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11. 20. 00:26ㆍ나의 이야기
교동읍성의 남문인 유량루의 홍예 전경
둘레 약 430m. 높이 약 6m.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23호로 이 성곽은 강화도 서편의 교동도에
축조된 고을성으로 1629년(인조 7)에 쌓은 것이라고 합니다.
성을 쌓은 목적은 예로부터 서해안의 방어를 위한 것이었으며 조선시대 후기에는
이 성 안에 삼도수군통어영(三道水軍統禦營)의 본진이 주둔하였다고 합니다.
원래 이 성에는 세 곳에 문루를 갖춘 성문이 있었는데 동문에는 통삼루(統三樓),
북문에는 공북루(拱北樓), 남문에는 유량루(庾亮樓)란 문루가 있었다고 합니다.
1753년(영조 29)에는 당시의 통어사 백동원이 성곽과 여장(女墻)을 고쳐 쌓았고,
1884년(고종 21)에는 통어사 이교복이 남문을 중건하고 또한 문루와 성벽을 수리하였는데
공사를 끝내지는 못하였다고 합니다.
그 뒤 1890년(고종 27)에도 동문과 북문을 고쳐 세웠는데 세월이 흘러 무너졌다고 합니다.
특히 남문의 유량루는 1921년의 폭풍으로 무너졌으나
홍예(虹霓) 부분만은 지금까지 남아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서해안에는 도서와 해안을 끼고 있는 지역에서 외적의 방어를 위해
고을성을 많이 축조하여 왔는데 교동읍성 이외에도 인근의 강화읍성, 충청남도의 해미읍성과
안흥성, 전라북도의 고창읍성, 전남 진도의 남도석성 등을 들 수 있습니다.
후면에서 바라다 본 교동읍성
교동읍성의 좌측 전경
교동 읍성의 우측전경
교동읍성안에는 민가가 들어차 있는......
교동향교로 향하는 길 (후면이 화개산으로 259.5m)
교동향교 전경
노룡암
대성전 앞의 은행나무
내삼문 전경
대성전
동무
서무
대성전 내부
대성전에서 내려다 본 교동향교
제기고
동재
서재
화개산 정상부에 바라다 보이는 정자각
교동에 산재된 비석들을 뫃아놓은 것으로 조선시대 이 곳 교동에서 선정을 펼친 목민관들의
비석들이겠지만 백성들의 가렴주구가 연상되는.....ㅎㅎ
화개사 전경
화개사 대웅전 전경
화개사는 고려시대 이래 줄곧 사격(寺格)을 유지해온 교동을 대표하는 전통 사찰입니다.
이절에서 목은 이색이 젊은 시절에 공부를 했다는 기록이 전해져 옵니다.
교동읍성 안에 있던 교동부 관청의 바로 북쪽, 화개산 남쪽 기슭에 자리한 화개사는
수백 년에 걸친 오랜 세월 동안 교동 주민들의 신앙생활의 터전이었습니다.
화개산 남쪽에 교동향교와 나란히 화개사가 자리하고 있는데 교동향교가 교동 주민의
교육 문화의 중심지라면, 화개사는 신앙 생활과 수행의 중심지 역할을 한 곳입니다.
교동향교와 더불어 화개사는 유구한 역사와 문화전통을 이어오고 있는 수행의 공간이고,
교화의 공간이며 주민들의 안식 공간입니다.
요사채
화개사에서 바라다 보는 석모도 전경
화개산 산행안내도
월선포에서 바라다 보는 교동대교
세월이 멈춰 버린 대룡리 구시가지 전경으로 이 곳은 6.25동란의 참화를 피하기 위하여
황해도 연백에서 아주 가까운 거리인 탓에 황해도의 많은 피난민들이 이 곳 교동으로 많이
피난을 나왔는데 피난민 일부가 이 곳 대룡리에 거주하면서 생활을 하던 곳이라
아직도 그 삶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고구지 전경
교동대교를 건너오자마자 우측 봉서리 쪽에 연산군이 위리안치된 유배지가 있었다고 하나
현재 그 곳에는 기념비석만 세워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곳 유배지가 정확한 위치라는 기록마져도 내려오지 않는 탓에
그 곳을 둘러 보기엔 큰 의미가 없어서 걍 패스하고 귀경을 합니다.ㅎ
주말 비가 온다는 예보에 집안에 그냥 있기엔 무료한 탓에
오늘 모처럼 강화도 교동행을 감행해 보았습니다.
교동도는 25년 전 낚시에 심취하였던 젊은 시절 주말만 되면 이 곳 교동도의 민박집에 머물면서
섬내에 논농사를 위하여 만들어 놓은 물꽝을 찾아다니던 낚시를 줄겼던 곳이라
섬내의 물이 있는 수로나 저수지등은 다 찾아 돌아 다녔던 곳이라서 오늘 처럼
관광을 목적으로 돌아 보기에는 처음인지라 조금 웃음이 나옵니다.
확실히 보는 관점이 다르면 보이는 것들도 다 다르게 보인다는 이야기가 실감이 납니다.
오늘 교동 향교를 방문해서 그 곳을 관리하시는 전대(향교의 웃어른)분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제가 이 곳 교동으로 낚시를 다닐 때 교동 서한리쪽에서 2년간 주말 민박을 하던 집주인
어르신이 이 곳 교동 향교의 전대를 지내셨기에 그 내외분의 근황을 여쭤보았더니
두 내외분 모두 돌아 가셨다고 하시더군요.
참 세월이 빠르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이 곳 교동에 난정지란 큰 저수지가 생겨 나면서 이 곳 교동도에 3~400 여개 되던 물꽝
(가물 때 논에 물을 되기 위하여 논 옆에 파 놓은 물 웅덩이로 큰 물꽝은 300평정도)들이 다
매립되어 농토로 변하게 되면서 이 곳 교동도에서 낚시를 떠나게 되었는데 ......
그 당시 이 곳 교동도로 주말 낚시를 오면 낚시꾼들의 선망의 대상인 월척을 제일 많이 잡았던 날이
하루 동안에 월척 16마리 였었다면 여러분들께서 이해를 하실 수가 있으런지 모르겠습니다.
암튼 오래 전에는 이 곳 교동도가 접적 지역인 탓에 고구지 외에는 낚시를 못하게 하였기에
어족자원이 잘 보존된 탓도 있었고 또 외지에서 온 낚시인들이 논두렁의 물꽝에서 월척이 나온다는
사실을 잘 몰랐기에 가능했던 이야기이겠지만.......
모처럼 오랜만에 다시 찾아 본 교동도에서
지나간 옛추억을 회상하다보니 이젠 저도 제법 나이가 많이 들었다는 셍각에
마음이 조금은 씁쓸했습니다.
'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전주 덕진공원의 초가을(2016.9.17) (0) | 2016.11.20 |
---|---|
죽녹원의 시가문화촌(2016.9.18) (0) | 2016.11.20 |
인천대공원 작은 오솔길 의 만추(2016.11.17) (0) | 2016.11.17 |
물안개 피어 오르는 괴산 문광지의 아름다운 수묵화(2016.11.12) (0) | 2016.11.13 |
예천 가오실공원과 용궁향교(2016.11.12) (0) | 2016.11.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