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 6. 12:00ㆍ나의 이야기
La Real Cocina
스페인의 첫 여정은 아부다비 공항에서 새벽 03:10 출발하여 7시간 정도 걸려 마드리드 시간으로
08:05에 도착 마드리드 왕궁 근처 스페인 광장 지하 주차장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밤새 기나긴 시간을 비행기 안에서 시차가 적용되기도 전에 또 밤을 거의 새우다 시피해서 도착한
스페인이다 보니 피곤이 몰려왔지만 그래도 또 새로운 마음으로 오늘 여정을 시작해 봅니다.
펠리페 4세 동상(Monumento a Felipe IV)의 후면과 오페라 하우스 왕립극장 전경
펠리페 4세(Felipe IV)의 통치기는 스페인이 세계적인 강국으로서의
지위를 점차 상실해가던 시기였었습니다.
그의 통치 말기에 스페인의 국력은 전쟁에서의 패배와 사회적·경제적 불안으로
약화해 2 등국으로 전락했습니다.
한편 펠리페는 시인이기도 했으며 예술의 후원자로 화가
벨라스케스의 친구이며 후원자였습니다.
벨라스케스는 펠리페와 왕실 인물들의 초상화를 많이 그렸습니다.
1621년 부왕인 펠리페 3세를 계승했으며 재위기간 초기의 22년 동안 펠리페의 총리는 올리바레스
공작이었는데, 그는 1609년에 체결된 12년 휴전협정이 끝나는 시점을 맞아 30년 전쟁을 네덜란드와의
전쟁을 다시 시작하는 기회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신성 로마 제국의 합스부르크 왕조와 긴밀한 동맹을
맺어 유럽에서 스페인의 주도권을 회복하려는 야심에 찬 시도를 위한 기회로 이용하려 했습니다.
몇 번의 승리는 있었지만 1635년 프랑스가 전쟁을 선포하고 1640년 이후로 카탈루냐와 포르투갈의
분리주의자들이 반란을 일으켜 스페인이 거둔 초기 승리를 상쇄시켰습니다.
펠리페는 1643년 올리바레스를 해임하고 대신 돈 루이스 멘데스 드 아로를 임명했고 그는
1661년 죽을 때까지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펠리페 4세는 첫 아내인 이사벨과 사별한 후 누이의 딸, 즉 조카인
오스트리아의 여왕 마리아나와 재혼했습니다.
원래 마리아나는 펠리페 4세의 아들과 ‘4촌 결혼’을 계획했으나, 전처와 사별한 삼촌과의 결혼을
택하게 된 것으로 그녀는 〈시녀들〉의 희미한 거울 속에 왕과 함께 등장합니다.
프라도 미술관에 벨라스케스가 그린 〈왕비의 초상〉이 전시되어 있는데, 화려하기 그지없는
그녀의 옷과 머리 장식, 커튼 등에서 마치 마감이 덜 된 듯 붓 자국을 강하게 남기는 벨라스케스
다운 대담함이 보이는 작품으로 보실 수가 있습니다.
〈시녀들〉의 공주를 그린 〈도냐 마리아 마르가리타 공주〉는 이 둘 사이에서 태어난 딸을 그린 작품으로
그녀는 열다섯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자 오스트리아의 왕인 레오폴드 1세와
결혼했습니다.
족보상으로 남편은 그녀의 외삼촌으로 지속되는 근친혼의 결과 약골인 그녀는
스물두 살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림은 벨라스케스가 죽던 해에 그린 미완성 작품을 그의 사위인 후안 바우티스타
마르티네스 델 마소가 마감했다고 합니다.
사실 이곳을 관람하면서 가진 가장 큰 의문은 관람 동선 때문이었는데 지하주차장을 기점으로
왔다 갔다를 반복하는 스페인 현지 가이드의 안내가 영 미덥지가 못했습니다.
가급적이면 순차적으로 길 안내를 해야 했었는데 타성에 젖어서인지
시간만 낭비하는 안내 같아서.... 쩝!
마드리드 궁전 사바티니 정원 나뭇가지 위에 앉은 공작새
마드리드 왕궁 전경
마드리드 왕궁(Madrid Palacio Real)은 스페인에서 가장 호화스러운 왕궁으로 원래 9세기에
세워진 무슬림의 요새가 있던 자리로, 무슬림이 물러난 후에는 합스부르크 왕가가 요새를 궁전으로
사용했으나 1734년 크리스마스 밤에 대형 화재로 소실되었습니다.
프랑스 부르봉 왕조 출신으로 베르사유 궁전에서 태어나고 자란 펠리페 5세가 이 자리에 베르사유
궁전과 비슷한 왕궁을 건립하라는 명을 내린 후 이탈리아 건축가였던 필리포 유바라(Filippo Juvara)가
설계를 끝내고 착공 전 사망하자 그의 제자였던 사네티가 승계받아 사바티니, 로드리게스와 함께
1764년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완공하였습니다.
스페인 왕의 공식 거처이지만 현재는 공식 행사에만
사용되고 실제 거주하지는 않습니다.
사방 150m의 왕궁 안에는 2,800개의 방이 있는데 그중
50개의 방만 일반에 공개하고 있습니다.
특히 베르사유 궁전에서 가장 유명한 거울의 방을 모방해서 만든 ‘옥좌의 방’, 건축가 유바라가 설계한
로코코 양식의 걸작으로 정교함과 화려함이 더해져 호화스러움의 극치를 보여 주는 ‘가스파리니 방’,
벽 전체가 황금 비단으로 꾸며져 있는 ‘황금의 방’, 145명이 한꺼번에 앉아 식사를 할 수 있는
대형 식탁이 자리한 ‘연회장’에서 스페인의 화려했던 궁중 생활을 엿볼 수 있다고 합니다.
또한 왕궁 안의 아르메니아 광장에 있는 약물 박물관도 왕궁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코스라고 합니다만 이번 여행에서는 외관만 보아야 하니.... 쩝
마드리드 왕궁 전면에 있는 사바티니 정원(Jardines de Sabatini) 입구 전경
세르반테스 기념동상(Monumento a Cervantes)
미겔 데 세르반테스 사아베드라(스페인어: Miguel de Cervantes Saavedra, 문화어: 미겔 데 쎄르반떼스 싸아베드라,1547년 9월 29일 ~ 1616년 4월 23일)는 스페인의 소설가, 시인, 극작가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서 첫 근대 소설이라고 평가받는 《돈 키호테》의 작가로 유명한데 그의 작품은 문학 전체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명작에 속한다고 언급되기도 합니다.
"지혜의 왕자"(el Príncipe de los Ingenios)라는 별명이 있습니다.
돈키호테와 로시난테, 산초와 산초당나귀
돈키호테(Don Quixote) 세르반테스의 장편소설이면서 그 소설의 주인공 이름으로
1605년에 간행되고 속편은 1615년에 간행되었습니다.
주인공 돈키호테가 기사(騎士) 이야기책을 탐독하다가 망상에 빠져, 여윈 말 로시난테를 타고 산초 판자와
더불어 기사 수업(騎士修業)을 다니면서 기지와 풍자를 곁들인 여러 가지 일과 모험을 한다는 줄거리로
오늘날 ‘돈키호테’라는 말은 소설의 주인공 돈키호테에 빗대어 현실을 무시한 공상적 이상가를 가리키는
말로 쓰입니다.
또한 그런 인물의 유형을 돈키호테형이라고 부르며,
반대되는 유형을 햄릿형이라고 부릅니다.
근대소설의 선구가 되었으며 문장은 스페인의 사실적 문체의 최고로 평가됩니다.
단순한 풍자소설이 아니라 진정으로 '인간’을 그린 최초·
최고의 소설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라만차의 비범한 이달고 돈 키호테, ( El ingenioso hidalgo Don Quixote de la Mancha)는
2부작(제1부 1605, 제2부 1615)으로 출판되었으며, 서구 문학에서 가장 널리 읽히는
고전 중 하나입니다.
당시 유행하던 중세 기사 이야기에 대한 희극적 풍자로 착상된 이 소설은 기사 이야기를 읽고 환상에
빠진 나이 든 기사가 현세주의적인 종자 산초 판사와 함께 늙어빠진 말 로시난테를 타고 모험을 찾아
여행하는 도중에 일어나는 사건들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출판 즉시 널리 번역되어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그 인기는 식을 줄 몰랐습니다.
세르반테스 기념동상(Monumento a Cervantes)을 배경으로
알무데나 대성당(Catedral de Santa María la Real de la Almudena)
스페인 왕실의 주 성당이자 마드리드 대성당으로 왕궁 바로 옆에 자리하고 있는 알무데나 대성당은
스페인이나 유럽의 다른 대성당에 비해 역사도 길지 않고 예술적인 완성도도 크게 주목받지 못하는
편입니다.
이곳은 마드리드의 수호 성모 알무데나를 기리는 성당인데, 알무데나는 아랍어로 성벽을 뜻하는
‘알무다이나’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마드리드를 점령한 무슬림들이 파괴할까 봐 성벽에 숨겨 놓았던
성모상이 300년 후에 발견되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성당은 1879년 착공되었지만 정치적인 이유와 내전 등의 이유로 100년 넘게 걸려
1993년에 와서야 완공되었습니다.
산타 마리아 라 레알 데 라 알무데나 대성당(Catedral de Santa María la Real de la Almudena de Madrid)은
스페인 마드리드에 있는 로마카토맄교회의 마드리드 대교구 대성당으로 1993년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하여 축성되었습니다.
1561년 스페인이 톨레도에서 마드리드로 천도하였을 때, 스페인 교회의 중심지는 여전히 톨레도에
머물러 있었고, 새 수도인 마드리드에는 모든 성당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대성당이 없었습니다.
이후 마드리드에 알무데나의 성모를 위한 대성당을 짓자는 이야기는 빠르게는 16세기부터
논의되었지만, 본격적으로 건축 작업에 나선 것은 1879년에 가서였습니다.
이는 16세기 당시 스페인이 아메리카 대륙에 개척지를 건설하고 해군력을 증강시키는 데에 대부분의
예산을 사용했기 때문에, 스페인 정부가 대성당보다는 제국을 유지하고 확장시키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결정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스페인에도 수백 년도 더 된 성당들과 교회들이 수없이 많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수도인 마드리드에는 몇 백 년간 제대로 된 대성당이 없었습니다.
대성당은 1085년 알폰소 6세가 마드리드를 재점령했을 때 파괴되었던 중세 시대의 이슬람
모스크가 있던 자리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대성당의 건설 책임자였던 프란시스코 데 크바스 후작은 네오고딕 양식을
염두에 두고 대성당을 설계하였습니다.
그러나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면서 대성당의 건축은 전면 중단되었으며,
공사 현장은 1950년까지 그대로 방치되었습니다.
1950년에 새로 건설의 책임자를 맡게 된 페르난도 추에카 고이티 아는 크바스 후작의 계획과
설계도면을 바로크 양식으로 전면 변경하였는데, 그 이유는 대성당이 지어질 장소 맞은편에
있는 마드리드 왕궁과 잘 조화를 이루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대성당은 1993년에 완공된 후, 스페인을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축성되었습니다.
2004년 5월 22일 스페인의 제1왕위 계승자인 아스투리아스 공 펠리페와
레티시아 오르티스의 혼배미사가 이곳 대성당에서 거행되었습니다.
대성당 내부는 독특한 현대식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부속 경당과 조각상들은 네오고딕 양식에서부터
팝아트 데코 양식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다양한 양식으로 꾸며져 있습니다.
네오 로마네스크 양식의 지하실에는 16세기의 것으로 보이는
알무데나의 성모상이 모셔져 있습니다.
최근에는 마드리드 시의 발굴 작업으로 인하여 옛 무어 양식의 중세 시대
도시 성벽의 잔해들이 발굴되었습니다.
2004년 4월 28일 마드리드 대교구장 안토니오 마리아 로우코 발레라 추기경은 네오까떼꾸메나 또 의
창시자인 키코 아르궤요가 대성당 내부에 그린 성화를 축복하였습니다.
아르메니아 광장(Plaza de la Armería)과 마드리드 왕궁
스페인 국기 한가운데 프랑스의 부르봉 왕가의 문양인 백합꽃 세 송이가 있는 이유
합스 부르고 왕가
1512년 나바라까지 합병하면서 스페인의 이베리아 반도 통일이 완료됩니다.
페르난도 2세와 이사벨 1세 사이에는 3명의 자녀들이 있었는데 장남과 장녀가
모두 사망하여 차녀인 후아나가 스페인의 왕위를 차지하게 됩니다.
후아나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후계자인 필리프와 결혼을 하고 후아나의 아들인
카를로스 1세가 스페인 왕위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겸임하게 됩니다.
한편, 카를로스 1세의 동생인 페르디난트 1세는 오스트리아 왕가를 상속받습니다.
이때부터 합스부르크 가문은 분가되어 스페인 합스 부르고 가문과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은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됩니다.
합스 부르고 왕가 대가 끊기다
대를 이어나가던 압스 부르고 왕가는 결국 카를로스 2세가 후계를
남기지 못하고 사망하여, 대가 끊깁니다.
카를로스 2세의 아버지 펠리페 4세에게는 누나인 앤 도트리슈와
동생인 마리아 아나가 있었습니다.
누나는 프랑스의 왕 루이 13세에게 시집을 가서 루이 14세를 낳았고 루이 14세는 카를로스 2세의
이복동생 마리아 테레사와 결혼하여 그랑 도팽 루이를 낳았습니다.
한편, 동생인 마리아 아나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에게 시집을
가서 레오폴트 1세를 낳았습니다.
즉, 카를로스 2세가 사망하여 합스 부르고 왕가의 대가 끊긴 상황에서, 스페인 왕위를
주장할 세력은 크게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이었던 것입니다.
어느 한쪽을 선택하든 유럽의 균형이 깨지기 때문에 다른 왕국들은 이 두 세력에 스페인왕위가
넘어가는 것을 반대하였고, 카를로스 2세 또한 이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바이에른 선제후
요제프 페르디난트에게 왕위 계승을 선언하였습니다.
바이에른 선제후 요제프 페르디난트는 레오폴드 1세의 외손자였기 때문에
합스부르크 왕가도 아니고 부르봉 왕가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1699년 페르디난트는 천연두로 사망합니다.
카를로스 2세는 부르봉왕가냐 합스부르크 왕가냐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부르봉 왕가를 택하다
스페인 내부에서는 부르봉과 합스부르크 사이에서 의견 대립이 심하였으나 결국
왕세자 루이의 차남 필리프를 후계자로 선언합니다.(펠리페 5세)
이에 신성로마제국은 반발하고, 전쟁이 발생합니다.
그러나 전쟁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카를 대공의 형인 요제프 1세가 사망하여
카를 대공이 카를 6세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됩니다.
따라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스페인 왕위를 차지하는 것보다 프랑스 왕가의 차남이 스페인
왕가를 차지하는 것이 덜 위협적이었으므로, 위트레흐트 조약에서 필리프 공이 스페인 왕위를
차지하기로 결정됩니다.
프랑스에서 시작된 부르봉 왕가가 정작 프랑스에서는 왕위를 유지하지 못하고 있는데,
스페인에서는 아직 왕위를 유지한다는 점이 역사의 아이러니 같아 보였습니다.
전쟁 결과
부르봉 왕가의 차남인 필리프가 스페인의 왕이 된 후 스페인은
프랑스의 부르봉 왕가가 지배하게 됩니다.
하지만 스페인은 유럽의 대부분의 영토를 상실합니다.
이때, 영국에게 지브롤터를 상실하는데, 지브롤터는 아직까지도
돌려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드리드 왕궁 (자료화면)
마드리드 왕궁 내부는 사진 촬영불가라고 하니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과 비교한다는 것은
어렵겠지만 부르봉 왕조 루이 14세 때의 짐이 곧 국가라는 왕권 절대기 시절과는 비교가
안되리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https://kyh0221.tistory.com/1643#none
※ 참고 자료로 2013년도에 돌아보았던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의 티스토리 자료와 비교를
해 보시면 이해가 가시리란 생각입니다.
Plaza de la Armeria
알무데나 대성당 북쪽 전경(Catedral de Santa María la Real de la Almudena)
대성당 내부에 모셔져 있는 성모상(자료화면)
북쪽 파사드 전경(Monumento a la Virgen de la Almude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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