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4. 5. 10:37ㆍ나의 이야기
경희궁의 금천교 전경
옛 직장동료와 함께 딜쿠샤 나들이를 마친 후 사직단을 거쳐
도보로 찾아온 경희궁의 측면 전경입니다.
이 곳 하단부 옆 측면에는 일제시대에 구축한 지하방공호가 아직도 볼상스럽게
그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어 미간을 찡그리게 합니다.
한반도 전역에 남아 있는 이런 흉측한 일제의 잔재는
언제 없어 지려는지 짜증만 더합니다.
이 곳 경희궁 역시 제가 오래전에 근무하던 곳의 후문 근처였던지라 산책 삼아 자주
찾아오던 곳이 었지만 제대로 돌아 본적은 한번도 없었다는 생각에 오늘은 제대로
경희궁을 돌아봅니다.
경희궁 내의 수령이 350여년된 느티나무 전경
느티나무 구멍으로 본 자화상
숭정문
사적 제271호인 경희궁은 새문안 대궐 또는 서쪽의 궁궐이라
해서 서궐이라 불리기도 했습니다.
그 후 왕족의 사저로 쓰이다가 광해군 8년(1616)에 이 새문안 대궐 자리에 왕기(王氣)가 있어
이를 눌러 없애기 위해 별궁을 짓고 경덕궁이라 하였으나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은 축출되었으며
영조 36년(1760)에는 궁의 이름을 경희궁이라 개칭하였습니다.
경희궁에는 회상전, 흥정당, 집경당, 숭정전, 흥화문 등의 건축물이 있었으나,
순조 29년(1829)에 화재로 대부분이 소실되어 1831년에 중건하였습니다.
국권침탈 뒤에 건물은 없어지고 그 터에 경성중학교(지금의 서울고등학교)가 세워졌으며
1987년 서울고교가 강남으로 이전한 뒤 공원으로 가꾸었습니다.
공원 내에는 서울역사박물관, 산책길 등이 있고 신라호텔로 옮겼던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이
다시 제자리에 옮겨졌으며, 정전인 숭정전의 복원작업이 1994년 11월에 완료되었습니다.
경희궁의 본래 명칭은 경덕궁(慶德宮)으로 불렸습니다.
처음 창건 때는 유사시에 왕이 본궁을 떠나 피우(避寓)하는 이궁(離宮)으로 지어졌으나,
궁의 규모가 크고 여러 임금이 이 궁에서 정사를 보았기 때문에 동궐인 창덕궁에 대하여
서궐이라 불리고 중요시되었습니다.
이 궁이 창건된 것은 1617년(광해군 9)으로, 당시 광해군은 창덕궁을 흉궁(凶宮)이라고
꺼려 길지에 새 궁을 세우고자 하여 인왕산 아래에 인경궁(仁慶宮)을 창건하였습니다.
그런데 다시 정원군(定遠君)의 옛 집에 왕기가 서렸다는 술사의 말을 듣고
그 자리에 궁을 세우고 경덕궁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광해군은 이 궁에 들지 못한 채 인조반정으로 왕위에서 물러나고,
결국 왕위는 정원군의 장남에게 이어졌으니 그가 곧 인조입니다.
인조가 즉위하였을 때 창덕궁과 창경궁은 인조반정과 이괄(李适)의 난으로
모두 불타 버렸기 때문에, 인조는 즉위 후 이 궁에서 정사를 보았습니다.
창덕궁과 창경궁이 복구된 뒤에도 경덕궁에는 여러 왕들이 머물렀고,
이따금 왕의 즉위식이 거행되기도 하였습니다.
즉, 제19대 숙종은 이 궁의 회상전(會祥殿)에서 태어났고, 승하한 것도
역시 이 궁의 융복전(隆福殿)에서였다고 합니다.
제20대 경종 또한 경덕궁에서 태어났고,
제21대 영조는 여기서 승하하였습니다.
제22대 정조는 이 궁의 숭정문(崇政門)에서 즉위하였고, 제23대 순조가
회상전에서 승하하였으며, 제24대 헌종도 숭정문에서 즉위하였습니다.
1760년(영조 36)경덕궁이던 궁명을 경희궁으로 고쳤는데, 그것은 원종의 시호가
경덕(敬德)이므로 음이 같은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창건 때 정전·동궁·침전·제별당·나인입주처 등 1,500칸에 달하는 건물이 있었는데
1829년(순조 29) 큰불이 나 회상전·융복 전·흥정당(興政堂)·정시각·집경당·사현각 등
궁내 주요 전각의 절반 가량이 타 버렸습니다.
이듬해 서궐영건도감(西闕營建都監)을 설치하여
소실된 건물을 재건하였습니다.
이렇게 궁궐의 하나로 중요시되던 경희궁은 일제강점기에 건물이 대부분 철거되고,
이곳을 일본인들의 학교로 사용하면서 완전히 궁궐의 자취를 잃고 말았다.
경희궁에는 수많은 전각들이 들어서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에 궁 자리에 일본인 중학교를
세우면서 대부분의 건물이 사라지고, 일부는 다른 곳에 이건 되어 지금까지 건물이
남아 있는 것도 있습니다.
우선, 현존하는 건물을 보면 정전인 숭정전의 정문인 흥화문,
후원의 정자였던 황학정(黃鶴亭) 등이 있습니다.
숭정전은 1926년 조계사(曹溪寺)에 매각되어 현재 동국대학교 구내에 있는데,
현재 정각원 건물로 쓰이고 있는데 정면 5칸, 측면 4칸의 단층 팔작 기와지붕을
한 주심포 양식의 건물입니다.
황학정은 1890년(고종 27) 회상전의 북쪽에 지었던 정자로, 1923년 민간인에 매각되었다가
현재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동의 사직공원 뒤편에 옮겨져 있습니다.
숭정전
숭정전 천정
일월 오봉병과 어좌
궁궐 정전의 어좌 뒤편에 펼쳐져 있는 그림이 일월 오봉병으로 궁궐에서는 주로 병풍 형태로
제작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으나, 그림 자체를 말할 때는 일월오봉도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일월 오봉병은 정전에서뿐만 아니라, 왕이 참석하는 흉례나 길례의식의 장소에도 의전용으로
사용되었으며, 선대왕들의 초상과 신주를 모신 선원전에도 설치되었습니다.
다섯 봉우리의 산, 파도치는 바다, 흘러내리는 폭포, 짙푸른 적송, 그리고 해와 달을 기본 소재로
하는 일월 오봉병은 좌우대칭 구도를 기본으로 하는 지극히 형식적인 그림입니다.
하지만 그 속에는 옛사람들의 우주관과 음양 사상, 천명사상과
길상 관념이 농도 짙게 응축돼 있습니다.
천지를 다른 말로 광악(光嶽)이라 하는데 '광'은 삼광(三光), 즉 하늘의 해·달·별을
가리키며, '악'은 땅의 오악(五嶽)을 일컫습니다.
해와 달은 하늘의 대표적 상징이고, 오악은 땅의 대표적 상징입니다.
일월 오봉병의 화면을 꽉 채우고 있는 다섯 봉우리의 산은 오악을 의미하며, 땅의 대표적
상징으로 중국에 서는 태산(동), 화산(서), 형산(남), 항산(북), 쑹산(중악)이 오악에 해당하고,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금강산(동), 묘향산(서), 지리산(남), 백두산(북), 삼각산(중악)이
오악으로 설정돼 있습니다.
오악은 말 그대로 '다섯 개의 크고 높은 산'이지만 오악이 갖는
상징적 의미는 좀 더 넓고 깊습니다.
오악의 '5'라는 수는 동양 상수학(象數學)의 기본인 1~9의 수 가운데 중앙에
해당하는데 중앙은 모든 것을 포괄하고 포용하는 의미를 가집니다.
따라서 오악은 천하의 모든 산들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일월 오봉병에서 오악을 자세히 보면 중앙에 있는 산이 좌우의 산들보다 앞쪽에 크게 그려져
있고, 좌우의 산들은 중앙을 향해 약간 기울어지게 표현돼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동서남북 사방의 산들이 중악에 포섭된다는 점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자정전 전경
5대궁궐 중 서쪽에 자리하여 서궐로도 불렀는데 인조, 효종, 철종 등 10여 명의
임금이 살았지만 기간이 짧았고 거의 빈 궁궐로 있었습니다.
원래의 이름은 ‘경덕궁’이었는데 1760년(영조 36)
'경희궁'으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경희궁지〉에 경희궁의 규모와 배치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둘레는 6,600자였으며
흥화문, 흥 원문, 개양 문, 숭의문, 무덕 문의 5개 문을 두었습니다.
숭정전은 신하들의 조회를 받던 곳이며 뒤쪽의 자정 전은
임금이 업무를 보던 곳이었습니다.
서암 전경
태령전
영조의 어진을 보관한 태령전 내부 전경
경희궁은 일제가 시행한 근대도시 개발에 따라 경희궁은 철저하게 파괴가 되었는데
궁터 동쪽과 남쪽 일부가 도로로 편입되고 궁궐 안에는 경성중학(현 서울고등학교)이
들어섰습니다.
전각들은 여러 곳으로 팔려나갔었는데 숭정전과 하상 전은 조계사로, 홍정전은 일본인 절
광운사로, 홍화문은 이토 히로부미의 사당인 박문사로 팔려나갔다고 합니다.
그런 탓에 옛 궁궐의 모습을 일부 복원을 하였지만 원 형상으로의 복원이
요원하다 보니 무척 안타까운 곳이기도 합니다.
궁궐의 지붕 기와가 가져다주는 고즈넉함과 처마선이 가져다주는 아름다운 곡선의 미는
꽃이 피는 봄에 가장 아름답다는 생각이 듭니다.
꽃이 피는 봄이 사계절 중 가장 아름다운 곳은 만고의 진리이겠지만 궁궐의 아름다운 처마선과
까만 지붕도 꽃이 필 때에 더 조화로워 보이기 때문입니다.
흥화문 전경
흥화문은 역시 1618년에 세워진 건물로 창건 때의 건물이 그대로 보존되어 왔으나, 1932년에
이전되어 일본인 절인 박문사(博文寺)의 문으로 쓰이다가 1988년 경희궁 복원계획의 일환으로
지금의 위치로 이전, 복원되었습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우진각 기와지붕이다. 경복궁·창덕궁·창경궁의 정문이 모두 2층으로
구성되어 있는 데 비하여 이 건물만은 단층으로 되었는데, 그 이유는 궁의 창건 때 이 궁이
피우처로 마련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경희궁은 일명 ‘야주개 대궐[夜照峴大闕]’로 불렸는데, 그것은 정문인 흥화문의 현판 글씨가
명필이었고, 글씨의 광채가 밤에도 훤히 비추었다고 해서 이 일대를 야주개라고 부른 데서
유래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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