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3. 29. 15:10ㆍ나의 이야기
분산성에서 내려다 본 김해 시가지 전경
구지봉과 허황후릉을 돌아보고 다음 코스로 향한 곳은 분산성이었습니다.
사실 어제 이 곳 김해로 내려 오면서 이 곳 김해에 대한 상세한 공부를 하고 온 것은 아니기 때문에
김해의 유적지에 관하여서는 백지상태였었는지라 김수로왕릉과 허황후릉,구지봉을 우선적으로
돌아 볼 수 밖에 없었는데 그 다음 코스를 잡기 위해서는 김해의 관광지도가 필요하였지만 ,
김해의 제일 유명한 수로왕릉과 허황후릉에서 조차도 김해 전역의 관광안내도는
비치가 되어 있지를 않았습니다.
사실 저는 이 점이 참 아쉽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지방 자치제가 되면서 각 지방 도시들 마다 그 지역을 알리려는 홍보가 대단하여 어느 도시든
유명한 관광지에는 그 지역 관광 안내도 비치는 필수가 되어 버린지가 오래인데 이 곳 김해는
전혀 그렇지가 않은 탓에......ㅜㅜ
김해시의 적극적인 관광 홍보 정책이 무척 아쉬웠습니다.
암튼 김수로왕릉에서 제일 높은 산이 바라보였고 그 산 정상부에 산성이 보이기에
이 곳은 역사적으로 가볼만한 가치가 있을 것으로 보여져 무작정 차를 산성쪽으로 몰았습니다. ㅎ
사충단 전경
'사충단(四忠壇)'은 김해시 동상동에 위치한 경남기념물 제99호로 예전에는 김해읍성 안에 있다가
지금의 이 위치로 이전해 왔는데, 임진왜란(1592)때 김해성 싸움에서 전사한 의병장 김득기(金得器),
송빈(宋賓), 이대형(李大亨), 류식(柳湜)을 기리기 위해 1871년(고종 8) 고종의 명으로 건립된 사당으로
김해 동상동에 있는 연화사의 앞 마당이 예전에 사충단이 동상동에 있을 때 위치했던 자리이고, 동상동시장
안쪽에 들어가 보면 임진왜란 때 유식 의병장이 성안에 있는 성민들이 마실 식수를 구하려고 지성으로 노력한
끝에 하늘이 점지해 주신 '유공정'이란 샘터 유적이 있고 맞은편 서상동 골목안으로 들어가 보면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순절한 송빈 선생에 대한 순절비도 있습니다.
김득기(金得器)는 1549년 김해 거인리에서 5대 독자로 태어났으며 무과에 급제했으나 당파싸움으로
세상이 시끄러워지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내려와 독서로 소일하던 중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김해성으로 가 동문을 지키면서 왜군과 싸우다가 전사하였습니다.
류식(柳湜)은 1552년 김해 대동면 마산마을에서 태어났으며, 학문이 높아 벼슬에 나아갈 수
있었음에도 책과 더불어 사는 선비의 길을 택하였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해성으로 가서
서문을 맡아 싸우다 전사하였습니다.
송빈(宋賓)은 1542년 중종 임금 때 절제사를 지낸 송창의 아들로서 진영 하계리에서 출생했는데
그는 어릴 때부터 신동 소리를 들었으며 침착한 성품으로 효성이 지극했다고 합니다.
김해성 남문을 지키며 일본군을 물리치다가 성이 함락된 후 김해 서상동에 있는
지석묘로 가서 순절했다고 합니다.
이대형(李大亨)은 1543년 김해 활천에서 태어났으며 학문과 인품은 마을에 널리 알려졌으나
벼슬길에는 나가지 않고 오직 학문에만 전념했다고 합니다.
김해성 북문을 지키다가 전사하였습니다.
이들 사충신의 의로운 죽음은 임진왜란 의병 봉기의 본보기가 되었으며,
매년 사충신이 순절한 음력 4월 20일 네 분의 영령을 기리는 추모제를 지낸다고 합니다.
1708년(숙종 34) 김해부사 이봉상의 발의로 김해부민들이 이들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김해의 진례에
송담사(松潭祠)와 송담서원(松潭書院)을 세우고 송빈 · 이대형 · 김득기 3충신의 위패를 모셨습니다.
1833년에 송담서원은 국가로부터 ‘표충사(表忠祠)’라는 사액을 받았으나, 1868년(고종 5)에는
송담서원 표충사가 서원 훼철령에 따라 훼철되었습니다.
그 후 1871년 왕명으로 사충단을 설치하여 4충신을 향사하다가 1995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
세우고 송담서원과 표충사를 복원했다.
비각 이외의 건물은 이때 신축되었는데 비각의 지붕에 여의주를 물고 사방을 지키고 있는
네 마리의 용은 4충신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김해시 동상동 873번지에 있었던 것을 김해시의 도시계획으로 인해 227번지와 228번지로
옮겨 세웠다가 나중에 다시 동상동 161번지 일원으로 확장 이전하였습니다.
사충단은 1990년 12월 20일 경상남도 기념물 제99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산성으로 향하던 분산성 임도길 진입 부근에서 발견된 사충단으로
잠시 차를 세우고 살펴봅니다.
사충단 안내판
사충단은 송담서원 후면 언덕에 자리잡은듯 바라다 보이지만 출입문이
굳게 닫힌 탓에 담장 너머로 몇 컷을 담아 봅니다.
우리나라 서원의 대표적 건축물 배치 구조인 동제와 서제가
서원 양옆으로 지어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충단에서 바라다 본 김해 시가지 전경
일부 임도 구간은 폭이 좁은 시멘트로 포장이 되어 있었고 정상부에 이르러서는
비포장 임도 구간이었지만, 제 차가 상시 사륜인 까닭에 정상부까지 욕심을
내어 애마를 몰아 봅니다.ㅎ
이럴 때에는 제 애마가 쓸만하다는 생각이.....ㅋㅋ
분산성 안내표지판
분산성 사적(제66호) 표지석
분산성은 사적 제66호로 성곽 둘레 약 929m 규모의 산성으로 김해의 북동쪽에 있는 분산에 위치하여
낙동강 하류에 형성된 넓은 평야를 한 눈에 바라볼 수 있습니다.
산꼭대기에 있는 평탄한 지형을 따라 그 주위에 남북으로 긴 타원형을 이루는 테뫼형 산성으로
곳에 따라서는 천연의 암벽을 그대로 이용했는데, 특히 남서부는 높은 암석들이
솟아 있어서 매우 험준합니다.
성벽은 산꼭대기의 평탄한 곳에서 약간 내려온 경사면에 축조하였는데 높이가 3~4m 정도로
거의 수직에 가깝게 쌓아 올렸습니다.
성내에 이르는 통로는 산성 서편에 있는 계곡을 거쳐 북쪽 후면을 통해
들어가는 길을 사용했던 것 같습니다.
이곳에 세워진 정국군박공위축성사적비에 따르면 이 산성은 조선 초에 박위(朴葳)가 옛 산성에 의거해
수축한 뒤 임진왜란 때 무너진 것을 1871년(고종 8)에 다시 지금의 성벽으로 개축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산성은 삼국시대 산성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테뫼식을 따르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보아
처음으로 축조한 때가 삼국시대일 것으로 추측됩니다.
즉 가락국의 중심 근거지를 이룬 산성으로 여겨지는데 그런 이유로는 인접한 곳에 가야의 고분군과
수로왕비릉, 구지봉이 위치하고 있어 그러한 추측의 가능성을 높여주고 있습니다.
현재 성 안에 우물과 해은사란 암자, 그리고 민가가 있으며
산꼭대기에는 3기의 비석이 있습니다.
해은사 안내판
김해 분산 기슭에 위치한 '성조암'은 가락국 2대 거등왕이 수로왕의 왕생극락을 빌기 위해 창건했다고
전하여 오며 분산성 내에 위치한 '해은사'는 허왕후와 장유화상이 멀리 인도의 아유타국에서 가락국까지
오는 동안 거친 풍랑과 숱한 역경을 막아준 바다 용왕의 은혜에 보답하는 뜻으로 절경인 이곳
만장대에 사찰을 지었다고 합니다.
해은사는 경상남도 지정 전통문화보존지정사찰 103호 입니다.
영산전 전경
해은사의 성보문화재로는 중심 법당인 영산전(靈山殿)을 비롯하여 그 좌측에 김수로왕과 허왕후의 진영을
봉안하고 있는 대왕전(大王殿), 납골당의 역할을 겸하고 있는 지장전(地藏殿) 그리고, 산신각(山神閣)과
요사채 등이 있으며, 청나라에서 추사선생이 이운해 온 진신사리를 김해 연화사와 각 3과씩 나누어
봉안하고 있는 진신사리탑이 있습니다.
해은사를 세운 이후 전란과 화재로 몇 차례의 소실과 복원을 거듭해 오다 현재의 큰 법당인
영산전을 300여 년 전 재중건하였다고 합니다.
대왕전 전경
영산전 내부 전경
대왕전
영산전에 우측에 위치하며 영정을 모시는 곳이기 때문에 성조암의 성조각과 마찬가지로
화려한 단청 등이 없습니다.
대왕전 내부 전경
해은사에는 다른 사찰에서 찾아볼 수 없는 대왕전(大王殿)이라는 전각이 있는데, 대왕이라 함은
바로 수로왕을 의미하는 것으로 전각 내부에 수로왕과 허황후의 진영을 봉안하고 있으며,
수로왕의 영정 옆에는 허황후가 망산도에서 가져왔다는 '봉돌'이라는 영험한 돌이 있는데,
이 돌이 남자에게는 재복을 여자에게는 아들을 점지해 준다고 전하여 집니다.
이 영정은 200년전 조선 후기에 제작된 영정으로 현존하는 영정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이 영정을
표본으로 하여 다른 영정들을 그리고 있는데 본래 성조암에서 모시던 원본 영정이 있었는데, 성조암이
극도로 피폐해지자 영정 보관이 어려워 아마 대왕각이 있는 이곳 해은사로 영정을 이전 보관했던
모양으로 이 것이 2000년도에 도난을 당해 버리자 해은사 대왕각에 모시던 이 영정이
표준 영정이 되었다고 합니다.
수로왕과 허왕후의 영정은 이 곳 말고도 수로왕릉의 숭정각과 가락박물관에는 두 종류의 영정이
있으며 그외 다른 박물관들에도 영정이 많이 걸려 있습니다.
김수로왕 진영
김수로왕 진영 아래 제가 진영을 담는 모습이 찍힌 탓에
수로왕의 후손임을 증명하는 느낌이....ㅎㅎ
후손인 탓에 닮았다는 생각은 안드시는지요?
허황후 진영
산신각전경
대왕전과 공양간 사이에 있는 계단으로 해서 대왕전 뒷쪽으로 올라가면 보이는 '산신각'전경으로
산신각 좌측에 거시기 모양을 한 커다란 바위가 서 있습니다. 이 바위는 자식을 원하는 사람들이
지극정성으로 소원을 빌고 난 후에 동전을 바위에 윗 부분에 붙여서 동전이 그대로 붙어 있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전설이 있는 '남근석'이랍니다.
산신각 내부 전경
산신각 안내판
파사석탑적멸보궁의 연혁 안내판
분산성 북쪽 타고봉(3330m) 정상부에 세워진 파사석탑
타고봉에서 내려다보는 김해 해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였던 김건수(金建銖·1790~1854)가 김해부사 시절에 김해의 아름다운 풍경
8 가지를 '금릉팔경'이라는 시로 남겼는데, 김해의 진산인 분산의 남쪽 봉우리(타고봉)에서 빛나는
달빛을 이른 '打鼓淸月(타고청월)'이 금릉팔경 중의 하나이며 그 타고봉이 2000여 년 전 인도 아유타
왕국에서 시집온 허왕후가 고향이 그리울 때 올라 위안을 얻었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은 이 곳에서 지는 저녁 노을을 바라다 볼 수 없기에 짧은 여행 시간이 아쉽기만 합니다.
'만장대'는 '타고봉' 이라고도 하는데, 옛날에 왜적들이 쳐들어 오면
북을 쳐서 알린데서 유래하였다고 합니다.
분산성 성곽 전경
이런 가파른 비탈에 상당한 높이를 지닌 산성이었기에 임진왜란 때에는 외적의 침입에
큰 역활을 할 수 있었으며 그 오래 전 가야시대에는 김해평야를 다 조망할 수 있었기에
군사적으로나 전략적인 요충지 역활을 담당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늘은 만장대를 내었고(天生萬丈臺)/ 나는 천년수를 심노라(我植千年樹)/임진년 추운 봄날에(壬辰孟春)/
정기만이 쓰다(鄭琪萬)' 라는 호방한 한시가 봉수대 옹벽 바위에 새겨져 있습니다.
분산성 봉수대
만장대 표지석
분산성 만장대 휘호와 낙관
봉수대 천년수 옆에 만장대 표지석이 서 있었는데, 흥선대원군이 분산성을 외적을 물리치는
전지기지로서의 역할을 하기에 용이한 '만 길이나 되는 높은 곳에 쌓은 성벽(대)' 라고 '만장대'라
칭하였기에 '만장대' 란 일정 지역이 아니고 야트막한 김해평야에서 바라 봤을때 높은 산인 분산을
들러 싼 분산 성벽 전체를 '만장대'라 칭하던 것이 아닐까란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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