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성씨의 뿌리를 찾아 가는 여행 김해 (2017.3.5 수로왕비릉과 구지봉)

2017. 3. 16. 12:26나의 이야기







수로왕비능 전경(사적 제47호)




가야의 시조 수로왕의 왕비무덤으로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의하면, 왕비는 성이 허, 이름은

 황옥으로 알려져 있으며, 원래 인도 아유타의 공주로 16세에 배를 타고 와서

수로왕의 왕비가 되었다고 합니다.


 9명의 왕자를 낳았는데, 그 중 2명에게 왕비의 성인 허씨 성을 주어

지금도 그 후손이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세종 28년(1446)에 수로왕릉과 함께 보호구역이 넓혀졌으며,

임진왜란 때 왜구들에게 도굴되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지금의 비석과 상석 등은 인조 25년(1641)에 다시 정비하면서 설치하였다고 합니다.

왕릉에 비해서는 시설이 소박한 편이고 수로왕비릉이라고 오래전부터 전해져 왔으므로

수로왕릉과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졌다고 본다면, 내부의 구조는 널무덤(토광묘) 또는

돌덧널무덤(석곽묘)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지정면적 3만 2,920㎡. 무덤의 지름 16m. 높이 약 5m로 왕비는 인도 아유타국(阿踰陀國)의 공주로

 성은 허(許), 이름은 황옥(黃玉)으로 대형의 원형 토분이나 특별한 시설은 없습니다.


 능의 전면에는 장대석(長大石)으로 축대를 쌓고 주위에는 범위를 넓게 잡아 얕은 돌담을 둘렀습니다.

능 앞에는 1647년(인조 25) 수축 때 세운 '가락국수로왕비 진주태후허씨지릉'이라고

 2행으로 각자(刻字)한 능비가 있습니다.


생전의 수로왕비 허황옥의 모습은 어떠했을까요?

그리고 왕비가 태어나고 자란 아유타국이

 어떤 나라였었는지 궁금증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문제의 아유타국을 인도 간지스강 중류에 있는 “아요디아”로 보는 설과,

 이 아요디아 왕국이 태국 메남강 유역에 건설한 식민국 “아유티야”로 보는 설외에도

 몇 가지 설이 더 전해지고 있습니다.


박창희님이 지은 “살아있는 가야사 이야기”에 따르면 고고학자 김병모님은 쌍어문에 대한

조사를 심화하여 중국보주(普州)출자설을 내놓았는데 허황옥 일행이 쌍어문을 나라의 문장으로

 삼았던 인도의 아요디아 국에서 난을 피해 중국의 보주로 갔다가 양쯔강-황해-남해-김해로

 이어지는 해로를 따라 가락국으로 이주했다는 것이며,또 인제대 이영식교수는 허황옥이 인도의

 아유타국에서 온 것이 아니고 평안도나 황해도에서 김해로 온 이주민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허황옥이 한반도 서남해에 있던 왜(倭)출신일 것이라는 역사학자 이희근님의 주장이

 눈길을 끄는 것은 최근에 방영이 종료된  KBS의 역사드라마 “근초고왕”에서 왕의 큰 아들이

 아유타국의 공주와 결혼하는 것으로 나오는데 이 드라마에서는아유타국을

 왜국의 한 나라로  그렸습니다.

  

  이상의 다섯 설 가운데 어느 설이 되었든 허황옥의 사랑의 여로는 당시로는 목숨 건 험난한

 바닷길이어서 수로왕과 결혼하는 것으로 결말을 맺은 것은 잘 되었다 싶습니다.


 삼국유사는 허황옥을 맞으러 가는 길을 “드디어 유천간을 시켜 날랜 배를 몰고 준마를 끌고 가

 망산도에서 기다리게 하고, 신귀간에 분부하여 승점(乘岾)으로 가게 했다”고 자세히 적어놓았습니다.

















주차장에서 바라다 본 수로왕비능 홍살문과 출입문 전경


(김수로왕능과 수로왕비능은 입장료 및 주차비 무료)















수로왕비능 안내판
















구남문




















숭보재 전경














파사각 전경















파사각















파사석탑(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 227호)


파사석탑으로 태풍을 막아준다하여 일명 진풍탑이라고도 하며 김해시 중심에 있었던

 호계사에서 옮겨 온 것이라고 합니다.


문화재 자료227호로 지정되어 있는 이 파사 석탑은 허황후가 인도에서 배를 타고 올 때에

 싣고 왔다고 전하여 지는데 풍랑을 막아주는 역활을 한 신비한 돌로 알려져 있습니다.

















수로왕비능 전경



높이 5m 정도의 원형 봉토무덤으로서, 무덤의 밑부분에 특별한 시설은 없습니다.

 무덤 주위에는 얕은 돌담을 4각형으로 둘러 무덤을 보호하고 있으며, 앞 쪽에는

 긴 돌을 사용하여 축대를 쌓았습니다.


중앙에는 비석이 세워져 있는데, ‘가락국수로왕비 보주태후허씨지릉’이라는

 글이 2줄로 새겨져 있습니다.


















구지봉으로 향하는 도로



















천강육란석조상의 이전에 대한 안내판


수로왕능의 연지로 옮겨져 있다고 하였으나 제가 오늘 돌아 본 연지에는 없었던 생각이.....ㅜㅜ















사적 제429호 구지봉 전경















구지봉 고인돌(구지봉석이라고도 함)

















구지봉 전망대















구자봉석 이란 글자는 한석봉의 필체로 알려져 있습니다.

















구지봉 고인돌에 대한 안내판















구지봉에서 내려 다 본 김해시내 전경














구지봉 전경



구지봉은 봉우리의 모양이 넓은 원형으로, 마치 거북이가 엎드린 형상과 비슷하답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가야 건국설화에 따르면, 가야 땅을 다스리던 아홉 추장이 구지봉에

 모여 제사를 지내는데, 문득 하늘에서 알 여섯 개가 담긴 금합이 붉은 실에 매달려 내려왔는데

이튿날에 그 알 여섯 개가 차례로 깨어지며 아이가 하나씩 나왔다고 합니다.


그 아이들은 하루가 다르게 부쩍부쩍 자라나서 열흘째가 되자 모두 키가 아홉 자가 넘는 어른이

되었으며, 그 가운데 맨 먼저 나온 이가 가락국의 시조인 김수로왕이 되었다고 전하여 집니다


산봉우리 동쪽에는 수로왕비 허왕후릉(許王后陵)이 자리 잡고 있고, 구지봉 정상에는 1976년에

세운 여섯 개의 알과 아홉 마리의 돌거북으로 구성된 천강육란석조상(天降六卵石造像)이 있었다고

하는데 문화재의 성격과 안맞아 이 석조상은 김수로왕릉 경내의 연지 부근으로 옮겼다고 하지만

 오늘 제가 연지를 부근을 찾아 보았으나  행방을 잘모르겠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이 거북의 목에 해당하는 부분에 고의적인 도로를 개설하여 거북 모양의

 원래 모습을 훼손되었다가 근자에 이를 복원하였습니다.


김수로왕능과 수로왕비능은 임진왜란때 왜구들에 의하여 파헤쳐지고  또 다시 일제 강점기에

수난을 입었다고 생각하니 일본 황가는 즈그들의 조상들과 연관이 있는 조상의 무덤까지

파헤친 천벌을 받으리란 생각이듭니다. 


제가 이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저희 조상님들께서 일본의 황가와 깊은 연관이 있으리라는

 역사학적 인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 아남 김향수 회장님이 쓴 "일본은 한국이더라" 참조) 


김해 구지봉은 2001년에 사적 제429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김해 구지봉 안내판















구지봉 하단 도로변에 세워진 영대왕가비


가락국의 수로왕 때 구간(九干: 아홉 추장)에 의해 지어진 고대 제신(祭神) 가요의 하나로

수로왕을 맞기 위해 구지봉을 파헤치면서 부른 굴봉제토(屈峯堤土)의 주문적(呪文的) 노동가로,

서사적인 노래입니다.


《삼국유사》의 '가락국기’에 전하여지며 일명 '영신가’라고도 한다.


구지가는 작자·연대 미상의 고대가요. 영신군가(迎神君歌)·구하가(龜何歌) 또는

구지봉영신가(龜旨峰迎神歌)라고도 부릅니다.


원가(原歌)는 전하지 않으나, 관련설화와 4구체의 한문으로 번역된 것이

 삼국유사 권2 가락국기조에 전하여 옵니다.


이에 의하면 서기 42년 3월 계욕(禊浴)의 날에 북쪽 구지에서 수상한 소리로 부른 것이 있었는데

 무리 200∼300명이 거기에 모였는데, 사람의 소리 같기는 한데 그 형상은 나타나지 않고

소리만 내어, “여기에 누가 있느냐?”라고 묻기에 구간(九干) 등이 “우리가 있소.”라고

대답하자, “내가 있는 곳이 어디냐?”하고 재차 물어오자, 구간이 다시 “구지요.”

라고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이에 “하늘이 나에게 명하기를 이곳에 와서 나라를 새로 세워 임금이 되라 하였기에

여기로 내려왔다. 그러니 너희들은 모름지기 산봉우리를 파서 흙을 모으며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어놓아라. 만일 내어놓지 않으면 구워 먹으리라.

(龜何龜何 首其現也 若不現也 燔灼而喫也)’고 노래하면서 춤을 추어라.

그러면 곧 대왕을 맞이하게 될 것이고, 이에 너희들은 매우 기뻐서

 춤추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답니다.


구간들이 그 말과 같이 행하고 모두 기뻐하면서 노래하고 춤추었는데 얼마 후

자주색 끈이 하늘로부터 드리워져 땅에 닿았다고 합니다.

그 끝을 찾아보니 붉은 보자기에 금합자(金合子)가 싸여 있었는데 열어보니 그 속에는

 해와 같이 둥근 황금빛 알 여섯개가 있어 이를 본 모든 사람이 놀라고 기뻐하여

 함께 수없이 절을 했다고 합니다.


조금 있다가 다시 보자기에 싸서 아도간(我刀干)의 집으로 돌아와 평상[榻]위에 두고는

 무리들이 모두 흩어졌다가, 하루가 지난 다음날 아침에 다시 모여 금합자를 열어보니,

 알 여섯개가 모두 동자로 변했는데, 용모가 매우 준수하였다고 합니다.


<구지가>와 그 신화에 대한 해석은 매우 다양한데 신화를 영신제의(迎神祭儀)로 보고

신탁의식(神託儀式)·희생의식·영신의식의 세 단계로 이루어졌다고 논의하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등극제의로 보고 신탁의식·귀복의식(龜卜儀式)·등극의식의 세 단계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기도 한답니다.


등극의식은 다시 하강-격리-재수용-등극의 과정으로 이루어졌다고 하는데 구지가는 이 세 단계

가운데 제2 단계에서 신탁에 의해 불린 주가(呪歌)로 보는 것이 통설이라고 합니다.


이 가요의 성격을 밝히는 데는 가창 뒤의 결과나 가사 자체의 분석도 중요하지만, 산문전승 중에 들어 있는

 ‘굴봉정촬토(掘峰頂撮土)’라는 행위전승의 풀이도 중요하다고 합니다.

그러한 이유로 이에 대한 견해도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영신군가 迎神君歌〉·〈구지봉영신가 龜旨峰迎神歌〉라고도 하며

가락국 시조 수로왕의 강림신화에 곁들여 전하여 집니다.


 원래의 노래는 전하지 않고 다음과 같이 4구체의 한문으로 번역된 것이

삼국유사의 가락국기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龜何龜何 首其現也 若不現也 燔灼而喫也"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만약 내놓지 않으면 구워 먹으리


옛날 가락국 사람들이 구지봉에 모여 왕을 맞기 위해 흙을 파며 함께 불렀다고 하는데

 이 노래의 해석은 사람에 따라 상당히 다른 견해를 보입니다.


잡귀를 쫓는 주문으로 보는 견해, 영신제의 절차 가운데 가장 중요한 희생무용에서 불린 노래라는 견해,

 원시인들의 강렬한 성욕을 표현한 노래, 즉 여성이 남성을 유혹하는 노래로 보는 견해가 그것 입니다.


 또 거북의 머리를 수로·우두머리·남근 등으로 해석하기도 하고, '구워 먹겠다'는 구절은

 우두머리 선정을 위한 거북점의 점괘를 얻기 위해 거북을 굽겠다는 뜻 혹은

강렬한 욕망이 깃든 여성 성기 등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내용과 형식이 비슷한 노래로, 신라 성덕왕 때 바다용에게 끌려간 수로부인을 구출하기

 위해 불렀다는 해가 (海歌)가 전해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