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민공 탁영 김일손을 모신 함양 청계서원(진주 두달살기 2021.6.11)

2021. 6. 21. 09:35나의 이야기

 

청계 서원의 홍남문(홍살문)

 

남계서원에서 지근거리이다보니 가려져 빛을 잃고 있는 청계서원이지만,

이 서원을 들려야만 하는 중요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 것은 이 서원이 종친이 모셔진 서원중에 하나이기도 하였지만 드라마 연속극의

많은 배경이 되었던 무오사화와 연관이 있는 중요한 서원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56호

 

 

인접한 남계서원은 남계천 앞에 세웠다고 이름 지었는데 청계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남계보다 더 푸른빛을 발하라는 의미를 담은 곳이라고 합니다. 

 

 

솟을삼문인 취도문

 

 

취도문 현판

 

 

탁영 김일손은 성종 때 사림파를 대표하는 학자로서 청요직을 두루

지냈으나 연산군 때 무오사화에 희생되었습니다.

 

그가 이곳 청계 정사에서 한 동안 공부를 한 적이 있어

유림에서 그 터에 서원을 세운 것입니다.

 

 

함양 청계 서원(咸陽 靑溪書院) 전경

 

함양 청계서원(咸陽 靑溪書院)은 경상남도 함양군 수동면 원평리에 있는, 조선 연산군 때

학자인 문민공 김일손(1464∼1498)을 기리기 위한 서원입니다.

 

1983년 7월 20일 경상남도의 문화재자료 제56호 청계서원으로 지정되었다가,

2018년 12월 20일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습니다.

 

조선 연산군 때 학자인 문민공 김일손(1464∼1498)을 기리기 위한 서원으로 김일손은

김종직의 제자로서 그의 스승을 비롯한 영남학파 학자들과 함께 조의제문 사건에

연루되어 무오사화로 희생되었습니다.

 

글에 뛰어났으며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비판하였습니다.

 

연산군 1년(1495)에는 '청계 정사'를 세워 유생을 가르쳤고, 광무 10년(1905)

유림들이 그 터에 유허비를 세웠습니다.

 

그 뒤 1915년에 건물을 원래 모습으로 고쳐 청계 서원이라 하였습니다.

 

구경재와 동재, 서재, 홍남문, 솟을삼문 등의 건물이 남아 있고,

봄·가을에 제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동재인 역가재

 

 

서재인 구경재

 

 

청계 서원 강당인 애락당 전경

 

 

청계서원 현판 

 

 

강당 이름인 애락당 현판

 

 

동덕재

 

 

병의재

 

 

각종 편액들

 

 

청계 서원의 대들보

 

 

강당에서 내려다본 솟을삼문

 

 

종친인 탁영 김일손 님께서 마치 고운 자태의 소나무로 환생하신 듯

청계 서원을 빛나게 합니다.

 

그 그늘 밑에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는 게

올바른 것인지 한 참을 생각해 봅니다. 

 

 

청계사 내삼문 전경

 

 

청계사 사당

 

 

청계사 사당 현판

 

 

청계사 사당 출입문 내삼문 안쪽 전경

 

 

사당에서 내려다본 청계 서원

 

 

청계 서원의 작은 연지

 

 

탁영 김일손(金馹孫, 1464년 2월 13일(음력 1월 7일)~ 1498년 8월 14일(음력 7월 27일))은

 조선 성종·연산군 때의 문신이며 학자, 사관, 시인입니다.

 

본관은 김해이며, 자는 계운(季雲), 호는 탁영(濯纓)[2], 소미산인(少微山人)이고

시호는 문민(文愍)입니다.

 

성종 때 문장실력을 높게 평가받아 춘추관의 사관(史官) 활동했으며, 이때 공문서인 사초에

왕실에 대한 유언비어, 전라도 관찰사 이극돈(李克墩) 윤필상 등의 의혹 등 여러 소문들을

 사서에 기록하였고 스승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세조를 비난한 목적으로

사초(史草)에 실었는데 이것이 국문 도중에 드러나 반역죄로 사형당했습니다.

 

주로 언관(言官)으로 있으면서 유자광(柳子光)·윤필상·이극돈(李克墩)·임사홍  훈구파(勳舊派)

학자들과 학조 등 승려들의 부패와 비행을 앞장서서 신랄하게 지적과 규탄했습니다.

 

연산군 1504년(연산군 10)에 갑자사화 때 ‘김일손의 집 땅을 깎아 평평하게 하라’고

명하고 아버지 김맹(金孟)을 부관참시하고, 그의 첩자 김청이(金淸伊)·김숙이(金淑伊)는

사람을 보내어 목을 베어 효수에 처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들을 죽이며 연산군은 “세조께서는 가문을 변화시켜 임금이 되신 분인데,

이와 같은 말을 차마 하였으니, 어찌 이보다 더한 난신적자가 있겠는가”라고 비판했습니다.

 

김일손의 가족이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해 자손이 끊겼지만 큰 형 김준손(金駿孫)의

차남 김대장(金大壯)이 출계(出系)하여 그의 대(代)를 이었습니다.

 

중종반정 이후 신원되었고, 문민(文愍)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승정원 도승지가 추증되었습니다. 

 

충청남도 목천(木川)의 도동서원(道東書院), 경북 청도의 자계서원(紫溪書院)등에

배향되었으며 문집에 《탁영문집》이 있습니다.

 

김일손은  거문고를 좋아했고 능숙한 연주가였다고하는데 그가 남긴 거문고는

탁영 거문고라고 해서 귀중한 유물입니다.

 

김일손이 타던 거문고는 1490년경 만든 것으로 추정되며, 옛 선비들이 사용한 악기로는

유일하게 국가문화재(보물)로 지정되었습니다.

 

 

광무 10년(1905)에 유림들이 세운 유허비 전경

 

탁영 김일손(1464~1498) 선생은 영남학파의 계승자로, 사림의 영수였던 점필재 김종직 선생의

문인으로 탁영 김일손 선생 또한 성종 때부터 관계에 진출하여 언론 간쟁을 담당하면서 정권을 잡고

기득권 세력으로 타락해 가던 훈구파와 대립하며 조선사회의 개혁과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던

사림파의 신진 기수의 대표 격에해당하는 분입니다.

그는 호방하고 재치 있는 이었으며, 학문뿐만 아니라 문장도 빼어났답니다.

거기에 강직한 성품까지 지녔다고 합니다.

 

그는 과거 급제하고 관직에 진출해서 주로 언관에 있으면서 기득권인 훈구파의 실책과 부정을

고발하며 그들의 비행에 제동을 걸면서 두각을 드러냅니다.

 

문제의 발단은 사관(史官)으로 그가 실록에 수록한 위험한 사초(史草)였습니다.

 

성종이 승하하고 그의 실록을 편찬하면서 사관이었던 그는 평소 기록해둔 사초를 실록에 실었는데

여기에 훈구파의 실세 중 하나였던 이극돈의 비행을 고발하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또 그는 스승인 점필재 김종직 선생이 지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실었는데 이게 문제가 되었습니다.

이극돈이 실록청의 책임자로서 사초를 열람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의 비행을 고발한

내용을 봤으니 앙심을 품었고, 김일손 선생이 기록한 사초 중 조의제문을 보고 이것을

외부로 빼돌려 누설합니다.

 

사초는 임금도 열람할 수 없는 자료입니다.

 

임금이 사초를 제 멋대로 보고 그것에 간섭하게 되면 사관이 사관의 직무와

양심에 따라 역사를 기록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지요.

이극돈은 이것을 간신배 유자광에게 보이고, 둘이서 모의해서

이것을 연산군에게 가서 고해바칩니다.

 

'조의제문'이 왜 문제가 되었을 까요?

 

의제는 서초패왕 항우에게 시해된 초의 군주로 그를 조문한다는 이 기록은 세조의 왕위찬탈을

은연중에 비판한 것으로 받아들여져 그대로 역모의 죄를 뒤집어쓰게 된 것입니다.

 

 

남계서원 전경

 

 

청계 서원 전경

 

 

남계서원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