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4. 18. 08:45ㆍ나의 이야기
리어카를 밀어주는 아이들 벽화
한양도성의 서쪽 큰 문, 서대문이라는 이름으로 더 친숙한 돈의문은 1396년 처음 세워졌으나
1413년 경복궁의 지맥을 해친다는 이유로 폐쇄되었다가 1422년 현재 정동 사거리에 새롭게
조성되었습니다.
이때부터 돈의문에는 새문新門이라는 별칭이 붙었고, 돈의문 안쪽 동네는
새문 안골·새문안 동네로 불렸습니다.
1915년 일제는 도시계획이라는 명목 아래 도로확장을 이유로 돈의문을 철거하였고,
돈의문은 서울 사대문 가운데 유일하게 이야기로만 전해지는 문으로 남았습니다.
1960년대부터 70년대까지 새문안 동네에는 가정집을 개조해 소수의
학생들을 가르치는 과외방이 성행했습니다.
주변에 서울고, 경기고, 경기중, 경기여고 등 명문학교가 있었고 광화문과
종로2가 일대에는 유명 입시학원이 많아 사교육의 적지였습니다.
1970년대 이후 다수의 명문고들이 강남으로 옮겨가고, 과외 금지령이 내려지면서 신문로 일대
과외방 열풍은 서서히 사그라졌으나, 같은 시기 교육청이 마을 뒤편으로 이전해오고 길 건너
강북삼성병원 신관과 같은 고층빌딩이 들어서면서 송월길 가로변을 중심으로 인근 회사원 등을
대상으로 하는 식당이 많아졌습니다.
1990년대 초부터는 떠나는 동네 주민들이 내놓은 주택이 개조되어 식당으로 운영되기
시작하였으며, 이후 새문안 동네는 식당 골목으로서 전성기를 누렸습니다.
돈의문박물관마을은 이웃한 종로구 교남동 일대와 더불어 2003년 ‘돈의문 뉴타운’ 지역으로
선정되면서, 기존 건물의 전면 철거 후 근린공원으로 조성될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서울시는 한양도성 서쪽 성문 안 첫 동네로서의 역사적 가치와 흘러간 근현대 서울의 삶과
기억을 고스란히 품고 있는 이 동네를 획일적으로 철거하고 개발하는 방식에 대한 깊은 고민에
빠졌고, 2015년 마을의 원형을 유지하는 방향으로 계획을 변경하였습니다.
전면 철거 후 공원으로 만드는 게 원래 계획이었지만, 그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건물을 허물고
새로 짓는게 아니라 기존 건물을 보수하는 서울형 도시재생 방식을 선택하여 마을 전체가 박물관으로
재탄생 하였으며돈의문 지역의 역사와 재생을 소개하는 돈의문 전시관, 전통문화체험이 가능한
한옥시설,6080세대의 추억이 살아 있는 아날로그 감성공간 등 100년의 시간이 중첩된 역사와
문화가 살아있는 마을로 재탄생하였습니다.
복원된 새문안 극장 전경으로 맨발의 청춘과 고교 얄개 영화
간판이 시선을 잡아끌어당깁니다.
다양한 예술과 문화 체험이 가능한 재미있는 마을, 도심 속 골목골목의 정취를 느끼며
사진으로 즐거운 추억을 간직할 수 있는 새문 안길 골목길은 서울 근현대의 삶과 기억을
간직한 곳이기도 합니다.
돈의문 박물관 마을 안내판
돈의문 박물관마을은 한양도성 서쪽 성문 안 첫 동네로서의 역사적 가치와 흘러간 근현대
서울의 삶과 기억을 고스란히 품고 서울형 도시재생 방식을 통해 재탄생한 도심 속
마을 단위 역사·문화공간입니다.
돈의문박물관마을은 이웃한 종로구 교남동 일대와 더불어 2003년 '돈의문 뉴타운' 지역으로
선정되면서, 기존의 건물을 모두 허물고 근린공원으로 조성될 계획이었는데 그러나 서울시는
한양도성 서쪽 성문 안 첫 동네로서 새문안 동네의 역사적 가치를 알리고 마을의 삶과 기억이
잘 보존되어 있는 작은 마을 그 자체를 박물관마을로 남겨 서울시민의 역사·문화 자산으로
조성하고자 하였습니다.
마을 내의 건물은 최대한 살려 리모델링하였으며, 일부 집을
허문 자리에는 넓은 마당을 만들었습니다.
근현대 건축물 및 도시형 한옥, 100년의 역사를 지닌 골목길 등 정겨운 마을의 모습은
같은 자리에 그대로 남아 많은 시민이 즐기고 체험할 수 있는 새로운 문화의 장으로
재탄생하였습니다.
현재 돈의문박물관마을은 <근현대 100년, 기억의 보관소> 콘셉트로 새롭게
단장을 마치고 시민들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40개 동의 기존 건물은 그대로 두면서 본래 조성 취지인 '살아있는 박물관마을'이라는 정체성을
되살릴 수 있도록 일 년 내내 전시, 체험, 공연, 마켓 등이 열리는 '참여형' 공간으로 콘텐츠를
꽉 채워 전면 재정비한 것이 큰 특징입니다.
뻥튀기 아저씨 벽화
돈의문 구락부
돈의문 박물관 마을 시설 안내도
박에스더의 집
대한제국기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한국 최초의 여의사 의료인. 여의사.
돈의문 역사관
경희궁을 돌아본 후 새문안 길을 거쳐 정동 입구 양평해장국집에서 옛 직장동료와
껄리 한잔을 곁들여 점심을 해결하고 정동길을 지나 덕수궁으로 향합니다.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 화단에 진시 된 조형물
1228년 7월 15일 시성 되었으며, 축일은 10월 4일. 프란체스코 수도회 및 수녀회 설립자,
13세기 초 교회 개혁운동 지도자로 자선·청빈과 강력한 지도력으로 수많은 추종자를 불러모았고,
가장 존경받는 종교인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시에나의 카테리나와 함께 이탈리아의 주요 수호성인입니다.
평화의 소녀상
전국 53개 고등학교 1만 6,400여 명의 학생들이 모은 돈으로 건립하였는데
장소는 작은 형제회에서 부지 제공하였음)
정동극장
정동극장(貞洞劇場)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극장 원각사(圓覺社)를 복원한다는 역사적 소명을 가지고 탄생한 극장으로, 전통예술의 발전과 보급, 생활 속의 문화운동 전개, 청소년 문화의 육성이라는 세 가지 지표를 목적으로 1995년에 건립되었습니다.
개관 당시에는 국립극장 분관으로 출발했다가, 1996년 과도기 운영체제인 사단법인체로 변경하였으며, 1997년 재단법인으로 완전한 독립법인체를 갖추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명창 이동백 상
이동백은 고운 음색과 다른 사람이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고음으로 이름을 날렸는데
〈심청가〉·〈적벽가〉를 잘했고, 특히 〈새타령〉은 이 날치 이후 최고라는 평을 받습니다.
〈심청가〉·〈적벽가〉·〈춘향가〉 등의 음반을 남겼으며 제자로는 강장원을 두었으나,
강장원이 별다른 제자를 두지 못했기 때문에, 그의 소리는 전승되지 못했습니다.
정동극장 건물의 벽화
정동 제일교회 전경
서울 시립미술관 서소문 분관 앞의 조형물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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