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옹성이면서도 아름다운 오사카성.1(2014.1.22)

2014. 2. 26. 16:33나의 이야기

 

 

 

극락교에서 바라다 본 오사카성

 

 

 

 

 

 

 

교토에서 오사카로 오면서 고속도로상에서 바라다 보이는 오사카 주변의 아파트들 

 

일본의 단독주택이나 아파트의 경우 거주하는 가옥 이외의 공간은 공동주거의 영역으로  간주하다는

개념이 강하여서 우리나라처럼 담장 안은 내 공간이라는 개념하고는 많은 차이가 있다고 합니다. 

 

바라다 보이는 아파트의 베란다를 보시면 우리나라와 확연히 다른 것들을 느끼시리라 봅니다.

우리나라라면 이런 베란다에 동간 벽이나 창호를 달아 내 공간으로 여기지만,

일본에서의 이런 공간은 공동의 공간으로 개인에게는 빨래를 널 정도로 활용하는 것,

 이외에는 화재시나 위험요소 발생시 대피통로로 활용하도록 하고 있답니다.

 

 따라서 아파트에서 내 주택의 공간은 안쪽 창문안의 실 건평이 내집의 공간이라고 보시는게 정확하답니다. 

 단독주택의 경우에도 담장 안이 내 공간이라는 개념보다는 가옥안 만이 내 집의 정확한 공간으로

생각하며 정원은 이웃과 서로 바라보거나 더불어 살아 가는 공간의 개념으로 살기에 

 정원에 거치장스런 시설물이나 이웃에게 협오를 주는 것들을 하지 않고 산다고 합니다. 

 

 

 

 

 

 

 

좌측 오사카역사 박물관과 뒷 편에 있는 NHK  

 

 

 

 

 

오사카성 

 

 

 

 

 

 

 

 오사카성의 1차 해자 미나미소토보리

 

 

 

 

 

 

 오사카성의 1차 해자인 미나미소토보리

 

 

 

 

 

 

 

 

 

 

 

 

 

오사카성 안내도 

 

 

이 지도로 보시면 제가 오사카성의 일루미네이션을 보러 들어 가던 대수간(오테몬)과는

 반대편으로 들어 가도록 되어 있음을 알수 있습니다.

 

따라서 오사카성 관람 이외의 지역인 1차 해자 앞 소토보리 앞 오사카영빈관 안쪽 성내에서 

일루미네이션축제를 했다는 이야기이지요.

 

 

 

 

 

 

 

 

 

 

오사카성 안내도 

 

 

 

 

 

  우치보리 2차 해자 전경

 

 

 

 

 

 

 

 

 풍국신사(토요쿠니신사)

 

 

 

 

 

 

 

 

사쿠라몬 

 

 

 

 

 

 

 

 

 

 타코이시 안내문

 

108톤이나 되는 거대 화강암으로 출입문 앞 성벽을 만들어 적의 침공에 대비하게 하였으니

오사카성을 만들었을 때에 동원된 인력과 경비, 그 당시 풍신수길(토요토미 히데요시)의

 권력이 어떠했는지를 짐작하게 합니다.

 

 

 

 

 

 사쿠라몬

 

 

 

 

 

 타코이시

 

 

 

 

 

 

 

 

오사카시립박물관 

 

제 2차 세계대전 때에는 일본군사령부 건물로 이용되던 건물로

 제2차 세계대전 말에는 오사카성 같은 문화유산은 보존해야하는 가치 때문에 

미국이 폭격을 하지 않았기에 건물은 온전하게 살아 남았지만,

이러한 문화유산 근처에 일본군사령부를 건축하여 폭격을 피하는 

일본의 교활한 전쟁 수법을 말해주는 상징적인 건물이기도 하답니다.

 

 

 

 

 

 

 

 타임캡슐

 

 

 

 

 

 

 

오사카성 천수각(텐슈카큐)

 

최초로 일본을 통일한 토요토미히데요시(풍신수길)가 1581년에 세운 성으로

 15년이란 막대한 시간과 엄청난 인력을 동원하여 완공시킨 성의 면적은

 약 100만 ㎡로  축구장 135개의 넓이와 맞먹는다고 합니다.

 

병풍처럼 겹겹이 둘러싸인 깊은 해자와 깍아지른듯한 성벽,그리고 삼엄한 경계가 펼쳐졌을

 여러 개의 성문과 망루를 지나면 8층 높이의 위풍당당한 천수각(텐슈카큐)이 바라다 보입니다. 

천수각(텐슈카큐)내부에는 오사카성의 400년 역사를 보여주는 자료가 전시되어 있으며

꼭대기에는 오사카성 일대를 조망할 수 있도록 전망대로 되어 있답니다.

 

 

 

 

그럼 오사카성의 건립 배경에 대하여 이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일본역사에서 센고큐 시대라고 부르는 시기에 세 사람의 영웅호걸이 나타나는데

오다 노부나가,토요토미 히데요시,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말합니다.

역사적으로 이 세 사람은 지금도 일본 사람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인물들이랍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우리나라 영웅은 대게 같은 답이 나오지만,

 일본인들의 최고 영웅은 사람마다 답이 다르다고 합니다.

 

풍운아 오다 노부나가는 파괴의 영웅으로, 기존 일본이라는 집을 허물고

 일본 통일이라는 집터를 마련한 군인이며 전략가형이라면,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집터를 딱은 인물로 전시 총리 재목이었던 데 반해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일본 통일이라는 집을 완성한 인물로 평화시기의 총리감으로 비유가 된답니다.

 

불같은 성격의 오다,지략에 능한 도요토미,대기만성형의 도쿠가와 

 이 세 사람만큼 일본 역사에서 많은 이야기를 남긴 사람도 드물답니다.   

 

이 세 사람의 성격을 보여주는 이야기가 있는데

손안에 새가 울지 않을 때 이들은 어떻게 했을까요란 답에

 

다혈질에다가 성격이 급한 오다 노부나가는 즉시 죽여 버리고,

 울지 않는 새는 가치가 없다고 하였을 것이고,

 

꾀가 많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어떻게든 새가 울게 만들고,

느긋한 성격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새가 울 때 까지 기다렸을 거라고 합니다.

 

 죽은 나이도 그들 중 성질이 급한 순서대로 였는데,

 오다 노부나가48세,도요토미 히데요시61세,도쿠가와 이에야스73세라고 합니다.  

  

  일본 통일과정에 이 세 사람의 행동을 묘사한 유명한 글이 있는데

이 말을 옮기면 오다가 쌀을 찧고 하시바가 반죽한 천하라는 떡,

  힘 안 들이고 먹은 것은 도쿠가와  

 

이 세 사람 가운데 가장 드라마 같은 삶을 산 풍운아는 바로 오다 노부나가로

 만일 그가 통일의 터를 닦지 않았다면 일본의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 겁니다.

전형적인 센코쿠 다이묘의 아들로 태어 난 그는 시대를 앞서는 안목과 남들과 다른

기발한 아이디어를 타고 났으며 천하를 거머지려는 대야망을 가진 사람이었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남다르게 튀는 인물로 사람들의 눈을 끌었다고하는데,

  전쟁에서도 남과 다른 전술과 전략으로 적의 허점을 찔렀다고 합니다.

 

적장의 목을 베어 온 장수보다 정확한 적군의 정보를 가져온 장수에게 더 큰 상을 주는가 하면

1543년 포루투칼 상인들이 전해준 철포(조총: 당시의 조총은 장전을 해서 발사하는데 많은 시간이 소요 됨)의

 중요성을 그 누구보다도 먼저 꿰뚫어 보고 한번 쏘고 다시 장전하는 문제점을

세 조로 나누어 3열로 배치하여 한 조가 사격하는 동안 두 조는 장전을 하게하고

연속해서 교대로 사격을 하게 함으로써 시차를 두지 않고 연속 사격하는 전술로

 적군의 세 배나 되는 총탄 세례를 퍼부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조직적 총격전은 전쟁의 양상을 완전히 바꿔 놓았고,

병사의 수가 열 배나 되는 적을 무찌르는 등 저항 세력을 하나,둘 정복해 나가게 되었답니다. 

또 오다노부나가는 농민이 병사가 아닌 용병들로 군대를 조직하여 

다른 적들이 농민들로 군대를  조직한 것과 달리 평소 전투가 없을 때에는 

농사를 지어야 했던 적들과 달리 훈련에 열중 할수가 있어서

전투력을 키울 수가 있었다고 합니다.  

 

유력한 다이묘들을 차례로 굴복시킨 오다 노부나가는 1573년도 교토에 입성하여 

쇼군을 폐위시키고 교토에서 추방함으로서 무로마치 바쿠후는 236년만에 망하고 말았습니다.

 

일본 통일을 눈앞에 둔 1582년 오다노부나가는 교토에 있는 혼노지(본능사)란 절에 주둔했는데

 그의 주력부대가 원정길에 오른 틈을 타 아케치 미쓰히데 란 부하장수가 배반하여

 혼노지를 공격해서 깊은 밤 기습을 당한 오다 노부나가는 사력을 다해 싸웠지만,

  수적인 열세로 당할 수가 없었는지라 스스로 목숨을 꿇음으로서

파란만장한 생를 마감하게 됩니다.

그래서 일본말에 이런 말이 있다고 합니다.

 "적은 바로 혼노지에 있다".

즉 적은 밖이 아닌 내부에 있다는 의미이지요.

 

오다노부나가의 죽음으로 권력의 자리에 떠오른 인물이 풍신수길(도요토미 히데요시)로

노부나가의 부관 출신으로 성분이 아주 낮은"원숭이"란 별명을 가진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젊어서는 바늘장사까지 해본 최하급 부시출신으로서 우리나라와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원흉으로 한 일간의 국민감정을 결정적으로 악화 시킨 장본인이기도 합니다.

 

추운 겨울 신발을 가슴에 품어 오다노 노부나가를 감격시켰다는 유명한 일화도 있으며,

노부나가가 죽자 도요토미는 즉시 출동하여 주군을 배신한 아케치미쓰히데를 죽이고

 계속하여 노부나가와 경쟁하던 세력을 차례로 굴복시킴으로써

일약 노부나가가 누렸던 권력을 이어 받게 되었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사카성을 건축해 권위를 과시하는가 하면

 당시 최대의 권력자였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싸움을 할 것인가

강화를 할 것인가에 대하여 담판을 짖게 된답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꼬리를 내리고 가마쿠라의 다이묘를 원했으나 가마쿠라가 군사적 요충지이고,

 최초의 부시정권 바쿠후가 선 곳이라서 그 곳에 가서 쇼군을 자처하게 될까 보아서

 세력이 약한 에도의 다이묘로 봉합니다.

 

경쟁자였던 도쿠가와 이에야스 마져 에도 지방으로 몰아 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허수아비 덴노 조정의 실권자인 간바쿠에 오른 다음 태정대신까지 겸하게 됨으로써

 명실 상부한 일본 최고 권력자가 됩니다.

 

이 때 까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성은 하시바였다고 하는데

이 때 도요토미란 성을 하사 받았다고 합니다.

실질적인 일본의 통치자가된 그는 전국에 정전명령을 내리고

1590년일본은 비로소 통일을 이루게 되지요.

100여년 가깝게 전란이 계속되던 센코쿠 시대가 막을 내리고 대대적인 정비작업이 시작되는데

 전국의 토지와 수확량조사에 착수하여 고쿠다카(생산되는 모든 농작물과 특산물을 쌀로 환산)를 실시하고,

 다이묘들에게 고쿠다카에 해당하는 군역의 부담하게 하고, 농민들에겐 토지소유권을 인정하는 대신

 고쿠다카에 해당하는 연공(세금)을 내게 하였답니다.

 

또 가타나가리(칼 사냥)를 실시하여 농민들이 무기를 몰수하고,

 히토바라이령을 내려 부시(무사)가 조닌(상,공업인)이 되는 것을 금지하고

 농민이 장사를 못하도록 금지를 하여 계급 질서가 이루워지도록 하여

군인과 농민을 분리하여 권력의 기반을 확고하게 하는

 사농공상의 신분제도를 성립하게 된답니다.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을 침략하게 되는데, 침략 이유는  일본 통일과 더불어 공을 세운

 다이묘들에게 땅을 나누어주어야 했는데 일본의 땅만으로는 부족했기에 우리나라를 침략하여

다이묘들에게 나눠주려는게 1차적인 목표였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조선에서 들어오는 승전보에 과대망상에 젖어 베이징을 일본 수도로 정해

덴노를 보내서 그 주변10여개국을 덴노 직할령으로 하고, 조카 도요토미 히데쓰쿠를

 명나라의 간바쿠로 삼아 베이징 주변 100여개국을 다스리게 하고,

 조선의 국왕은 일본에 데려와 볼모로 삼을 것과 인도 정벌 까지 꿈을 가지지만,

 이순신장군의 대활약과 명나라의 참전으로 히데요시의 꿈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답니다. 

 

1598년9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병으로 죽자 그 해 10월 조선의 일본군에게

총퇴각령이 내려져 11월19일에 7년에 걸친 왜란은 막을 내리게 됩니다.  

 

다음 글에서 오사카성의 나머지 부분에 대하여 다시 이야기해드릴 생각입니다.  

 

 

 

 

 

 

 

 오사카시립박물관

 

 

 

 

 

 

 

오사카성은 무료이지만 천수각은 유료라서 출입구매표소에서 표를 사서

텐슈카쿠(천수각)으로 계단을 통하여 올라가야 합니다.

 

 

 

 

 

 

 오사카성 천수각에 설치된 우물

 

이 우물에 도요토미히데요시가 죽은 뒤에 벌어진 오사카성 전투에서 아들이 싸움에 지게되자

 귀중품을 이 곳에 숨겼다는 이야기가 전해어오지만  확인하기엔......ㅎ

 

 

 

 

 

 

오사카성 천수각 입구에 설치된 대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