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해전사 중 패전의 아픈 역사를 지닌 칠천량 해전의 무대 칠천량 해전공원(거제 한 달 살기 2022.10.10)

2022. 10. 15. 12:02나의 이야기

 

칠천량 해전공원 초입 주차장 앞 쉼터 전경으로 칠천량 해전공원 전시관이 이 쉼터 위에 있는 것은

착오하실 수가 있는데 실제 전시관은 이 쉼터를 낀 도로를 지나쳐 오토 캠핑장 우측 언덕길로

올라가셔야 합니다. 

 

 

칠천량 해전공원 전시관 안내도(입장료 무료)

 

 

칠천량 해전 공원 출입구 초입에 무료 주차장이 있지만 전시관 아래쪽 언덕 쪽에도

주차장이 있으니 이용하실 때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다만 상부 쪽 주차장은 혼잡하실 때에는  면적이 적어 이용하시기가

힘들다는 점 기억하셨으면 합니다. 

 

 

쇠로 만든 방주 "표류하는 아고라" (2022.10.1~11.20) 파도 전시를 하고 있는 선박

 

관람 시간대 화~일 10:00~18:00 사전예약(월요일 휴무/우천 시 휴관)

 

예약: 네이버에서 파도 2 검색

 

 

물결 출렁이는 바다는 인간의 것이다. 

 

이영준

 

물결 출렁이는 바다는 인간의 것이다.

 

그렇다고 인간이 바다를 소유하거나 장악한 것은 아니다. 인간이 접근할 수 있는 만큼,

해신이 허용하는 만큼의 바다에 인간의 장치를 갖다 대어 나름 활용할 뿐이다.

 

그 장치란 항만과 선박, 그것들을 운용하는 체계 같은 것들이다.

 

사회적 기업 섬도는 한 반도의 동남권에 있는 부산 울산 경남 마산 등 국가관리 무역항 세 곳을

돌며 인간이 그런 장치의 힘을 빌어 바다에 기대어 살아가는 모습을 기록했다.

 

쇠로 만든 방주 표류하는 아고라는 그 결과를 보여주는 전아라고 합니다.

 

그러나 오늘은 아쉽게도 휴관인지라......ㅎ

 

 

칠천량 해전공원 상부 주차장 앞 언덕에서 바라다본 옥계항과 씨릉섬 인도교 전경

 

 

칠천도 옥계항과 씨릉섬을 연결 공사하고 있는씨릉섬 출렁다리( 인도교) 전경으로

내년에 준공 예정이라고 합니다.

 

 

칠천량 해전 공원 전시관 전경

 

칠천량 해전공원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의 최대 패전으로 기록된

칠천량 해전의 의미를 되새기는 기념공원입니다.

 

칠천량 해전은 1597년 7월 원균의 지휘 아래 조선 수군이 도도 다카토라 등이 지휘하는 왜군과

전투를 벌였지만 전함 180척 중 150척이 침몰하면서 1만 명의 병사가 숨진 조선 수군 최대의

패전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조선 수군들 모형

 

 

칠천량 해전공원 전망대에서 바라다보는 칠천도 해변 

 

 

칠천도 해전공원 전망대 전경

 

칠천도 명칭의 유래는 섬에 7개의 강이 있어 칠천도라 하며 거제의 크고 작은

66개 섬 가운데 거제도 다음으로 큰 섬이 칠천도입니다.

 

거제도가 거제대교의 개통으로 육지와 한 몸이 되었듯이, 칠천도 역시 연륙교의

개통으로 ‘섬이 아닌 섬’이 되었습니다.

 

섬 주변으로 해안도로가 잘 건설되어 있어 도보와 자전거

하이킹족들에게 인기 좋은 장소입니다.

 

또한 칠천도는 역사적 교훈이 살아 숨 쉬는 섬으로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1597년 원균이 일본 수군에게

처절하게 패한 곳인데 여기서 살아남은 12척의 군선들을 이끌고 진도로 물러간 이순신 장군은

명량해전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안타까운 역사를 간직한 이곳엔 수군의 명복을 기리는

칠천량 해전공원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칠천량해전공원 전시관 전경

 

 

전시관 내부 전시물 전경

 

 

칠천량 해전(漆川梁海戰)은 임진왜란·정유재란 가운데

조선 수군이 유일하게 패배한 해전입니다.

 

임진왜란 중 명나라와의 화의가 결렬되자, 일본은

1597년 1월 다시 조선을 침범했습니다.

 

일본은 지난번에 조선 침범이 실패한 것은 바다를 제패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판단해

먼저 수군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을 제거하려는 이간책을 꾸몄습니다.

 

당시 조정에서는 중신들이 당쟁에 휘말려 이순신을 하옥하고 원균을 수군통제사로 임명한 상태로

일본군은 조선 수군을 부산 근해로 유인해 섬멸하려고 일본의 이중첩자인 요시라(要時羅)를

시켜 유혹했습니다.

 

이에 도원수 권율(權慄)은 도체찰사 이원익(李元翼)과 상의해 원균에게 출전 명령을 내렸고

원균은 무모하게 출전해 보성군수 안홍국(安弘國) 등을 잃고 되돌아왔습니다.

 

그리고 한산도의 본영(本營)에 앉아서 경상 우수사 배설(裵楔)이

웅천(熊川)을 급습하도록 하였습니다.

 

배설이 전선(戰船) 수십 척을 잃고 패하자, 권율은 이에 대한 책임을 물어

원균을 태형(笞刑)에 처한 뒤 다시 출전하라고 명하였습니다.

 

원균은 부산의 적 본진(本陣)을 급습하려고 삼도 수군 160여 척을 이끌고 한산도를 출발하여

7월 14일 원균은 부산 근해에 이르러, 이 사실을 미리 탐지한 적들의 교란작전에 말려들어

고전하였습니다.

 

더욱이 되돌아오던 중 가덕도에서 복병한 적의 기습을 받아 400여 명을 잃었고 원균이 칠천량

(지금의 거제시 하청면)으로 이동하여 무방비 휴식 상태에 있을 때 적은 조선 수군을 기습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도도(藤堂高虎)·와키사카(脇坂安治)·가토(加藤嘉明) 등 수군 장수들이 7월 14일 거제도

북쪽으로 이동하여 15일 달밤을 이용해 일제히 수륙양면 기습작전을 개시하였습니다.

 

이에 당황한 원균과 여러 장수들은 응전했으나 적을 당해낼 수 없어

대부분의 전선들이 불타고 부서졌습니다.

 

전라 우수사 이억기(李億祺)와 충청수사 최호(崔湖) 등 수군 장수들이 전사하였으며 원균도

선전관 김식(金軾)과 함께 육지로 탈출하였으나 원균은 일본군의 추격을 받아 전사하였습니다.

 

경상 우수사 배설만이 12척의 전선을 이끌고 남해 쪽으로

후퇴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이로써 삼도 수군은 일시에 무너지고 적군은 남해 일원의 제해권을

장악해 서해로 진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후 우키타(宇喜多秀家)·고니시(小西行長)·모리(毛利秀元) 등은 쉽게 남원 및 진주 등지로 침범할 수

있게 되었는데 조정에서는 7월 21일 원균과 함께 탈출하다가 원균은 죽고 겨우 살아 나온 김식에게서

패전 보고를 듣고 크게 놀라 백의종군(白衣從軍)하고 있던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해 수군을 수습하게 하였습니다.

 

 

원균도 이 싸움이 조선에게 불리하고 참패할 것을 우려했지만 조정의 무리한 요구로 어쩔 수 없이

전투를 감행할 수밖에 없었는데 원래 이순신이 조선 수군을 승리로 이끌었던 이유는 적진에

들어가서 싸우는 방식이 아니라 적선을 자기 진영에 유인해서 함정에 빠뜨리는 방식으로

일본 수군의 전력을 조금씩 상대하는 전투 방식이었습니다.

 

사실상 이런 해전 방식은 조선 수군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전략으로 1,000여 척에

달하는 적진에 뛰어드는 것이 자살 행위임을 원균이 모를 리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대부분의 함선이 소실되고, 남해안의 제해권이 왜군 쪽으로 넘어가게 되는 바람에

왜 육군의 지원이 원활하게 진행되어 전라도까지 왜군이 침입하였습니다.

 

이때 뺏긴 남해안의 제해권은 이순신이 명량 해전에서

승리할 때까지 왜군에게 있었습니다.

 

 

해양사 전시관 방주 전면 전경

 

 

방주 측면 전경

 

 

전시관 후면의 해안산책로

 

 

칠천량 해전 전시관 후면 맹종죽 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