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7. 24. 21:38ㆍ나의 이야기
양귀비의 사치스런 삶 전경
안사의 난 시작 전경
안녹산의 반란 전경
당나라 체제를 붕괴시킨 안사의 난은 절도사 안녹산이 양국충과의 권력 다툼에서 밀려나자
그를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15만 대군을 이끌고 낙양을 함락했습니다.
이를 '안사의 난'이라고 하는데 이 반란은 당나라 쇠퇴의 전환점이자
중국 사회를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인구의 급격한 감소, 재정 적자의 악화, 민생 파탄, 균전제와 조용조제가 붕괴되는 등 당나라의
근간이 흔들리자 당나라는 존속을 위해 새로운 지배 체제로의 전환이 절실해집니다.
당나라는 현종 집권 초기에 '개원의 치'라고 일컬을 정도로 태평성대를 누렸습니다.
이 시기에 당은 인구가 크게 증가했고, 경제적으로도 크게 번성했으며, 당의 세련된 문화가
주변국에 널리 전파되어 동아시아 문화권이 형성됐습니다.
또한 수도 장안은 실크로드를 통한 서역과의 활발한 교역으로
국제 도시의 모습을 갖추었습니다
그러나 측천무후부터 현종에 이르기까지 자연재해와 관리들의 폭정, 귀족과 지주의
토지 겸병 등으로 농민들은 토지를 상실하고 유민으로 전락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곧 당나라의 재정 악화로 이어졌으며, 균전제의 기초 위에 운영되는
부병제의 붕괴로 이어졌습니다.
8세기 중반, 현종은 개원의 치가 무색할 정도로 정치에 무관심하고
향락만을 추구해 정사를 돌보지 않았습니다.
특히 745년에 양귀비를 맞이한 후부터 그 정도가 더욱 심해져 이런 현종을 대신하여 정사를
돌본 이가 구밀복검(口蜜腹劍)의 주인공인 이임보(李林甫)였습니다.
그는 매우 교활하고 간사하여 아첨을 잘했으며, 재상의 자리에 있었던
10여 년간 사리사욕만 챙겼습니다.
또한 귀족 세력을 견제하고자 무관을 경시하는 사회 풍조를 이용해 이민족 출신을
번진 절도사로 등용하자고 주장한 장본인입니다.
이리하여 이민족인 안녹산이 절도사로 임용되었습니다.
페르시아와 돌궐의 혼혈이었던 안녹산은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따라 돌궐 부락에서 생활했습니다.
716년에 돌궐에서 당으로 망명한 그는 당나라가 소수 민족을 변방의 군사로 모집할 때
군에 들어갔으며, 30대에 유주 절도사 장수규에게 발탁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소수 민족 출신으로 변방의 지리에 밝고, 여러 언어에 능통한 것을
적극 활용해 토벌 작전에서 많은 공을 세웠습니다.
742년에는 평로 절도사가 되었고, 744년에는 범양 절도사에 임명되었으며,
751년에는 하동 절도사까지 겸임하였습니다.
이로써 안녹산은 당 왕조 전체 군사의 40퍼센트에
가까운 병력을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안녹산이 이렇게 빠르게 승진할 수 있던 것은 그의 능력과 더불어 현종, 이임보,
양귀비의 전적인 신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안녹산은 권모술수에 매우 능한 인물로, 현종을 알현할 때 일부러
바보같은 언행을 일삼았다고 합니다.
그는 처음 태자를 만났을 때 짐짓 예를 알지 못하는 척
절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에 주위에서 절을 종용하자 그는 자신이 오랑캐라 예를 알지 못했으며
태자가 무엇인지 반문했습니다.
현종이 웃으면서 자신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될 인물이라고 알려 주자 안녹산은 세상에 황제는
오직 현종만 있는 줄 알았다며 그제야 태자에게 절을 올렸다고 합니다.
또 한번은 현종이 안녹산의 비대하고 축 처진 배를 가리키며
그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물었습니다.
이에 안녹산은 현종에 대한 충성심만이 가득 들었다고 아첨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는 현종뿐만 아니라 조정 대신들에게도 아첨하며 뇌물을 주었습니다.
특히 현종이 양귀비를 총애하자 안녹산은 출세를 위해 그녀에게 접근했는데 그는 이미 중년의
나이로 양귀비보다 무려 10여 살이나 위였음에도 그녀의 양아들이 되기를 자처했습니다.
안녹산은 때를 가리지 않고 궁궐을 드나들며 양귀비를 만났지만,
현종은 둘의 관계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752년, 재상 이임보가 세상을 뜨자 재상의 지위를 놓고 안녹산과 양국충 사이에
다툼이 벌어졌으나 양귀비의 영향으로 양국충이 재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안녹산은 양국충이 재상감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양국충이 재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양귀비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한편 재상이 된 양국충은 무려 40개가 넘는 관직을 겸직하면서
권력을 마구 휘둘렀습니다.
또한 안녹산을 경계하여 태자 이형과 함께 안녹산이 반역을 도모하려 한다고
진언하여 현종과 안녹산 사이를 이간했습니다.
그러나 현종은 양귀비를 총애하여 안녹산을 친아들처럼 여겼고
그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양국충과의 권력 다툼에서 밀려난 안녹산은 결국 반란을 일으켜
양국충을 몰아내기로 결정했습니다.
이에 그는 해, 거란, 실위, 말갈 등의 이민족으로 구성된 자신의 군대에서 이민족 출신 500여 명을
선발해 장군으로 삼고, 2천여 명은 중랑장으로 임명했습니다.
또한 이민족 출신 장군 32명을 한족 장군으로 대체했으며,
군량미 비축과 군마 사육에 매진했습니다.
이로써 안녹산의 군대는 당나라 중앙군을 훨씬 능가할 정도였습니다.
755년, 안녹산은 양국충 토벌을 명분으로 내세우고, 범양에서 거병하여
낙양으로 진격했습니다.
안녹산의 15만 대군은 평균 30킬로미터의 속도로 진군하여
33일 만에 낙양을 함락했습니다.
당시 당나라의 중앙군은 오랫동안 지속된 평화로 전쟁 대비를 전혀 하지 못했기 때문에
제대로 싸우지 못하고 동관까지 철수를 합니다.
동관은 이번 여행에서 황하강과 더불어 특별 선택 옵션으로 방문을 하였기에
다음 글에 올려드릴 생각입니다.
낙양을 점령한 안녹산은 756년에 대연(大燕)을 건립하고 스스로 황제가 되어
연호를 건무(建武)로 정합니다.
금위군의 반란에 의해 자살을 명받게 되는 양귀비 전경
안녹산이 장안을 향해 빠르게 진격하자 현종은 양귀비와 황족, 양귀비의 일족,
대신, 측근들을 데리고 사천으로 피란을 떠났습니다.
피란 행렬이 장안에서 약 60킬로미터 떨어진 마외역에 이르렀을 때 금위군 사이에서는
사태의 원인을 제공한 양국충에 대한 불만이 쇄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금위군은 쿠데타를 일으켜 양국충의 목을 베고, 급기야 현종의 거처를
포위한 채 양귀비를 죽일 것을 요구했습니다.
이에 현종은 양귀비에게 자결을 명합니다.
양귀비가 죽은 10여 일 후 장안은 반란군에게 함락되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난을 진정시킬 방도를 찾지 못한 현종은 결국 태자 이형에게
황위를 물려주고 태상황이 되었습니다.
안녹산 휘하의 반란군은 내분이 일어나 자멸의 길을 자초하고 있었습니다.
장안 함락 후 안녹산은 건강이 매우 악화되었고 성격까지 광폭해져
지배자로서의 위엄을 상실한 상태였습니다.
이에 예전부터 안녹산에게 반감을 품은 엄장이 태자 안경서(安慶緖)와
환관 이저아를 부추겨 안녹산 암살을 모의합니다.
태자 안경서는 안녹산이 애첩 소생의 아들을 사랑해 황제 자리가 자신에게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을 가지고 있다보니 이에 협조하여 757년, 안녹산은 아들 안경서에
의해 자던 중 살해를 당합니다.
같은 해, 현종을 태상황으로 밀어내고 제위에 오른 숙종은 곽자의와 이광필을 재상에 임명하고,
회흘과 서역 여러 나라에 원조를 요청해 반란군에게 반격을 가하게 되고 당 왕조는
비로소 장안을 수복할 수 있었습니다.
이때 안경서의 부장 사사명(史思明)이 항복했으나
숙종은 이를 거짓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에 사사명은 758년, 반란을 일으켜 스스로 대연 황제에 올랐습니다.
이후 당나라가 안경서를 살해하고 761년에는 사사명이
자신의 아들 사조의(史朝義)에게 살해됩니다.
이로써 반란군은 완전히 분열되었는데 당 왕조는 반란군의 분열을 틈타 공격을 멈추지 않았고,
763년 사조의가 자결하면서 9년의 난에 종지부를 찍게 됩니다.
안녹산에서 안경서, 사사명, 사조의까지 이어진 '안사의 난'은 당나라가 번영에서 쇠퇴의 길로
접어드는 전환점이었으며, 더 나아가 중국 사회를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안녹산의 난을 평정한 후 장안으로 돌아온 현종은 개원성세를 이룩한 황제라는
것이 무색할 정도로 쓸쓸히 생을 마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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