과 나라의 뿌리인 종묘와 사직, 주요 관청들이 모여 있어 나랏일을

논의하던 육조거리 그리고 나라와 사람들에 필요한 물건을 공급하는 시전 등도 만들었습니다. 

 

오늘날 공평동 유적이 위치한 견평방은 한양에서도 제일 번화한 운종가

북쪽에 자리하여 사람과 물건들로 항상 북적였던 곳이 랍니다.

 

 

1호 건물지

 

 

공평 도시유적 전시관 배치도 전경

 

 

공평동 출토 진단구  

진단구는 건물을 지을 때 건물의 안전과 번영을 지신에게

기원하기 위해 땅에 묻는 물품입니다.

 

조선시대에는 주로 뚜껑이 있는 항아리가 묻혔는데 현재 까지는

항아리 안에서 별다른 내용물이 확인된 바는 없습니다.

  

사용된 항아리의 재질은 도기, 분청자, 백자 등 다양하며 뚜껑은 분청자, 백자 접시와 대접,

판판한 돌, 기와 편들이 두루 활용되었습니다.

 

공평동 유적에서도 몇 점의 진단구가 출토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청진동을 포함한 종로 지역에서 확인된 진단구는 대부분 조선 전기에 해당하는

것이었던 반면, 공평동 유적에서는 외면에 철화 안료로 문양을 17세기의 백자 항아리

진단구가 출토되었습니다.

  

 

청진동 유적 출토 진단구 

 

 

 

여리꾼

 

시전거리에 손님이 오면 다가가 어떤 물건을 찾는지 묻고 해당 가게에 데려가 흥정을 붙인 뒤

가격을 조정해 거래를 성사시키고 수수료를 챙기는 사람을 여리꾼이라고 했습니다.

 

여리꾼의 명칭은 손님을 찾아 줄지어 서있다고 해서 열립 군 혹은 남은 이익을

챙기기에 여릿 군이라 부른 것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이들은 특정 가게에 속한 것이 아니어서 자기 몫을 챙기려면 주인이 설정한 가격을

먼저 알아내 손님에게 그보다 비싼 불러야 했습니다.

 

이를 위해 손님이 알아듣지 못하게 암호와 같은 변어를 쓰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의 눈에 띄기 위해 화려한 복장을 하고 다녀 지나치게

경박스럽다고 비하되기도 하였습니다. 

 

 

전기수

 

조선 후기의 직업으로 소설을 낭독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사람이 많이 모이는 시전거리에서

정기적으로 이야기판을 벌렸습니다.

 

사람들이 둘러싼 가운데 소설을 읽다가 가장 재미나고 들을 만한 대목에

이르면 잠시 입을 다물고 말을 그칩니다.

 

이때 그다음 대목을 듣고 싶어서 사람들이

돈을 던져 주면 낭독을 계속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청중들에게 돈을 요구하는 방법을

요전 법이라고 합니다.

 

대체로 숙향전, 심청전, 춘향전과 같은 한글 소설을 많이 읽었고 책을 통째로

외워서 책 없이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했습니다.  

 

 

왈짜

 

왈짜는 시전을 주름잡던 사람들로 지방에서 올라온 기생들의 의식주 문제를 해결해주고

기방의 영업으로 발생한 이익 일부를 차지했다고 합니다.

 

기방의 운영자이자 기방의 주요 고객이기도 했던 이들은 대전별감, 포도청 포교, 의금부 나장 등

직책이나 신분은 그리 높지 않지만 힘깨나 쓰는 몇몇 제한된 부류가 많았습니다. 

 

 

순라꾼

 

조선시대 한양 도성의 야간 순찰대를 가리키는 말로

야경꾼이라고도 했습니다.

 

통행금지가 시작되는 밤 10시경 순찰을 시작하여 새벽 4시경 해제를 알리는

종루 종소리가 울리면 순찰을 종료했습니다.

 

손전등 역할을 하는 조족등을 들고 통행금지를 알리는 나무 딱 닦기를

울리며 2인 1조로 움직였습니다.

 

야간 통행자와 마주칠 경우에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붙잡아 다음날 곤장을 쳤습니다.

 

밤이 깊을수록 가중처벌 대상이 되었습니다.

 

순라꾼들은 말마기라는 암호를 통해 서로를 알아보았는데, 암호가 틀리면

역시 불법 통행자로 간주하여 붙잡아 벌하였습니다.

 

도적이나 움직임이 수상한 사람을 체포하고 도성 내 화재를

방지하는 것이 주된 임무였습니다. 

 

 

순라꾼과 함께 

 

 

14호 건물지

 

 

신윤복의 그림

 

 

발굴된 다양한 상공업 물품들 

 

조선시대 한양에서는 여러 관청과 지역에서 발행한 화폐는 물론 적은 수량이나마 일본 에도시대의

관영 통보, 베트남의 경흥 통보, 청나라 시대의 건륭 통보 등도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중국에서 수입된 청화백자

 

 

참조기 이석

 

 

장기 

 

 

생활용품

 

 

11호 건물지 

 

 

(이문안길 작은 집)

 

 

한옥의 목구조를 복원한 이문안길 직은 집은 6칸의 작은 집으로 온돌과 마루,

아궁이 등의 주택 바닥 형식이 모두 발굴되어 조선 전기 한옥의 발전 과정을

잘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입니다.

 

이문안 작은집 안에서

 

 

발굴된 구수영 명 패찰

 

 

능성 구 씨 가문과 이문

 

공평동 이문안길 끝에는 구수영(1456-1524)의 집이 자리했습니다.

 

세종의 여덟째 아들인 영웅 대군의 사위로 증종반정에

가담해 정국공신에 오른 인물입니다.

 

영응대군의 형인 세조가 구수영을 영응대군의 사윗감으로 정해주고 살 곳을 마련해

주었는데 그곳이 바로 종로 시전 뒷길에 위치한 능성 구씨 가옥입니다.

 

가옥에서 종로 방향으로 연결된 길의 중간 지점에 지금의 공평동 유적이 있고,

그 길을 따라 종로와 만나는 지점에 이문이 위치하였습니다.

 

일반적으로 이문은 야간 통행자를 검문하기 위해 마을 입구에 세우는 것이 었지만,

능성구씨 가옥은 인조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기 때문에 가옥으로 들어가는 동네

입구에 이문을 세워 순라꾼도 들어오지 못할 정도로 엄격하게 통제하였습니다. 

   

 

능성구씨 가옥은 구수영의 증손인 구사안이 동생 구사맹에게 대지의 서쪽 일부를

떼어주고 집을 지어 살게 하면서 잠룡지가와 태화 정가로 나뉘었습니다. 

 

인조는 왕이 되기 전 외할아버지인 구사맹의 집에서 자랐습니다.

 

태화정은 구사안의 손자 구인후가 만들었습니다.

 

능성 구씨 가옥은 조선 후기에 현종의 후궁인 경빈 김씨의 순화궁이 되었다가

일제 강점기에는 이완용의 소유로 넘어갔습니다.

 

이후 요릿집 명월관의 주인 안순환이 인수해 명월관의 별관으로 사용했는데,

이때 태화정이 있던 자리라 하여 태화관으로 고쳤습니다.

 

1919년 3월 1일 손병희 등 민족 대표 33인이 이곳 태화관 2층 끝

방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습니다.

 

1921년에는 사회복지기관인 태화 여자관이 설립되었고, 1982년 도시 재개발계획으로

태화 여자관이 철거된 후에 현재의 태화빌딩과 하나로빌딩이 들어섰습니다. 

 

 

이문안길과 석축

 

 

전동 골목길

 

 

15호 건물지

 

 

견평방은 한양 행정 구역 중 중부에 속했던 곳으로 의금부, 전의감 등 주요 관청, 순화궁 등

궁궐 관련 시설, 상업시설 시전행랑 등 다양한 성격의 시설이 있었습니다.

 

특히 건평방에는 중인 중에서도 상인이 주로 거주했습니다.

 

이들은 경제력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여가문화를 화려하게 꽃 피웠고,

이에 도성 최고의 경제적, 문화적 중심지로 발전을 했습니다.

 

견평방에는 각 시설에 종사했던 사람들의 가옥도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구윤옥 가옥처럼 대규모 저택부터 상인이 주로 거주하는 조그만 가옥들이

높은 밀집도로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견펑방 골목 구석구석에 위치해있던 가옥은 한양의 경제와 문화를 주도했던 사람들의

소중한 터전이자 생활을 들여다볼  수 있는 거울이었습니다. 

 

 

 

조선이 건국되면서 수도가 된 한양에는 궁궐, 종묘,

시전 등 다양한 시설이 건립되었습니다.

 

이와 함께 백성의 이주도 착실히 진행됨으로써 한양은 수도로서의

권위와 면모를 갖춘 조선 최고의 도시가 되었습니다.

 

새롭게 한양에 거주하게 된 사람들의 주거지 마련 문제는

시급한 해결 과제였었습니다.

 

조선 조정은 가옥 관련 정책을 통해 수도의 효율적 통제, 주민 파악 강화 등

조정의 대민 관리 체계를 확립하려 하였습니다.

 

가옥 건립과 관련한 법과 제도를 마련하고 택지 무상 분배 등

백성의 안정적인 주거지 마련에 힘썼습니다. 

 

그러나 증가하는 인구에 비해 지급할 수 있는

택지는 점점 부족해졌습니다.

 

이 것을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행정구역 신설 후 택지 지급, 불법 가옥 철거,

새로운 입주 형태 권장 등 시기별로 다양한 대책을 수립 시행하였지만

조선시대 내내 한양의 주거지 부족 문제는 심각한 상태였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조선시대의 가옥 부족 현상은 이조 시대나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겐

현재에도 진행형이란 생각에 웃음이 나옵니다. 

 

과거에도 해결되지 못했던 한양의 주거 문제가 현재의 서울 주거 문제에게 던져주는

시사점이란 생각에 널뛰고 있는 아파트 매매가 폭동을 바라보며 이게 언제쯤 해결이

되려는지 쓴웃음이 나옵니다.

 

 

 

수선(한양을 의미) 전도의 견 평방과 이문 내 구윤옥 가옥 도형

 

금부동집 모형

 

한양의 공인중개사 가쾌

 

조선시대 한양에도 오늘날의 공인중개사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가쾌, 집 거간, 집주름(릅)등으로 불렸고 복이 있는 집과 땅을 소개한다는

의미의 복덕방이라는 사무실에 모여 중개 활동을 하였습니다.

 

주로 훈련도감 포수들이 많았는데 가옥 매매 임차 등을

주선하고 쌍방으로부터 보수를 받았습니다.

 

관례상으로만 존재했던 가쾌와 중개 업무는 한성부가 1893년(고종 30)부터 가옥 거래 시

공증을 의무화하고, 거래 증빙 문서인 가계 발급을 시작하면서 공식화되었습니다.

 

중개 보수는 이전의 관례에 따라 매매의 경우 쌍방에게 매매가의 1%, 세입의 경우 집세의

0.5%씩 받도록 하였으나 부당하게 수수료를 챙기려는 사례가 많았다고 합니다.  

 

 

수동집

 

 

전동집

 

 

견평방에는 시전 혹은 전방이라고 하는 시설이 있었습니다.

 

모두 가계를 일컫는 말로 시전이 비교적 규모가 큰 상점이라면 전방은 시전보다도

작지만 직접 제조부터 판매까지 할 수 있는 곳을 뜻합니다.

 

이들 가게에는 상인과 그 가족들의 주거 시설이 함께 있었습니다.

 

상업 기능을 겸비한 특성에 따라 주로 종로, 전동길 등 견평방의 큰길 옆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전면에는 물건들을 진열하고 손님을 맞이하는 판매 공간이 있었고 후면에는

주거 공간이 있었습니다.

 

후면 주거공간은 크기 차이는 있더라도 모두 온돌방이었고, 중앙 마당을 중심으로 

"ㄱ", "ㄷ", "ㅁ"자형으로 방, 창고, 복도, 부엌 등을 배치하였습니다.

 

 

군소 가옥 연접 도형

 

지금의 청진동, 공평동 일대를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평면도입니다.

 

가운데 빈 공간은 의금부터로 추정되는데 주변 가옥의 구조,

크기, 소유주를 기입했습니다.

 

특히 아래쪽에는 시전 행랑으로 추정되는 건물이 그려져 있는데 전면의 판매 공간과

후면의 가옥이 연결되어 있어 주거지가 결합된 시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