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이 만개한 덕수궁의 봄(2021.4.2)

2021. 4. 19. 14:04나의 이야기

 

덕수궁은 학창 시절에 그림을 그리거나 친구들과 사진을 찍기 위하여 많이 찾아오던 곳이

었지만, 벚꽃이 만개한 절정기에 찾아본 적은 드물었단 생각이 듭니다.

 

오전에 맑았던 하늘이 오후들어 흐려져 벚꽃이 활짝 피었음에도

흐린 날씨가 다소 분위기를 반감시킵니다.

 

오늘 같은 날 하늘마저 맑았으면 좋으련만......ㅜㅜ

 

 

 

중화전

 

 

중화문

 

 

석조전 전경

 

석조전은 덕수궁 안에 있는 근대 서양식 건물로 영국인 J.M. 브라운의 발의에 의해

1900년 착공하여 1910년에 완공되었습니다.

 

기본설계는 영국인 G.R. 하딩이, 내부 설계는 영국인 로벨이 했으며 공사감독은 한국인 심의석,

러시아인 사바틴, 일본인 오가와[小川陽吉], 영국인 M.H. 데이빗슨 등이 했습니다.

 

3층 석조건물로 1층에는 거실, 2층에는 접견실 및 홀, 3층에는 황제 황후의 침실·

담화실·거실·욕실 등이 있습니다.

 

높은 기단 위에 장중한 도릭오더의 기둥을 세우고 정면과 양 측면에 튀어나온 현관을 만들었으며

건물 앞의 정원과 함께 18세기 신고전주의 유럽 궁전의 건축을 모방해 지은 것입니다.

 

1945년 미·소공동위원회 회의장으로 사용되었으며 6·25 전쟁 이후 1986년까지는

국립현대미술관으로 사용되었습니다.

 



 

 

흐드러지게 핀 화려한 능수 벚꽃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분관 전경(석조전 서관)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2021.2.4~5.30)의 전시 관람을 보기 위하여

현장 예약을 한 후 남아 있는 시간 동안 덕수궁의 봄을 만끽해 봅니다. 

 

석조전 서관 전경

 

 

화려하게 만개한 능수벚꽃을 배경으로

 

 

앙부일구(보물 845호 복제품)

 

 

만개한 진달래

 

 

중화전

 

중화전(1905 중건 덕수궁의 정전, 보물 제819호)

 

앞면 5칸, 옆면 4칸의 단층 팔작지붕이며 높은 2층 월대 위에 세워졌는데 기단에 회랑을

두르지 않았으며 사방에 계단을 두었는데 남쪽 계단 앞에는 품계석이 각각 12개씩

배열되어 있습니다.

 

원형 주자의 초석 위에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창방과 평방을 짜 올 린 다포계로

공포는 외삼출목·내 사출 목으로 궁궐건축의 상례를 따르고 있습니다.

 

외부 살미 첨차는 3중으로 앙서를 조작하였고, 기둥머리에는 후기 건물에서

흔히 쓰는 안초공을 두어 기둥머리의 허전함을 덜고 있습니다.

 

가구는 2 중량 구조이며 2개의 고주 사이에 대들보를 걸고 그 위에

동자주를 세워 종량을 받고 있습니다.

 

뒷줄에 있는 고주 사이에 어좌를 마련하고 그 위에 닫집을 설치하였는데

닫집의 천장에는 쌍룡이 새겨져 있습니다.

 

 

덕수궁은 사적 제124호인 조선시대의 궁궐로 1611년에 경운궁, 1618에는 서궁으로

불렸으며, 1897년 고종이 러시아 영사관에서 이곳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본격적인

궁궐의 건립이 이뤄졌습니다.

 

1897년, 1900년, 1902년, 1904년에 걸쳐 궁궐의 건립과 중건이 진행되었고

1907년 고종이 현재의 이름인 덕수궁으로 바꿨습니다.

 

1910년에는 근대 서양식의 석조전이 건립되었으며 전통 목조건축과 서양식 건축이 함께

남아 있으나, 조선의 5대 궁궐 중 규모는 가장 작고 전체 배치가 정연하지 못합니다.

 

 

외세의 개입이 없는 조선의 자주 독립국임을 나타내고자 한 의도 때문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우물 천정 속의 용부조는 화려하고 발톱도 5개인......ㅎ 

 

중국의 간섭을 받던 조선의 다른 궁궐보다는 더 화려합니다. 

 

 

덕수궁은 조선의 5대 궁궐 중에서 가장 규모가 작은 것으로

조선말 고종이 살던 곳입니다.

 

궁궐의 자리는 원래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집이 있었던 곳으로 선조가 임진왜란

직후 임시거처로 사용하면서 행궁이 되었습니다.

 

광해군은 이곳에서 즉위한 뒤 1611년 10월 경운궁으로 이름을 바꿨습니다.

 

1615년(광해군 7)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빈 궁궐이 되었으며 1618년

인목대비가 이곳에 유폐되면서 서궁으로 불렸습니다.

 

인조는 이곳 별당에서 즉위했으나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는

바람에 다시 빈 궁궐이 되었습니다.

 

1896년 아관파천으로 왕태후와 왕태자비가 이곳으로 옮겨와 생활했으며

1897년 고종이 러시아 영사관에서 이곳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본격적인 궁궐

건물의 건립이 이뤄졌습니다.

 

그 해에 역대 임금의 영정을 모시는 선원전, 침전인 함령전, 보문각 등이 지어졌으며

9월 17일 고종이 황제 즉위식을 하고 소공동의 원구단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냄으로써

정궁이 되었습니다.

 

1900년(광무 4) 담장공사가 완공되었고 정문인 인화문 및 돈례문·회극문·

영성문 등의 전문이 완성되었으나 그해에 선원전이 불탔습니다.

 

1902년 정전인 중화전과 관명전 등이 새로이 건립되었으며 1904년 대규모 화재로

많은 건물이 불타버렸으나 즉조당·석어당·함령전 등이 중건되었습니다.

 

이때 정문의 이름을 대안문이라 했으며 1905년 중화전을 다시 짓기 시작하여 이듬해

완공되었으며, 이때 대안문도 수리하여 대한문으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1907년 고종이 순종에게 왕위를 이양하고 이곳에 살면서

현재의 이름인 덕수궁으로 바꾸었습니다.

 

순종이 이곳의 즉조당에서 즉위한 뒤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고종의 거처가 되었습니다.

 

1910년 근대건물인 서양식의 대규모 석조전이 건립되었으며,

1919년 고종이 함령전에서 죽었습니다.

 

1921년 중화전에 봉안했던 고종의 영정을 창덕궁 선원전으로

옮겨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만개한 철쭉

 

 

준명당

 

 

즉조당

 

 

석어당

 

 

정관헌 내부 전경

 

 

덕수궁 정관헌

 

덕수궁 안에 있는 양관 가운데 하나로 함령전 북쪽에 있으며

1900년 이전에 지은 것으로 짐작합니다.

 

고종의 연유 장소로 사용되었으며, 양옥이라고는 하나 팔작지붕 등

전통 목조건축의 요소가 많이 있습니다.

 

 

 

함녕전

 

 

광명문

 

 

산당화(명자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