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한가무쇼의 화려하고 아름다운 장면들.4 (2019.5.22)

2019. 7. 25. 22:09나의 이야기













장한가무쇼의 4막 전경으로 저승에서 양귀비와 현종의 만남을 재현하는 장면 전경





안산의 난으로 금위군의 호위속에 피난을 가던 중 금위군의 반란에 의해 현종이 양귀비에게 

자결을 명하였지만 현종의 사랑은 그가 죽을 때 까정 양귀비를 그리워한 까닭에 현종이

죽어서 저승에서 양귀비와 재회를 해서 이승에서 못다이룬 사랑을 이룬다는 백거이의

 장한가를 재현한 쇼입니다.











 



















 천상에서  양귀비와 재회하는 장면










































화청지에 어린 양귀비의 반영(갤 노트 9 사진)





이림보가 조정의 실권을 한손에 쥐게 된 736년에 현종은

사랑하던 무혜비(武惠妃)를 잃었습니다.


무혜비를 잃은 현종은 실의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후궁에는 아리따운 미녀가 3천 명이나 있었으나 누구 하나

현종의 마음을 끄는 여인은 없었습니다.


이럴 즈음 현종의 귀를 솔깃하게 하는 한 가지 소문이 떠돌았는데 수왕비(壽王妃)가

보기 드문 절세의 미녀라는 것이었습니다.


현종은 은근히 마음이 끌려 환관에게 명하여 일단 수왕비를

 자신의 술자리에 불러오도록 하였습니다.


현종은 수왕비를 보자 한눈에 마음이 끌렸는데 수왕비는 빼어난 미모일 뿐 아니라

 매우 이지적인 여성으로 음악·무용에도 남다른 재주가 있었습니다.


술자리에서 현종이 작곡한 〈예상우의곡(霓裳羽衣曲)〉의 악보를 보자 그녀는 즉석에서

 이 곡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는 것이었습니다.


그녀의 자태는 마치 선녀가 지상에 하강하여 춤을 추는 듯

 현종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이 수왕비가 훗날 양귀비(楊貴妃)로서 현종 황제와 양귀비의 로맨스는

 이 만남을 계기로 막이 오르게 됩니다.


양귀비의 본명은 옥환(玉環)으로 원래는 현종의 열여덟째 아들

 수왕 이모(李瑁)의 아내였습니다.


수왕 이모는 현종과 무혜비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니

 양귀비는 바로 현종의 며느리인 것이지요.


56세의 시아버지 현종이 22세의 며느리와 사랑을 불태운다는 것은

 당시로서도 충격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현종은 중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우선 양귀비 자신의 뜻이라 빙자하여 그녀를

 여도사(女道士)로 삼아 우선 남궁에서 살게 하고 태진(太眞)이라는 호를 내려 남궁을

태진궁(太眞宮)이라 개칭하였습니다.


현종은 수왕 이모에게 죄책감을 느껴서였는지 수왕에게

위씨의 딸을 보내 아내로 삼게 하였습니다.


태진이 귀비로 책봉되어 양귀비로 불리게 된 것은 그 후의 일이지만

남궁에 들어온 태진에 대한 현종의 열애는 대단하였습니다.


 남궁에 들어온 지 1년도 채 못 되어 태진에게서는 마치 황후가

 된 듯한 도도한 행동마저 보였기 때문입니다.


현종 황제와 태진은 추야장 깊은 밤도 오히려 짧은 듯 해가 높이

 떠올라도 잠자리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습니다.


이렇게 하여 일찍이 흥경궁에 근정전을 세워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정무에 열중하던

 현종 황제는 정치에 대한 흥미를 완전히 상실하여 마치 딴 사람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남궁에 들어온 지 6년 후 태진은 귀비로 책봉되었습니다.


명실 공히 양귀비가 된 셈으로 궁중의 법도상 귀비의 지위는 황후 다음이었으나

 이때 황후는 없었으므로 사실상 양귀비가 황후의 행세를 하였습니다.


 양귀비는 더욱 더 현종의 총애를 한몸에 받아 그녀의 일족들도

 차례차례 고관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양귀비는 고아 출신으로 양씨 가문의 양녀로 들어갔기 때문에 혈연을 같이 하는 친척은 없었지만,

 현종은 양귀비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양씨 일족에게도 특별한 배려를 하였습니다.


 양귀비의 6촌 오빠 양소(楊釗)는 별로 품행이 좋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민첩하고 요령있는 행동으로

 점차 현종의 신임을 받아 현종으로부터 국충(國忠)이라는 이름을 받았습니다.


그 후 재상 이림보와 대립하였고 이림보가 실각한 후에는 안록산과도 대립했던

양국충이 바로 양귀비의 6촌 오빠입니다.


양귀비도 질투심이 몹시 강한 여자였다고 합니다.


 현종 황제로서도 그녀의 강짜에는 두 손을 바짝 들을 지경이었는데 역사적 기록에 의하면 양귀비의

 이 같은 질투심이 원인이 되어 두 차례나 현종으로부터 폐출된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폐출된 양귀비는 사가에 돌아와 반성하는 기색도 없이 허구한 세월을 울음으로 지샐 뿐이었는데 

양씨 일족들은 잘못하다간 자신들에게도 화가 미칠까 두려워 전전긍긍하여 갖가지 대책을

마련하기에 여념이 없었다고 합니다.


한편 현종은 현종대로 한 때의 노여움으로 양귀비를 폐출시키긴 했으나 그녀가 없는 궁정은

 마치 무덤과 같이 느껴져 하루 세 끼의 식사조차 목구멍에 넘어가지 않는 나날을 보냈는데 

현종의 이 같은 심정을 알아차린 환관 고역사는 두 사람을 다시 결합시킬 공작을 폅니다

.

우선 현종의 이름으로 어선(御膳)을 양귀비에게 보내도록 하였습니다.


현종이 내리는 어선을 받은 양귀비는 곧바로 자신의 칠흑 같은 머리를 잘라 이를 곱게 묶어

 고역사에게 건네주며 눈물을 흘리며 말하였는데


 “이제 나는 죽음으로써 내가 지은 죄를 보상하려 합니다.


둘러보건대 나의 모든 것은 폐하께서 하사하신 것일 뿐, 오직 이 검은 머리만이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것입니다.


이것을 폐하에게 바쳐 오늘 내가 폐하와 영원히 이별하는

 마음을 표할까 합니다.”


고역사가 바치는 칠흑 같은 머리를 본 현종은 양귀비를 용서하여

 다시 궁중으로 불러들였습니다.


두 사람은 본래의 관계를 회복했음은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콧대가 높은 양귀비라도 두 차례나 폐출된 일에는 충격을 받았음인지

 이것저것 자신의 장래 문제를 걱정하게 되었습니다.


천보 10년(751) 칠월 칠석날에 있었던 일로 현종은 화청궁에 거둥하여 장생전에서 양귀비와 함께

 노닐고 있었는데 밤도 깊어 하늘에는 은하수가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었건만 웬일인지 칠석의 하늘을

 쳐다보고 있던 양귀비는 갑자기 흐느껴 울기 시작하였습니다.


현종은 왜 우느냐고 달래듯 물었으나 양귀비는 그저 울음만을 계속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이윽고 양귀비는 눈물을 닦으면서 띄엄띄엄 그의 심정을 털어 놓기 시작했는데 “하늘에 반짝이는

 견우성과 직녀성, 얼마나 아름다운 인연입니까. 저 부부의 지극한 사랑, 영원한 애정이 부럽습니다.

저 부부와 같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생각이 듭니다….


역사에도 자주 기록되어 있지만 나이가 들면 가을 부채처럼 버림을 받는 여자의 허무함,

 이런 일들을 생각하면 서글퍼 견딜 수가 없사옵니다….”


양귀비가 눈물을 흘리며 말하는 한마디 한마디는 현종의 마음을 아프게 찔렀습니다.


그리하며 두 사람은 손을 서로 붙잡고 그들의 영원한 애정을 하늘에서

 반짝이는 별에게 맹세하였습니다.


“하늘에서는 비익조(比翼鳥)가 되고, 땅에서는 연리지(連理枝)가 될지이다.”


‘비익조’는 중국 전설에 나오는 새로 암수가 한 몸이 되어 난다는 데서 사이가 좋은 부부를 상징하고,

 ‘연리지’ 또한 중국 전설에 나오는 나무로 뿌리는 둘이지만 가지는 합쳐져 하나가 된다는 데서

부부의 깊은 애정을 상징합니다.


현종과 양귀비는 이 ‘비익조’와 ‘연리지’처럼 영원히 떨어지지 않을 것을 맹세한 것이지요.




























"하늘에서는 비익조(比翼鳥)가 되고, 땅에서는 연리지(連理枝)가 될지이다.”를

 연상케하는 저승에서 현종과 양귀비의 재회 장면 




757년 당나라 군사가 장안과 낙양을 탈환한 후 현종은

촉의 성도에서 장안으로 돌아왔습니다.


장안으로 돌아오는 도중 마외역에 접어든 현종은 이곳에서 숨진 양귀비를

그리워하며 마음 아파했다고 합니다.


 장안으로 돌아와 궁중에 거처하면서도 현종은 그토록 아리따웠던 양귀비의 모습이 잊혀지지

 않아 조석으로 눈물을 흘리며 세월을 보냈다고 합니다.


개원 연간의 번영을 구가하던 현종도 그 만년에는 슬픔과 통한으로 세월을

 보내면서 78세에 결국 타계하였습니다.






※ 참고자료: 당 헌종시대에 활약한 고선지는 고구려 유민 출신의 당나라 장수로 당의 서역 원정에

 큰 공을 세웠으나 751년 탈라스 전투에서 이슬람 연합군에 패했습니다.


755년 안녹산의 난에 토벌군의 부원수로 수도인 장안을 지켰습니다.


그러나 전투 중 모함을 받아 진중에서 참형되었습니다.


고선지의 서역 원정은 이슬람을 거쳐 서구 세계에 제지 기술과 나침반 등을 전하는

 계기가 되어 동서 문화 교류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