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 7왕자의 성불설의 설화를 간직한 칠불사(진주 두달살기 2021.5.5)

2021. 6. 2. 18:38나의 이야기

 

가락국 일곱 왕자의 설화가 전해져 오는 칠불사의 영지

 

 

지리산 반야봉아래 토끼봉에 터를 잡은 칠불사 일주문 전경

 

칠불사는 대한불교조계종 13 교구 본사인 쌍계사(雙磎寺)의 말사로

칠 불 선원(七佛禪院) 또는 칠불사라고도 합니다.

 

이 절의 창건에는 몇 가지 설화가 전해지고 있는데 연담(蓮潭)의 「칠불암상량문」에 의하면,

신라 신문왕 때 지리산 옥부선인(玉浮仙人)이 부는 옥적(玉笛)의 소리를 들은 일곱 명의

왕자가 입산하여 6년 만에 도를 깨닫고 이 암자를 창건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세전(世傳)에는 옥보선사(玉寶禪師)를 따라 출가한 가락국 수로왕의 7 왕자가

지리산에 운상원(雲上院)을 짓고 수행하여 6년 만인 103년(파사왕 24) 8월 보름에

성불했기 때문에 칠불암으로 고쳤다고 합니다.

 

또 진응(震應)의 『지리 산지』에 의하면 지리산은 칠 불 조사(七佛祖師)인

문수보살이 머무는 곳이기 때문에 칠불암이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이 중 가락국 7 왕자의 성불 및 창건설이 가장 많이 채택되고 있습니다.

 

또, 신라의 옥보고(玉寶高)는 이 절의 운상원에서 50년 동안 거문고를 공부하고

30곡을 지어 세상에 전했다고 하는데, 칠불암이 신라 음악의 중요한 요람지였음을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창건 이후 이 절은 수도승들의 참선도량으로서 그 중요한 위치를 점하게 되었는데

1568년(선조 1)에는 부휴(浮休)가 중창하였고, 1830년(순조 30)에는 금담(金潭)과

그 제자 대은(大隱)이 각각 중창하였으며, 1907년에는 토비의 난으로 승려들이

흩어졌다가 1910년에 다시 선사(禪社)를 크게 열었는데, 이때 서기룡(徐起龍)은

이 절의 당우를 수리하였습니다.

 

그러나 1948년 여순반란사건으로 완전히 소실되었다고 합니다.

 

김선신(金善臣)의 『두류 전지(頭流全誌)』에 의하면, 당시 비로법전·고승당·약사 석불·

부 휴조사 치아 탑·조는의 부도 등이 있었다고 하며, 11동의 건물이 잇따라 있어서

비를 맞지 않고도 다닐 수 있었다고 합니다.

 

제월당(霽月堂) 통광(通光)이 1978년부터 1995년까지 칠불사 중창불사를 수행하여,

1978년 문수전을 시작으로 대웅전・설선당・요사채를 차례로 복원하고, 1983년

아자방을 복원하였으며, 1989년 운상선원을 복원하였고, 1995년 칠불사 사적비

(寺蹟碑)를 건립하여 중창불사 사적을 남겼습니다.

 

이후 2009년에 선다원(禪茶院) 건립하여 오늘에 이르는데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

문수전・설선당・운상선원・아자방(亞字房)・원음각・보설로・선다원 등이 있습니다.

 

이중 아자방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44호로서 신라 효공왕 때 구들 도사로 불리던

담 공화상(曇空和尙)이 아자형으로 축조하여 만든 것으로, 오랜 세월 동안 한 번도

고치지 않았지만 한번 불을 때면 49일 동안 따뜻하였다고 합니다.

 

한번 불을 때면 일곱 짐이나 되는 나무를 세 개의 아궁이에 넣어 한꺼번에 땐다고 하며,

화도(火道)가 막히지 않고, 높고 낮은 곳이 고루 따뜻하였다고 합니다.

 

이중 아자방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44호로서 이 절 150m 아래에는 영지(影池)가

있는데, 허왕후가 7 왕자의 성불한 모습을 보았다는 자리입니다.

 

 

진주 두 달 살기를 하면서 제일 먼저 가보고 싶었던 곳이 이 곳 칠불사였었는데 그런 연유는

제가 김해 김 씨 후손이다 보니 조상의 흔적을 찾아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전국의 어지간한 유명한 명소는 다 돌아보았다는 게 제 생각인데 유독 지리산 쪽에서 안 가본

곳이 이 곳과 삼성궁인지라 오늘은 작심을 하고 이른 아침 이곳으로 향하였습니다.

 

이 근처를 여러 번에 걸쳐 왔었지만 올 때마다 유독 이 곳은 일행들과의 여행이 대부분이었던지라

대다수가 원하는 방향의 여행지를 돌아다니다 보니 이 곳은 미답사 지구로.....ㅎ

 

하동 쌍계사로부터 산길을 따라 약 10km 정도를 차로 올라오다 보니 제가 생각을 해도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겐 이 곳 칠불사는 그다지 여행지로 찾기엔.....ㅎ 

   

 

칠불사를 찾았던 5월 5일은 석가탄신일을 보름 정도 앞두고 있던 시점이었던지라

칠불사 대웅전으로 향하는 계단엔 연등이 매달려 봄 이주는 신록의 푸르름과

더불어 운치를 더하고 있었습니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고운 연등

 

 

칠불사 주차장 전경

 

 

주차장에서 대웅전으로 오른 가파른 계단 

 

 

 대웅전 현판 전경

 

지리산 토끼 봉의 해발고도 830m 지점에 있는 사찰로 101년 가락국 김수로왕의

일곱 왕자가이곳에 암자를 짓고 수행하다가 103년 8월 보름날 밤에 성불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곳입니다.

 

지리산 최고의 심산유곡에 자리 잡아 수많은 고승을 배출하였으나, 1800년 큰 화재가

나서 보광전, 약사전, 신선당, 벽안당, 미타전, 칠 불 상각, 보설로, 요사 등 10여 동의

건물이 불탔다가 복구되었습니다.

 

1948년 여수·순천 사건을 거쳐 6·25 전쟁 중 다시 불탄 뒤 1978년에

복구하여 지금의 칠불사가 되었습니다.

 

운 공선 사가 축조한 벽안당 아자방(亞字房)은 세계 건축 대사전에 기록되어 있을 만큼

독특한 양식으로, 서산대사가 좌선한 곳이자 1828(조선 순조 28년) 대은 선사가

율종을 수립한 곳으로 유명합니다.

 

 

칠불사는 지리산의 중심 봉인 반야봉(1,732m)의 남쪽 800m 고지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신라 말 도선국사가 지은『옥룡 자결』(玉龍子訣)에 의하면 지리산 칠불사는

와우형(臥牛形)의 명당으로, 제일의 양택이라고 했습니다.

 

임진란에 퇴락한 가람을 서산대사와 부휴 대사가 중수하였고 그 후 1800년에 큰 화재가 나서

보광전, 약사전, 미타전, 벽안당(亞字房), 칠 불각, 설선당, 보설로, 요사 등 10여 동의 건물이

전소되었는데 대은 율사와 금담 율사에 의해 모두 복구되었습니다.

 

그러나 6·25 전란으로 인해 1951년 1월경에 전소되어 27년간 폐허로 남아 있던 것을

제월통광(霽月通光) 스님이 1978년부터 15여 년에 걸쳐 대웅전, 문수전, 아자방, 운상원,

설선당, 보설로, 원음각, 요사, 영지, 일주문 등을 복원 중창했고, 이 외에 선다원, 사적비,

다신 탑비 등을 세웠습니다.

 

 

대웅전 내부 전경

 

대웅전에는 삼계의 도사(導師)이시고 사생의 자부(慈父)이신 석가모니 부처님과, 대지혜를 갖추신 문수보살과, 대행을 실천하시는 보현보살과 후불 목 탱화와 김수로왕의 칠왕자가 성불한 칠불 목탱화와 신중 목 탱화를 조성하여 모셨습니다.

 

 

문수전 내부 전경

 

문수전에는 지혜를 상징하는 문수보살을 모셔놓았습니다.

 

지리산은 문수보살 도량이며, 특히 칠불사는 생문수(生文殊) 도량이기 때문입니다.

 

문수보살은 중생의 근기에 따라 몸을 나투시어 신통 자재한 지혜력으로

중생들의 원하는 바를 다 성취시켜 주십니다.

 

 

원음각

 

부처님의 음성을 원음(圓音)이라고 하는데 종소리는 부처님의 음성을 상징하기

때문에 종각을 원음각이라고도 합니다.

 

지옥고를 받는 중생들이 종소리를 들으면 고통을 쉰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종소리를 들으면 번뇌가 끊어지고, 지옥을 깨뜨리고

삼계에서 벗어난다”는 게송이 있습니다.

 

 

보수 중에 있는 아자방 전경

 

아자방은 신라 효공왕 당시 담고(曇空) 선사가 축조한 선원으로서, 방안 네 귀퉁이에 50cm씩

높은 곳은 좌선처이고 가운데 십자 모양의 낮은 곳은 경행처입니다.

 

담 공선사의 축조 당시에는 한번 불을 지피면 100일간 따뜻하였으므로 신비한 온돌방이라 하여

세계 건축사에 기록되었으며, 현재는 경남 유형문화재 제144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운상선원은 옥보대라고도 하는데, 장유보옥선사의 이름을 따서 옥보대라고 한다는 설과

거문고 전승자인 옥보고의 이름을 따랐다는 설이 있습니다.

 

현재는 운상선원을 대중 선방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칠불사의 아자방과 운상선원에서 고려시대의 정명 선사, 조선시대의 서산대사(1520-1604),

부휴 대사(1543-1615), 초의선사(1786-1866), 이외에 백암, 무가, 인허, 월송 선사 등

선승들이 주석하며 수선 안거 했다고 합니다.

 

운 공선 사가 축조한 벽안당 아자방(亞字房)은 세계 건축 대사전에 기록되어 있을 만큼 독특한

양식으로, 서산대사가 좌선한 곳이자 1828(조선 순조 28) 대은 선사가 율종을 수립한 곳으로

유명합니다.

 

이 아자방에서 참선공부할 때는 장좌불와(長坐不臥, 늘 앉아만 있고 눕지 않는 것),

일종식(一種食, 하루 巳時에 한 끼만 먹는 것), 묵언(言, 말하지 않는 것)의 세 가지 규칙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규칙을 지키면서 애써서 공부하였기 때문에 이 아자방에서

무수한 도승들이 배출되었습니다. 

 

  • 영지에 얽힌 설화
  • 가락국 김수로왕과 허왕후는 칠불사에 들어가 수도하던 일곱 왕자가 마침내 성불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왕자들을 만나 보기 위해 지리산으로 찾아갔다고 합니다.
  • 그러나 불법이 엄하여 허왕후조차 선원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 여러 날을 선원 밖에서 기다리던 허왕후는 참다못해 성불한 아들들의 이름을 차례로 불러 보았는데 그러나 “우리 칠 형제는 이미 출가, 성불하여 속인을 대할 수 없으니 돌아가시라”는 음성만 들렸다고 합니다.
  • 허왕후는 아들들의 음성만 들어도 반가웠으나, 얼굴을 한 번만 보고 싶다고 간청하였는데 아들들은 “그러면 선원 앞 연못가로 오시라”고 했는데 허왕후는 연못 주변을 아무리 찾아보았으나 아들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 실망한 허왕후가 발길을 돌리려다 연못 속을 들여다보니, 성불한 금빛 색깔의 일곱 왕자가 합장하고 있었습니다.
  • 그 모습에 감동한 것도 잠깐, 한번 사라진 일곱 왕자들의 모습은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 이 연못은 그 뒤로 영지(影池)라 불려졌고 또 수로왕이 이때 머물렀던 마을을 범왕촌(梵王村)으로 불렀는데, 현재는 범왕리(凡王里)로 변해 있습니다.
  • 또 허왕후가 머물렀던 곳은 대비촌(大妃村)이라 불렸는데, 지금은 대비리(大比里)로 바뀌어져 있습니다.

 

칠불사는 1세기경에 가락국 시조 김수로왕의 일곱 왕자가 그들의 외숙인 범승(梵僧) 장유 보옥

(長遊寶玉) 화상(和尙)을 따라와 이곳에서 동시 성불한 것을 기념하여 김수로(金首露) 왕이

국력으로 창건한 사찰로서, 가야불교의 발상지입니다.

 

『삼국유사』가락국기에 의하면 수로왕은 서기 42년에 화생(化生)하였으며, 남해바다를 통해 가락국에

온 인도 황하 상류의 태양왕조인 아유 다국 허황옥 공주를 왕비로 맞아 10남 2녀를 두었습니다.

 

그중 장남은 왕위를 계승하였고, 둘째와 셋째 왕자는 어머니의 성을 이어받아 김해 허 씨(許氏)의

시조가 되었으며, 그 나머지 일곱 왕자는 외숙인 장유화상을 따라 출가하였습니다.

 

그들은 장유화상의 가르침을 받으며 가야산에서 3년간 수도하다가 의령 수도산과 사천 와룡산

등을 거쳐 서기 101년에 이곳 지리산 반야봉 아래에 운상원(雲上院)을 짓고 정진한 지 2년 만에

모두 성불하였다고 합니다.

 

칠 불의 명호는 금왕 광불(金王光佛), 금왕 당불(金王幢佛), 금왕 상불(金王相佛), 금왕 행불(金王行佛),

금왕 향불(金王香佛), 금왕 성불(金王性佛), 금왕 공불(金王空佛)입니다.

 

이 칠 왕자의 성불로 인하여 칠불사라 하였습니다.

 

이 외에 칠불사 경내에 있는 영지(影池)와 칠불사 인근 지역에 남아있는 명칭 등을 통해서도

칠불사가 가야불교의 성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칠불사의 영지는 칠왕자의 그림자가 나타났다는 연못으로 수로왕 부부가 출가한 일곱 왕자를

만나기 위해 이곳에 와서 왕자를 보려 하자 장유화상은 “왕자들은 이미 출가하여 수도하는

몸이라 결코 상면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꼭 보고 싶으면 절 밑에 연못을 만들어 물속을 보면 왕자들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는데 장유화상의 말에 따라 김수로왕 부부는 연못을 만들어 놓고 그 연못을 보니 과연

일곱 왕자들의 그림자가 나타났습니다.

 

그를 보고 수로왕 부부는 환희심을 느끼고 돌아갔다고 합니다.

 

그로 인하여 이 연못을 영지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또 칠불사 인근 마을의 명칭인 범왕(凡王) 마을과 대비 마을도 칠불사가 가야불교의

성지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범왕리라는 명칭은 김수로왕이 칠 왕자를 만나기 위하여 임시 궁궐을 짓고 머무른 데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고 또 화개면 정금리의 대비 마을(大妃洞)은 허황후가 아들을 만나기 위하여

머물렀다는 데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일곱 왕자를 성불시킨 보옥 선사는 거문고의 명인이었으며, 신라 경덕왕 때는

 옥보고가 입산해 50년간 30곡의 거문 고곡을 지었다고 합니다.

 

 

영지를 배경으로 

 

 

만학천봉(萬壑千峰)의 지리산 깊숙이 자리 잡은 칠불사는 창건 설화도 화려합니다.

 

불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왔다는 기록이 있기 전인 가야 시대 때 김수로왕의 일곱 왕자가

암자를 짓고 수도하다가 성불했다는 전설이 있어 가야 불교의 발상지로 꼽힙니다.

 

이 왕자들은 처음에 김해 장유에서 수도를 했으나 이후 가야산과 창녕 화왕산, 사천 와룡산

등지로 옮겨 다니다가 마지막에는 터의 기운이 좋은 이곳에서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아들을 만나보기 위해 김수로왕이 절 근처에 머물렀다는 범왕리(梵王里)와 어머니인 허왕후가

머물렀다는 대비(大妃) 마을이 아직도 명백을 유지하고 있다 보니 설화라기보단 구존된

역사 같아 보였습니다.

 

덧붙여 말하자면 삼국사기 가락국기에 칠운이 승운이 거 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아남산업을 창업한

동향인 김향수 씨가 일본 유학 시절에 일본 각지를 돌아보고 쓴 "일본은 한국이더라" 란 책을

쓴 적이 있었는데 김향수 씨는 일곱 왕자들이 성불한 곳이 아니라 이 곳에서 해류를 따라 도일하여

규슈에 상륙하여 일본 왕가의 명맥을 이은 것으로 유추하고 있는데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역사적으로는 좀 더 고찰해볼 가치는 충분히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리산 칠불사 일주문 전경

 

불교의 경이 일심을 깨달아 부처가 되는 곳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찰에 들어가는 입구에 일주문을 세워 놓았습니다.

 

대체로 일주문에 ‘신령스러운 광명이 어둡지 않아(神光不昧) 만고에 빛나는 법이다(萬古輝猷)

이 문안에 들어와서는(入此門內) 분별지 해를 두지 마라(莫存知解)’라는 게송을 적은 현판이

걸려있습니다.

 

전을 크게 분류하면 경, 율, 론 삼장으로 삼장의 내용은 계, 정, 혜 삼학이고,

삼학의 근본은 일심이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