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쁜 마음의 궁전 "딜쿠샤"(엘버트 테일러 가옥 2021.4.2)

2021. 4. 3. 19:02나의 이야기

 

"기쁜 마음의 궁전" 딜쿠샤 전경(2017년 8월 등록문화재 제687호)

 

 

현재 딜쿠샤는 사직터널 앞 도로변에서 진입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공사 중에 있었는데

후면 복잡한 언덕길을 따라 골목으로 딜쿠샤를 찾아가는 것은 미로같아서 한참을

헤매야만 하였는데 언덕길 경사도가 가팔라서 숨을 조금 헐떡여야만 합니다.ㅎ^^* 

 

입장료는 무료로 사전 예약에 의한 관람만 허용되기에 서울역사박물관 홈 페이지를

통하여 사전 예약을 하셔야 입장이 가능합니다.

 

 보통 다음 달 같은 일정은 전 달 일주일 전에 신청을 받고 있는데 2일 정도면

한 달분 예약이 끝나기에 빠르게 예약을 하셔야 관람이 가능합니다.

 

다만 딜쿠샤 출입구에서 해설자 없이 1회당 5명 이내로 현장 입장이 가능한데 저도 오늘

1차 관람 시간에 옛 직장 동료와 함께 현장 예약으로 3번째와 4번째로 입장을 해서

돌아보았는데 제 바로 뒷사람으로 출입이 통제되더군요.

 

그러나 이런 방법은 대기자 수에 따라 입장을 하다 보니

많이 기다릴 수가 있사오니 참고하셨으면 합니다.

 

딜쿠샤 1일 4회 관람

 

(1차 10:00~11:00, 2차 13:30~14:30, 3차 15:00~16:00, 4차 16:30~17:30)

 

휴관일: 1월 1일, 매주 월요일

 

 

 

"딜쿠샤(DILKUSHA)"란 의미는 산스크리트어로

"기쁜 마음의 궁전"이라는 뜻입니다.

 

테일러 부부의 결혼과 한국 입국

 

 

엘버트 W. 테일러와 메리 L. 테일러는 한양도성 성곽을 따라 산책하다가 은행나무가 있는

넓은 땅을 발견하고 은행나무에 마음을 빼앗긴 메리와 엘버트는 이 곳에다가 딜쿠샤를

지었습니다.

 

딜쿠샤는 메리가 인도에서 방문했던 러크나우의 궁전이었는데 언젠가 자신에게도

집이 생긴다면 이 이름을 붙이겠다고 결심을 했다고 합니다.

 

엘버트와 메리는 1942년 조선총독부가 외국인 추방령으로 이들 부부를

한국에서 추방할 때까지 이 곳에서 살았던 집입니다.

 

그 이후에는 동생 월리엄 W. 테일러가 잠시 관리하다가 1959년에 자유당 조경규 의원이

매입하였으나 1963년에 조경규 의원의 재산이 국가로 넘어오면서 딜쿠샤도 국가 소유가

되었습니다.

  

 

1층 배치도 

 

 

엘버트 W. 테일러의 부인 메리 린리 테일러와 호박 목걸이와의 인연

 

미국인 사업가 앨버트 W. 테일러와 영국인 연극배우였던 메리 린리는

일본 요코하마에서 처음 만났다고 합니다. 

 

엘버트는 준설기를 구입하기 위해 일본에 머무는 중이었고 메리는 연극배우로 동양 여러 나라를

순회하며 공연을 하던 중이었는데 당시 남동생 에릭이 전쟁 중 전사했다는 소식에 슬픔에 빠져

있다가 친구의 설득으로 참석했던 극단 단원들과의 파티에서 엘버트를 만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둘은 요코하마 그랜드호텔에서 식사를 하며 자연스럽게 가까워졌고 엘버트는

메리에게 아름다운 호박 목걸이를 선물하여 자신의 마음을 전하였다고 합니다. 

 

엘버트는 한국으로 돌아가면서 인도로 떠나는 메리에게 자신이 꼭 찾아가겠다고 약속을

하였고, 둘은 열 달 후 인도에서 재회하여 1917년 6월 인도 봄베이의 성 토마스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3개월의 인도 신혼여행을 끝마치고 한국에 입국한 테일러 부부는 작은 회색 집이라고,

불리던 서대문의 한옥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작은 회색 집(The Little Gray Home : 서대문구 충정로 7길 부근)에서 브루스 T. 테일러가

태어났으며 테일러 가족은 딜쿠샤를 건축하기 전까지 그곳에서 살았다고 합니다.  

  

 

19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일제는 한국에 거주하던

적국 국민들을 수용소에 구금하였습니다.

 

엘버트 W. 테일러도 1941년 12월 일본군에게

끌려가 수용소에 구금되었습니다.

 

메리 L. 테일러의 "호박 목걸이( Chain of Amber)"란 책에는 형무소와

그 근처에 빨간 벽돌로 된 높은 건물이 보였다.

거기서 줄지어 걷고 있는 사람들이 우리 측에서 행방이 묘연해진 사람들의 수와 일치했다"라고

서술하고 있는데 이로 미루어 그 당시 한국에 거주하던 서양인들이 끌려갔던 장소는 서대문 형무소

옆의 감리교 신학대학교의 "사우어 하우스"로 추정을 하고 있습니다.

 

1942년 5월 엘버트는 풀려났지만 이후 조선총독부의 외국인 추방령에

따라 한국을 떠나야만 하였습니다.

 

테일러 부부는 경성역에서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간 뒤 배를 타고 두 달 만에

캘리포니아 롱비치에 도착을 하였다고 합니다.

 

엘버트는 다시 한국에 돌아가기 위해 노력하던 중 1948년 6월

심장마비로 갑자기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항상 한국을 그리워하던 앨버트를 위해 메리는 남편의 유해와 함께

1948년 9월 인천으로 입국을 하였습니다.

 

일제가 추방한 지 6년만이었습니다.

 

언더우드 가족과 성공회 성당의 헌트 신부, 여동생 우나, 시동생 월리엄 등의

도움으로 엘버트의 유해는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역에 안치되었습니다. 

 

메리는 한국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딜쿠샤를 방문하였다고 합니다.

 

사실 제가 감리교 계통의 미션 스쿨 고등학교를 졸업한 탓에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역에는

졸업한 모교의 설립자도 그곳에 잠들어 있다 보니 이 곳에서 거론되는 선교사들의 이름들이

그렇게 낯설게 느껴지진 않습니다.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 관해서는 오래전 제 블로그에 올린 적이

있사오니 하단부 검색창을 통하여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2005년 브루스 T. 테일러의 의뢰를 받은 서일대학교 김익상 교수가 일제 강점기의

지명만으로 2개월에 걸쳐 브루스가 어린 시절 살던 집을 찾아 브루스와 아내 조이스

핍스와 딸 제니퍼 L. 테일러와 함께 2006년 딜쿠샤를 방문하여 이 곳이 자신이

어린 시절 부모님과 함께 살던 곳임을 확인하였습니다.

 

1940년 한국을 떠난  지 66년 만의 귀향이었습니다.

 

2015년 브루스가 세상을 떠난 후 딸 제니퍼는 2016년부터 2018년까지 2년에 걸쳐

테일러 가문의 자료를 서울 역사박물관에 기증을 하였고, 이로써 테일러 일가의 딜쿠샤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테일러 부부의 추방 경로 

 

 

2층으로 오르는 계단 천정에 부착된 종 

 

 

딜쿠샤 2층 거실 전경 

 

 

자수 화조도 병풍

 

 

딜쿠샤 2층 거실의 벽난로 전경

 

 

주칠 원반

 

 

딜쿠샤 2층 거실 전경

 

 

1919년부터 연합통신(AP) 통신원이었던 앨버트 W. 테일러는 고종 국장과 3.1 운동,

제암리 학살 사건, 독립 운동가의 재판 등을 취재하여 전 세계엔 타전한

통신원이기도 합니다. 

 

 

딜쿠샤(Dilkusha)는 일제강점기에 건축된 건물의 이름으로 미국의 기업인이자 언론인인

앨버트 테일러(Albert Taylor)가 부인 메리 테일러(Mary Taylor)와 함께 살던 집으로

‘앨버트 테일러 가옥’이라고도 부릅니다.

 

딜쿠샤는 앨버트 테일러가 직접 지은 이름으로 힌디어로 ‘이상향’

혹은 ‘행복한 마음, 기쁨’을 의미합니다.

 

그는 1923년 딜쿠샤를 짓고 1942년 추방될 때까지

이곳에서 살았습니다.

 

딜쿠샤는 붉은색 벽돌로 지은 지하 1층~2층 건물로 총면적은 624㎡ 정도 규모로 서양식

주택 중에서도 구성과 외관이 독특한 편으로 일제강점기 건축 양상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화강석 기저부 위로 붉은 벽돌을 세워 교차하면서 쌓은 것이 특징으로 한국에서는

흔치 않은 방식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앨버트 테일러는 1919년 3·1 운동을 세계에 알린 인물로 그는 조선에서 금광과 무역 사업을

하던 기업가로, 미국의 통신사인 UPI(United Press International)의 서울 특파원으로

임명되어 언론인으로도 활동했습니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난 무렵 테일러는 한국 민족대표 33명이 작성한 독립선언서를

입수했으며, 동생을 통해 몰래 독립선언서를 외국으로 보내 보도했습니다.

 

테일러는 이후에도 일본군이 수원 제암리에서 주민들을 집단 학살한 제암리학살사건

취재하는 한편, 일본 총독을 찾아가 조선인 학살에 대해 항의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사건들로 그는 서대문 형무소에서 6개월간 복역하기도 했으며 1941년

자택 감금되었다가 1942년 미국으로 추방되었습니다.

 

테일러는 1948년 미국에서 사망한 이후 유언에 따라

서울 외국인묘지공원에 안장되었습니다.

 

원래 딜쿠샤는 어니스트 베델(Ernest Bethel)이 양기탁 등과 함께 창간한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사옥으로 추정하기도 합니다.

 

서울시는 1995년부터 딜쿠샤의 문화재 지정을 추진했으나, 건물 기초에 새겨진

‘딜쿠샤 1923(DILKUSHA 1923)’의 뜻과 건물의 역사가 확실치 않아 사업이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딜쿠샤의 역사는 2006년 앨버트 테일러의 아들인 브루스 테일러(Bruce Taylor)가

한국을 방문하며 밝혀졌습니다.

 

당시 브루스 테일러는 서울시로부터 명예 시민증을 받았으며 딜쿠샤는 원형 복원되어

3∙1 운동 100주년이 되는 2019년부터 전면 개방되고 있습니다.

 

2019년 2월 28일에는 앨버트 테일러의 손녀인 제니퍼 테일러(Jennifer Taylor)가 한국을 방문해

앨버트 테일러 부부의 유품과 당시 소장품 등 394점을 서울시에 기증하였고 기증 물품에는 회중시계

같은 일상 품부터 앨버트 테일러가 한국에서 쓴 기사 등 역사적 물품이 포함되었습니다.

 

 

딜쿠샤 2층 베란다(티켈 테라스) 전경

 

 

제암리 학살 사건 취재

 

 

영상실 전경

 

 

딜쿠샤 계단 천정 전경

 

 

2층 거실에서 내려오는 계단 전경

 

 

딜쿠샤 1층 현관과 베란다 전경 

 

 

딜쿠샤 가옥 앞의 은행나무 전경

 

 

보호수 서 1-10 은행나무(수령 420년, 수고 24m,  나무둘레 680㎝)

 

 

권율 도원수 집터 표지석

 

 

딜쿠샤 근처의 선교사 가옥 정원 전경 

 

 

곱게 핀 홍매화

 

 

선교사 가옥 전경

 

 

선교사 가옥 집터는 서울시에서 내부 수리 중에 있었는데 공사 책임자의 말로는 보존의

큰 의미가 없어서 서울시에서 철거를 한다고 하던데 제 생각으로는 이런 가옥은 근현대사

주택으로 영구 보존을 해서 지역에서 활용을 하고 가옥의 정원은 전망대를 갖춘

공원으로 조성하여 시민들의 품으로 돌려주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선교사 가옥 집터에서 내려다본 서울 시가지 전경

 

사직공원 방향으로 내려가는 골목길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