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2. 29. 01:08ㆍ나의 이야기
악바르 대제의 지하 묘 진입 전 중앙 홀의 화려한 내부 천정의 전경
악바르의 위대함은 광대한 영토를 차지했던 군사적 측면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정치, 경제, 사회 등 제반 분야에서도 이후 무굴 제국을
이끌어 나갈 확고한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악바르 치세 초기에는 여러 가지 면에서 제국의 지배권이 아직까지 확립되지 않은 상태였었는데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라지푸트인과 구자라트가 성공적으로 평정됨으로써 무굴 제국의
정치적 상황은 어느 정도 안정을 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악바르는 우선적으로 거대한 제국의 영토를 소수의 무굴인만으로 통치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힌두인에게 관용 정책을 베풀어
그들을 제국에 봉사하는 집단으로 만들 필요가 있었습니다.
악바르 대제 묘의 1층 홀안에서 바라다 본 출입문 전경
그는 정치 고문이자 절친한 친구인 아블 파즐의 조언을 받아들여 무굴 제국이 이슬람 왕조임에도
힌두교도에게 부여되던 인두세를 폐지하고 관직을 개방하는 동시에 출신과 가문에 상관 없이
재능 있는 인물들을 골고루 기용했습니다.
물론 악바르 이전에도 힌두인들이 행정관료나 군인으로 등용되기는 하였지만
그렇다고 그들에게 완전한 정치적 발언권이 보장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악바르의 이 같은 개방 정책은 이전의 이슬람 국가와는 전혀 다른 정책으로, 무굴 제국에 와서
힌두인들은 능력에 따라 자유롭게 정치적 지위를 보장받게 되었습니다.
출입문 안쪽에서 인증 샷을.......
출입문 천정태두리의 화려한 문양
악바르는 힌두인들 가운데 특히 라지푸트인들을 행정관료로 많이 등용했습니다.
그가 이처럼 라지푸트인들에게 신경을 쓴 이유는 그들의 잠재적인 힘을 결코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는데 가장 저항적인 그들을 굴복시키기 위해서 악바르는 외형적으로는 치토르와
란탐보르 같은 성을 공격하여 그들의 외적인 힘을 꺾어버리는 한편 내적으로는 높은 관직을
제공하거나 라지푸트 족장의 공주와 결혼함으로써 그들을 유화시키는 데 주력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라지푸트 족장들에게 자치권을 부여하여 이슬람 귀족과
동등한 특권을 행사하도록 조치했습니다.
악바르의 내외적인 강온 정책은 크게 성공을 거두어 이후 라지푸트인들은
무굴 제국의 충실한 파트너 역할을 수행했다고 합니다.
세월이 흘러 일부가 훼손되어 탈착되었지만 지금도 아름다운
화려한 문양은 찬란하게 빛을 발합니다.
악바르가 제국의 영토를 크게 확장시킬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
가운데 하나는 강력한 군대의 힘이었습니다.
그는 이 같은 군사 제도를 정치 분야에서도 그대로 적용했는데 만사브다리라고 불리는
이 제도는 먼저 모든 귀족들을 신분 고하에 따라 33등급으로 나누었습니다.
그런 다음 가장 낮은 등급은 10명, 가장 높은 등급은 5천~7천 명의 병사들을 배정하여
그들의 책임하에 행정 및 군사업무를 담당하도록 하는 일종의 군정일치 제도였습니다.
또한 그 지위는 세습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공과에 따라 결정되었습니다.
악바르는 종족주의와 분파주의를 혁파하기 위하여 무굴인뿐 아니라
힌두인에게도 동등한 기회를 부여했습니다.
이 같은 만사브다리 제도의 개방성 때문에 많은 젊은이들이 자신의 재능을
국가를 위해 열성적으로 쏟아부을 수 있었습니다.
1층 중앙홀 사이드의 작은 돔 천정과 작은 쪽창에 새겨진 아름다운 문양들
만사브다리 제도의 기원은 부족 중심의 성격이 강했던 몽골 제국을 하나로 묶어 세계사에
지울 수 없는 큰 자취를 남겼던 칭기즈칸에서 유래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칭기즈칸은 10명을 단위로 군대를 조직하여 가장 낮은 계열의 장수는 10명 그리고 칸이라고
불리는 가장 높은 장수는 1만 명을 휘하에 거느리도록 했습니다.
이 같은 몽골군의 편제는 델리 술탄 시대의 군제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 제도가 곧바로 바부르와 후마윤의 군제에 같은 영향을 미친 것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여하튼 무굴 제국의 만사브다리 제도가 인도 이외의 지역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제도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악바르는 또한 델리 술탄 시대의 문제가 왕권의 약화에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이러한 약점을 극복하기 위하여 왕권의 신성함을 강조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왕권의 신성화 작업은 이미 굽타 시대의 힌두왕들도 실행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를 위해 브라흐마니즘을 개혁한 힌두이즘을 활용했는데 무굴 제국의 왕들도
굽타 왕조 때와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신성화를 위하여 이슬람교를 활용했습니다.
이를 통해 자신들이 절대자인 신의 사명을 부여받아 지상에서 활동하는
신의 대행자임을 강조했습니다.
하단부는 많이 훼손이 되었지만 벽면에 새겨진 다양한 상감기법의 화려한 문양들은
악바르가 다스렸던 무굴시대의 건축술의 진수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름답습니다.
악바르는 종교적인 방법 외에도 제국을 12개의 주로 나누어 각각의 주에는 군사령관을
겸한 지사 수바다르와 토지세를 징수하는 디완을 임명했습니다.
그리하여 전자는 군을 통솔하되 경제적 기반이 없고 후자는 경제적 기반은 있지만
군통솔권이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이처럼 그들의 힘을 반분시켜 놓음으로써 그들이 델리 술탄 시대처럼 쉽게 제국의 권위에
반기를 들 수 없도록 조치했습니다.
이 밖에도 관리들의 직책을 3~4년마다 교체하고 토지와 같은 재산은 생존시에만 소유권을 인정하고
사후에는 회수하도록 하여 귀족들이 쉽게 세력을 형성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이러한 조치는 무굴 제국 시대의 귀족들로 하여금 현실에 치중하면서
사치와 방종에 물들게 하는 병폐를 낳았습니다.
악바르 사후 왕위를 계승한 것은 살림이라고 불렸던 아들 자항기르(1605~27년)로
이전부터 아버지의 왕위를 공개적으로 노릴 만큼 야심만만했던 그는 다른 형제들이
모두 아버지 생전에 이미 술로 인해 죽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왕위를
계승할 수 있었습니다.
36세 때(1605년) 아그라에서 왕위를 계승한 살림은 누르웃딘 무하마드 자항기르
파드샤 가지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그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백성들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노력했지만
문제는 뜻밖에도 자신의 큰아들로부터 발생했습니다.
악바르 대제 지하 묘로 향하는 통로 전경
악바르는 이슬람교도이면서도 비이슬람교도를 포용하는 정책을 실행했습니다.
물론 악바르 이전 15세기 무렵부터 이슬람과 힌두교 상호간의 이해를
증진시키기 위한 노력은 행해지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차이타냐, 카비르, 나낙 등과 같은 성자를 통해 수피즘과 박티 신앙 사이에
상호소통의 길이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악바르는 이보다 더 구체적이고 적극적으로 양자의 통합을 추진했습니다.
악바르 대제 석관 전경
그는 우선 비이슬람교도에게 부여되는 인두세와 바라나시와 프라야그와 같은 힌두교의 성지들을
방문할 때 내야만 했던 세금을 과감하게 폐지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전쟁포로들에게 강요했던 이슬람교도로의
개종 역시 폐지했습니다.
그는 이슬람뿐 아니라 모든 종교인들을 동등하게 대했으며
그들의 종교적 믿음을 존중했습니다.
그의 종교적 관용 정책은 힌두교도의 자유로운 관리등용 정책과
함께 무굴 제국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악바르가 이처럼 종교에 관대할 수 있었던 원인 가운데 하나는 그 자신이 종교와 철학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으며 또 다른 원인으로는 정통적인 이슬람교도였던
악바르가 1575년 직접 체험했던 종교적 신비 경험을 들 수 있습니다.
어느 날 아그라의 궁전에 있을 때 그는 별안간 온몸이 신비로운 기운으로 감싸이면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황홀경으로 빠져들었는데 그날 밤을 온통 신과의 합일 속에서 지낸
그는 깨어난 이후에도 며칠 동안 그가 겪은 신비한 체험만을 되새기며 지냈습니다.
이 사건이 있은 후 그는 자신의 종교만이 유일하다는 편협한 생각을 버렸습니다.
조명이 없는 탓에 묘지 관리인이 비춰주는 후랫쉬 불빛과 자연 채광만으로
앵글에 담았기에 사진이 어둡고 상이 흔들리는.......
악바르 대제의 지하 묘 (※ 참고 사진)
악바르는 사회와 교육분야에도 개혁의 손길을 뻗었습니다.
우선 남편이 죽으면 아내도 뒤따라 목숨을 버리는 인도인의
전통적 관습인 사티 제도를 금지시켰습니다.
뿐만 아니라 과부의 재혼도 합법화했으며 또한 첫 번째 부인이 아이를 출산하지 못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그 밖에 어떤 경우에도 한 명 이상의 부인을 얻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그리고 인도인의 조혼 풍습을 개선하여 여자는 14세, 남자는 16세 이상이
되어야 결혼할 수 있도록 조치했습니다.
악바르는 또한 자신이 경건한 이슬람교도였던 만큼
술의 판매를 금지했습니다.
이 모든 법이 성공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 성과가
있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일부 천정의 쪽창으로 자연의 빛이 들어 오기는 하나 건축물 실내의 빛인 탓에......
악바르 대제 묘 건물 1층 좌측의 가짜 석관 전경
※ 이 가짜 석관은 도굴을 방지하기 위하여 만들어 졌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악바르는 문화적, 정치적 통합을 통해 인도인의 마음속에
결코 지울 수 없는 인상을 심어주었습니다.
그는 뛰어난 인격의 소유자였고 힘과 용기를 지닌 훌륭한 장군으로 신하들만이
아니라 심지어 적들에게서조차 충성심과 경외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할
만큼 매력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가짜 석관이 있는 천정 내부 돔 전경
1층 출입문 옆에 만들어져 있는 1개의 석관은 왕비와 악바르의 딸인 2명의 공주들 석관으로
악바르 사후 한참 뒤에 조성되었던 탓인지 악바르 가짜 석관보다는 더 세련미가 있습니다.
악바르 대제의 무덤 건축물을 돌아보면서 느낀 사실은 악바르 사후 후손들이 죽으면
무덤 좌우의 여러 칸으로 구성된 각 칸을 이용하여 계속해서 황실의 묘로 사용하려고
건축했던 것으로 여겨졌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대의 왕들이나 후손들은 각각의 묘를 따로 건축하여 이용하였기에
이 악바르 무덤은 황실무덤으로서의 큰 의미가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이런 각 칸 하나가 황실의 공동묘지로 설계가 되었던 것으로 짐작이 되었지만,
그의 후손들은 모두 각각의 묘지를 따로 만들었기에.......
물론 이런 제 생각이 잘못된 것이지도 모릅니다만......
암튼 이런 각칸이 악바르 지하 석관묘를 정점으로 좌,우,앞,뒤 4면으로 둘러 쌓여
악바르의 가짜 석관과 왕비와 공주2명을 모신 2칸 이외에는 각 칸들이 빈 공간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은 이를 간접 증명한다고 하겠습니다.
좌,우 대칭으로 건축되어진 빈 공간을 세어보니 40칸이고 각 방향마다 한 가운데 출입문으로
만들어진 별도의 중심 칸이 4개가 있어서 빈 묘실 공간은 악바르를 모신 중앙 홀을 제외하면
총 41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따라서 제 짐작으론 후대에 왕 3명 정도에 왕비와 그 후손들을 모시기 위한 황실
공동묘지로 건축되었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서문 전경
정원의 초지에는 그랜트 가젤 같아 보이는.......
그랜트 가젤 무리들
동문 전경
무굴 제국 시대에 인도의 문화는 다양한 방면으로 발전했습니다.
이 시대에 형성된 건축, 미술, 문학, 음악 등은 오늘 날까지도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무굴 제국 시대는 고대의 굽타 시대 이후
북인도 문화의 제2의 정통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시대의 문화적 특성은 전통의 힌두 문화와 터키-이란계 문화의
융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마르칸트에 있던 티무르 후손들의 궁전은 서아시아와
중앙아시아의 문화 중심지로 발전했습니다.
이 같은 문화적 배경 속에서 성장했던 바부르는 인도에 정착한 후 당시 다양한 인종과
신앙 속에서 제각기 발전해 온 인도 문화를 하나의 기준을 가지고
새롭게 정립하려고 했습니다.
훼손이 심한 북문전경
무굴인은 특히나 건축에 상당한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그들은 수많은 성과 왕궁, 문, 공공빌딩, 모스크,
물저장 탱크 등을 세웠습니다.
바부르는 특히나 정원을 좋아하여 아그라와 라호르 지역에 물이 흐르는
아름다운 정원을 만들었습니다.
무굴 시대의 정원 가운데 카슈미르의 니샤트 바그, 라호르의 샬리마르, 펀자브의 핀조레 정원 등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 아름다운 모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무굴 시대의 성과 같은 거대한 건축물은 악바르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악바르 때 붉은 사암으로 만들어진 유명한 아그라 성과 파테푸르시크리의 성, 그리고
샤 자한이 건립한 델리의 붉은 성(레드 포트)은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의 경탄을
자아내고 있는 대표적 건축물들입니다.
악바르 대제 묘에서 살아가고 있는 원숭이 무리들
정원에 노니는 공작새
어미 젖을 빨고 있는 아기 원숭이
이제 악바르 대제의 묘를 돌아보고 카주라호로 향하기 위하여
침대 열차를 타러 아그라역으로 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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