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3. 5. 23:32ㆍ나의 이야기
세계 문화유산 중국 청더(승덕) 피서 산장 (避暑山庄)의 출입문인 여정문 전경
피서 산장의 정문격인 여정문(丽正门)을 통과하면 궁전구로 들어서게 되는데 여정문 위에 걸린
편액을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청나라가 외교 전략 요충지로 청더(승덕)를 활용했던 만큼
티베트어, 위구르어, 만주어, 몽골어, 한어, 즉 5개 언어로 써 있습니다.
일본에 침략을 당했던 시절 일본군이 청동사자을 일본으로끌 가져 가려고 하다가 실패를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는데 아무리 용을 써도 꿈쩍도 안했다고 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땅속으로 양쪽 청동사자와 정문 기둥이 연결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여정문 안쪽 전경
피서산장( 避暑山莊, 避暑山庄)은 중국에서 가장 큰 황실 정원으로 피서산장(避暑山莊) 또는
이궁(離宮)이라고 불리며, 중국 허베이성, 청더(承德市)에 있습니다.
청나라 때 별궁으로, 여름에는 황제의 집무를 이곳에서 보면서
피서별궁과 열하행궁으로 불렸습니다.
중국 사대 정원 중의 하나로 총면적 5.46제곱km로,
주위의 성벽은 10킬로미터나 됩니다.
중국의 4대 정원은 쑤저우의 졸정원(拙政园),유원(留园), 베이징의 이화원(颐和园),
허베이 성의 승덕이궁(承德离宫)을 말합니다.
청 왕조의 여름 행궁(이궁) 피서 산장(避暑山庄) 안내도 전경
청 왕조의 여름 행궁(이궁) 피서 산장 (避暑山庄)은 기네스북에도
등재된 "세계 최대 규모의 황실 정원"입니다.
얼마 전에 제 불로그에 올려드렸던 베이징의 자금성과 이화원과 비교해서 보시면
피서산장에 대한 이해가 빠르리란 생각입니다.
청나라의 황금기를 구가한 세 황제 중 강희제(1703년)가 첫 삽을 뜨고,
그의 아들인 옹정제를 거쳐, 손자인 건륭제(1792년) 때 완성되었습니다.
무려 90년에 걸쳐 조성한 피서 산장의 넓이는 564만㎡으로, 베이징의
자금성보다 8배, 이화원의 2배에 달하는 규모입니다.
피서산장은 황제가 머물고 집무를 보던 궁전구(宫殿区)와 황제가 좋아하는
명승지와 자연을 테마로 꾸민 원경구(苑景区)로 크게 나눌 수 있습니다.
원경구는 다시 세 구역으로 나뉘는데, 강남의 수향을 축소해 놓은 호구(湖区), 몽골의 대초원을
옮겨 놓은 듯한 평원구(平原区), 동북의 삼림 지대를 빼닮은 산구(山区)가 바로 그 것입니다.
중국의 멋진 명승지와 아름다운 자연을 한데 모아 축소해 놓은 만큼 언뜻 보면 황제가 베이징의
무더위를 피해서 휴양을 즐기고자 건설한 완벽한 테마 파크라고 보시면 정확합니다.
그러나 이곳에는 중요한 속내가 숨어 있는데 청나라는 중국의 국토 면적을 최대로 넓힌,
수많은 민족으로 구성된 나라로 베이징은 한족을 지배하기에는 적합했지만 북쪽의 이민족을
견제하기에는 다소 미흡했던 곳입니다.
청더(승덕)는 몽골이 중국을 침입하기 위해서 반드시 지나야 하는 관문으로, 황제가
별궁을 지어 머무는 것에는 스스로 전방을 방어하려는 목적이 담겨 있었습니다.
특히 황제가 피서 산장에 머무르는 5~9월은 몽골의 초원이 풍요로워지고 말이 살찌는 계절로
실제로 황제는 피서 산장에 머무는 동안 평원구와 산구에서 말을 기르고, 군사를 훈련시켰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피서 산장은 황제의 피서지이자,
베이징의 뒤를 잇는 정치의 중심지였습니다.
규모가 워낙 방대해서 꼼꼼히 둘러보려면 하루도 부족한데 대다수 여행자들은
궁전구와 호구를 중심으로 둘러보게 됩니다.
시간적 여유가 있으시다면 산구나 평원구 중 한 곳이라도 더 둘러보시는게 좋습니다.
궁전구(宫殿区)
황제가 머물며 정무를 보던 장소로, 피서 산장의 핵심으로 강희제의 뜻에 따라
건축된 궁전구는 베이징의 자금성과는 사뭇 대조적이랍니다.
꽃과 나무, 예쁜 돌들을 적절하게 배치해서 궁전 구역을 원림화했기 때문에 자금성의
삼엄한 분위기와 달리 한결 부드럽고 따사롭습니다.
민생과 사회 발전을 위해서 평소 검소한 생활을 제창했던 강희제의 뜻에 따라 자금성의
휘황찬란한 유리기와 대신 지붕을 전부 회색 기와로 덮은 것이 큰 특징입니다.
사자상 ( Lion of Fo , 獅子像)
불사자, 석견, 불사라고하는데 원래의 의미는 불교사원의 수호자로 보통 쌍으로 조각되며,
그중 수컷은 공을 가지고 놀고 있고 암컷은 새끼와 함께 있는 모습입니다.
참고로 사자상 밑에 새끼사자가 있으면 황후를 나타내고 발밑에 여의주를 가지고 있으면
황제를 나타낸다고도 알려져 있습니다.
청의 황제는 선양(당시의 봉천)에 제사를 지내러 가는 것이었지만,
황제의 행차는 청더에 머물렀습니다.
청더(승덕)는 계절과 날씨가 좋고, 자연이 수려하며, 풍경이 아름답고 온천 등도 있었기 때문에
강희제는 1703년 2개의 별궁을 짓기로 결정하여 옹정제를 거쳐 1741년 건륭제 때 대규모 정비가
이루어져, 준공으로부터 87년이 지난 1709년에 완성하고, 외팔묘를 궁 밖에 짓기 시작했습니다.
이 곳 피서산장은 청나라 전기 황제의 여름 집무지로, 정치, 군사, 외교 등의 국가대사에
중요한 역할을 한 곳으로 이런 이유로 베이징 이외의 제2의 정치 중심으로 불렸습니다.
내오문 전경
여정문 안의 내오문(内午门)이 궁전구의 정문으로 강희제가 직접
‘避暑山庄’이라고 쓴 편액이 걸려 있습니다.
필체를 자세히 보면 황제의 권위를 표시한 흔적이 있는데 "피(避)"자에
한 획(一)을 더 그어 천하통일의 의미를 담았습니다.
내오문 앞은 황제가 귀족들과 활솜씨를 겨루던 장소로 이곳에서 군사 훈련을 했다고 전해 오는데,
우리에게는 연암 박지원이 조선의 사신들과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头礼)’를 올렸던 장소로
더 유명합니다.
삼배구고두례는 청나라 시절 황제나 대신을 만났을 때 양손을 땅에 대고 이마가 땅에 닿을 듯
조아려 절하는 예법으로 외국 사신에게는 치욕적으로 느껴져 거부하는 이도 있었습니다.
강희제는 매년 입추 이후 목란위장을 찾아 20여일에 걸쳐 사냥을 했으며
피서산장으로 돌아와 쉬었다고 합니다.
산장 정궁의 오문에 걸려있는 '피서산장'이라는 현판은 강희제가 직접 쓴 것으로 그는
피서산장에서 북방의 소수민족들과 잦은 만남을 가지며 우호관계를 유지하였습니다.
열하행궁과 그 주변에 있는 사당에서는 소수민족의 종교적 의식을 거행하였으며 피서산장은
강희제가 유약하지 않도록 사냥을 함으로 문과 무의 균형을 유지하는 장소이기도 하였습니다.
피서산장의 건축에 있어서는,강남지방의 훌륭한 정원과 명승을 참고해 지어졌는데
쑤저우의 사자림과 한산사, 항저우의 무릉사와 육화탑, 진강의 금산정, 가흥의 연우루는
모방하기 좋은 교과서였다고 합니다.
내몽골과 대흥안령 등으로부터 소나무를 가져와 건축물에 이용했다고 하며
또 원내에는사고전서가 소장되있습니다.
담박경성(澹泊敬诚)이란 편액이 걸린 주전 내부 전경
담박경성전(澹泊敬诚殿)이 궁전구의 핵심인 주전(主殿)으로 천정과 창문을 비롯해
전체를 녹나무로 지어서 ‘남목전(楠木殿)’이라고 부릅니다.
정전의 가운데 보좌 위에 ‘담박경성’이란 편액이 걸려 있는데, 이는 건륭제의 정신이 가장 잘 드러나는
글귀로 "담박"은 물욕을 버려 사치스런 생각이 없고, 고요하고 평정한 상태를 이르는 말로
제갈량의 <계자서(诫子书)>에서 영감을 얻었습니다.
"경성"은 성실한 마음으로 덕을 키워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는 의미로 그 뜻에 따라 자금성의
호화로운 태화전(太和殿)과 달리 담박경성전은 담박하게 꾸몄습니다.
피서산장 궁전구에서
사지서옥( 四知书屋) 전경
사지서옥(四知书屋)은 담박경성전 뒤편에 위치해 있는데 담박경성전이 공식적인 업무를 처리하는
곳이라면, 사지서옥은 일상적인 업무를 처리하고 신하들과 편안하게 대화를 나누고, 황제가
개인적으로 사용했던 공간입니다.
연암 박지원과 조선의 사신이 이곳에서 황제를 만났다는
이야기가 <열하일기>에 등장합니다.
지금은 청대 황실의 생활 용품을 전시하는 박물관이 되었는데, 직접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고 유리창을 통해서 안을 볼 수 있습니다.
사지서옥(四知书屋)은 군자의 덕목 4가지를 강조하고 있는데 “주역”이 출처로 미(微), 장(彰),
유(柔), 강(剛)을 잘 알아야 만백성이 우러러본다는 취지로 약간 해석을 더하면 감출 일,
드러내 밝힐 일, 옳고 그름을 아는 일, 단호하게 결단하는 일을 말합니다.
4가지 낱말이 황제에게 꼭 필요한 덕목인지는 잘모르겠으나 ‘싸가지 없는 황제가
중국 역사에서 얼마나 많았던지를 생각해보면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ㅎ
사지서옥 내부 전경
강희제 초상
건륭제가 말을 탄 초상
70살이 넘은 나이에도 말을 타고 사냥을 했었다고하니
북방 이민족의 피가 분명하다는 생각이....ㅎ
또 중국을 통일하여 한족을 지배하였던 대다수 중국의 황족은 어떤 의미로 보면 다 북방
이민족이다보니 이민족에게 지배를 당하고 살았던 한족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런 모든 것들이
한족의 역사라고 말하기에는 조금 아이러니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연파치상전(烟波致爽殿) 전경
연파치상전(烟波致爽殿)은 황제의 침실로 강희, 건륭, 가경, 함풍제가 기거했습니다.
화려한 장식물보다는 옆 벽에 붙은 ‘물망국치(勿忘国耻)’라는 문구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베이징을 위협하던 1860년에 함풍제는 피서 산장을 피난처로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중국의 영토를 영국, 프랑스, 러시아에게 할양하는 치욕적인
아이훈 조약, 베이징 조약 등을 맺었습니다.
후대 정치인들이 이조약을 맺은 테이블이 놓여 있는 것을 보고 "역사의 치욕적인
조약이 맺어진 것을 잊지 말자"는 문구를 적어 붙인 것입니다.
함풍제가 이곳에서 1년간 피난 생활을 하다 병사하면서
피서 산장의 운명도 막을 내렸습니다.
다음 정권을 잡은 자희(慈禧, 함풍제의 후궁으로 훗날 서태후로 불림)는 피서 산장을
대신하여 베이징에 이화원을 건설했습니다.
후궁이 드나들었다는 작은 쪽문 옆으로 자희의 거처였던 서소(西所)가 있습니다.
궁전구 마지막에서는 강희제와 건륭제가 서재로 사용했던
운산승지루(云山胜地楼)가 있습니다.
2층으로 지은 건물로, 2층에 오르면 호수구과 산구가 한눈에
들어온다고 알려졌으나 일반에게 공개하지 않습니다.
연파치상전(烟波致爽殿) 내부 전경
제일 중앙에 위치한 연파치상 편액
태평천국의 민란과 아편전쟁 이후 서양 열강에 시달리던 함풍제는 청나라 황제 중 가장 불행하였는데
허약한 체질인 그는 침궁인 연파치상전(烟波致爽殿)에서 사망했습니다.
이때 서소(西所)에 거주하던 자희태후, 즉 서태후는 신유정변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여
청나라 말기 권력의 중심에서 황제를 대신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한나라 유방의 여태후, 당나라 측천무후와 더불어 서태후는 강철 같은 여성 통치자의
면모를 중국 역사에 남긴 인물로 악녀이기도 했습니다.
여태후는 척부인을 토막 살해하고 측천무후는 정적을 견제하려고 친딸 살해하였으며
서태후는 며느리를 우물에 산 채로 매장 살해한 인물이었습니다.
옹정제모형
청이 중국을 지배하기 시작한 때를 기준으로 하면 청의 제3대 황제로 이름은 윤진(胤禛), 묘호는 세종(世宗),
시호는 헌제(憲帝). 그의 재위기간 동안에 행정기구가 확립되고 황제의 권력이 강화되었습니다.
옹정제(雍正帝, 강희(康熙) 17년 음력10월30일(1678년12월13일) ~ 옹정(雍正) 13년 음력8월22일
(1735년10월8일)는 청제국의 제5대 황제 재위 1722년 ~ 1735년)이자, 1644년 명나라가 멸망한 직후
청제국이 산해관을 넘은 뒤 자금성에서 청제국의 군주가 천명을 상실한 명나라의 주씨를 대신하여
중국의 새로운 수명천자(受命天子)가 되었음을 선언한 이래 세번째 황제입니다.
전임황제는 강희제이고 후임황제는 건륭제입니다.
청나라 제6대 황제 건륭제 (애신교라 홍력, 愛新覺羅弘曆,)모형
건륭제는 중국 역사상 가장 오랜 치세(1735~96)를 한 위대한 군주로 알려져 있습니다.
1755~60년 사이에 여러 번 군사원정을 펼쳐 중국 북동부 지방에 대한 투르크족과 몽골족의
위협을 제거했고 지금은 신장웨이우얼 자치구로 불리는 새로운 성을 창설하여 제국의
영토를 넓혔고, 중국의 남·동부 지역에서 청의 기반을 튼튼히 했습니다.
또한 예술과 문학의 진흥에도 크게 기여하여 중국 고전문학 연구의
중요자료가 되는 <사고전서>를 편찬했습니다.
건륭제에 대한 20세기까지의 평가는 예술과 문학의 애호가이자 외부세계의 새로운 사상들을
받아들인 위대한 건설자, 제국을 번영시키고 잘 다스린 영명한 군주로 평가됩니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와서는 여러 번에 걸친 군사원정이 가져온 재정부담, 궁중 안의 과다한
사치와 낭비, 18세기말의 부정부패 등이 허약한 청 제국을 만들었다는 비판이 있습니다.
청나라의 제4대 황제(재위 1661~1722년)강희제 (애신각라, 康熙帝)모형
청나라의 정치 체제는 그에 의해 완성되었으며, 다음의 옹정제,
건륭제 시절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삼번의 난을 평정함으로써 군사적 지배를 확고히 했고, 국가 재정 확충, 조운 사업 정비 등
내적 안정과 러시아와의 강화 조약, 몽골, 티베트 평정 등 영토 확장을 이룩했습니다.
운산승지루(云山胜地楼)전경
피서산장이 위치한 도시를 현재는 청더(승덕)이라고 부르지만 옛지명으로는 열하熱河의
열하행궁(熱河行宮)이라고도 칭하는데, 1780년 조선 정조 4년 사행단의 총지휘자 삼종형
(三從兄 팔촌형) 박명원의 수행 비서역에 해당하는 군관자제의 신분으로 따라가면서 적은
연암 박지원의 전 26권의 열하일기는 조선을 출발하여 이곳에 도착하여 건륭제를 만나는
과정을 적은 기행문입니다.
조선 사신단은 열하(熱河)에서 1780년 음력 8월 9일부터 8월 14일까지 6일간 머무는데
이에 대한 박지원의 기록이 열하일기 제6권 태학유관록(太學留館錄)에 담겨 있습니다.
특히 피서산장에 관한 기록은 마지막권인 26권 피서록(避署錄)에 잘 나타나는데
당시 연암의 행적은 한양을 출발해 압록강을 거쳐 박천, 의주, 풍성, 요양, 거류하,
북진, 산해관, 옥전, 연경 그리고 목적지인 열하(청더)까지 장장 사개월간의 빡빡한
일정이었습니다.
※ 이제 다음 글에서 피서산장의 원경구중 (호구) 위주의 글들을 올려드릴 생각인데
이번 내몽고 여행 중 찍었던 사진들이 카메라에 문제가 생겨서 화이트 발란스가 잘 안맞아
약간 흐리게 찍혀졌음을 인지하시고 보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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