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8. 3. 19:27ㆍ나의 이야기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소장품 전
메소포타미아, 저 기록의 땅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지금의 이라크가 있는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사이의 비옥한 지대에 자리 잡았다.
기원전 3400~3000년 무렵 최초의 도시들이 탄생하였고, 쐐기문자를 발명해 기록을
남기기 시작했으며, 예술과 건축이 정교한 형태로 발전했다.
인류의 역사에서 이러한 중대한 문화 혁신이 일어날 수
있었던 바탕에는 신전이 있었다.
신전은 신을 모시는 성스러운 공간인 동시에 생산물이 모이고
재분배되는 경제활동의 공간이었다.
복잡해지는 경제생활을 뒷받침하기 위해 사용한 쐐기문자 점토판과 인장에는
고대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의 관심사와 세계관이 생생하게 담겨있다.
이 전시에서 소개하는 기원전 3500년대에서 기원전 500년대 사이에 만들어진
전시품은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의 창의성과 높은 기술력을 보여준다.
원통형 인장과 장신구, 통치자의 상에서 드러나는 개인의 정체성에
대한 관념은 복잡하고 세심하게 발전했다.
금속, 보석용 원석, 원목과 같은 희귀한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광범위한 주변 지역과 활발하게 교류하였다.
세계문화관 "메소포타미아"실은 미국의 메트로폴리탄박물관과 공동으로
기획하였으며 2024년 9월 29일까지 운영된다.
이 번 전시가 인류 역사에 큰 자취를 남긴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문화적 혁신과
뛰어난 기술, 그리고 그들의 삶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문화 혁신
기원전 3500년 무렵부터 메소포타미아 남부에서는 농업을 기반으로 하는 정착 촌락들이 확대되고
노동 분업화로 생산력이 늘면서 인구가 증가하자 신전이 중심이 된 도시 공동체와 이를 운영할
권력이 생겼다.
이러한 변화로 사람들이 주변 환경이나 사회와 관계를 맺는 방식이 근본적으로 달라졌다.
또한 쐐기문자 체계를 창안하여 교역과 거래의 내용을 기록하였을 뿐만
아니라 추상적인 개념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이러한 복합 사회의 모습이 최초로 나타난 도시가 이라크 남부의 우룩이다.
그 이름을 딴 우륵시대(기원전 약 4200~3000년)에는 지금의 시리아, 터키 남부,, 이란 서부를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고대 서아시아 전 지역에 이러한 변화가 퍼져 나갔다.
초기 왕조 시대(기원전 약 2900~2350년)에 독립적인 도시국가들이 메소포타미아 전역에 등장하였다.
수메르어로 점토판 문서와 왕들이 남긴 명문이 작성되었고, 새로운 형태의 예술과 건축이 나타났다.
신전에 물건을 봉헌하여 신심을 표현하는 풍습이 있어 일상용품부터
정교한 상까지 다양한 물품을 신전에 바쳤다.
전형적인 신전 건축의 모습이 확립되었고 더불어 건축과 관련된 의례가 생겨났다.
원통형 인장은 행정 업무를 위한 도구이자 개인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표지로
이전에 등장했던 도장형 인장을 빠르게 대체했다.
최초의 도시
메소포타미아 남부 지역에서 기원전 3500~3000년 사이에 일어났던
중대한 사회 문화적 변화는 "도시혁명"으로 이어졌다.
농업이 발전하고 생산물을 재분배하는 경제 체제가 도입되면서 사람들은 자신이 생산하지 않는
물품과 서비스를 얻기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 의지하게 되었다.
경제활동과 지적 활동의 도구로 문자를 만들어 활용하면서 인간과 지식과의 관계 역시 변화했다.
이러한 변화는 고대도시 우륵에서 제일 먼저 나타나 고대 서아시아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이와 발맞추어 소원성취를 기원하며 봉헌한 상, 궁전 벽을 장식하는 거대한 부조, 원통형 인장,
제의에 사용되는 물품 등 새로운 형태의 예술과 거대한 건축물이 급격하게 늘어났다.
사자벽돌 패널
기원전 약 604~562년 신-바빌리 시대 바빌리출토, 구운 점토에 유약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소장
이쉬타르 여신을 상징하는 사자가 표현된 벽돌벽의 일부이다.
청금석처럼 반짝이는 파란색 배경에 사자가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
표면에는 유약을 발랐다.
이 같은 사자상 120구가 나부쿠두리우쭈르 2세가 세운 이쉬타르 문에서 "신년축제의 집"
비트 아키투까지 이어지는 행렬길을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아쉬타르 문의 정면도 아다드 신과 마르둑 신을 상징하는
575구의 황소와 용으로 꾸며져 있다.
제국의 시대
기원전 1000년 전후는 한 때 우세했던 정치 세력들이 멸망해 메소포타미아,
지중해 동부와 이집트에 이렇다 할 세력이 없는 기간이었다.
이 권력 공백기 뒤에 신. 앗슈르제국(기원전 약 911~612년)과
신. 바빌리 제국(기원전 약 626~539년)이 나타났다.
신.앗슈르제국의 미술은 님루드, 코르사바드, 니네베 등 제국의 수도에 세워진
궁전을 장식한 대형 석판 부조를 특징으로 꼽을 수 있다.
부조에는 왕의 군사 원정 장면, 정복당한 민족이 추방되는 모습,
앗슈르의 우월함을 보여주는 광경이 묘사되었다.
앗슈르 제국이 모으고 생산한 금은제 그릇, 상아가 상감 세공된 가구, 장신구 등의
사치품 역시 제국이 부조를 통해 드러내고 싶어 한 강성함, 우월함을 보여준다.
신. 바빌리 제국은 우수한 건축으로 이름을 떨쳤다.
신. 바빌리 왕들은 메소포타미아에서 가장 오래되고 성스러운 도시 가운데 하나이자
"신들의 문"이라는 뜻을 가진 도시 바빌리를 재건했다.
양질의 벽돌로 만든 건축으로 명성이 높았던 이 시기의 바빌리 인들은
벽돌 제작과 건축 기술을 새로운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한 면에 색을 넣은 벽돌들을 조합해 만든 다색의 부조 조각은
거대한 크기로 바빌리의 벽을 장식했다.
사자와 무슈후슈 용으로 장식한 이쉬타르 문이 가장 유명하다.
이 시기 바 빌리는 고대 세계에서 불가사의로 불릴 만큼
경이롭고 아름다운 도시가 되었다.
앗슈르의 왕제자
기원전 약 704~681년, 신~앗슈르 시대, 니네베출토 설화석고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소장
니네베에 있는 신악하메리바 왕의 "대적할 자가 없는 궁전"을 꾸몄던 부조로
긴 수염과 의복, 장신구로 미루어 지위가 높았던 인물을 표현했다.
등까지 길게 늘어진 천이 달린 머리장식은 그가 앗슈르의 왕세자라는 사실을 상징한다.
표면이 마모되어 정교한 세부 표현은 대부분 사라졌는데, 특히 왕세자의
얼굴은 누군가 의도적으로 훼손한 것으로 보인다.
조공 행렬에 선 외국인 마부
기원전 약 721~705년 신-앗슈르시대 코르사바드 출토, 설화석고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소장
말 두필을 끄는 마부를 묘사한 부조이다.
마구의 정교함이 돋보이는데, 굴레를 앗슈르식 장미 장식이 있고 이마 장식에서
술이 내려오며 머리 위에는 근사한 문장이 보인다.
마부는 차림새와 머리모양으로 보아 앗슈르인이 아닌 외국인이다.
이주보는 앗슈르에 조공을 바치는 외국 사절단의 모습을 담은 큰 조각의 일부이다.
맹견상
기원전 1000년대 중반, 카슈 시대 이라크 남부 출토, 구운 점토에 채색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소장
개는 메소포타미아 예술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다.
점토로 빚어 구운 이 맹견 상은 내부가 비어있고 표면에 칠했던 안료가 일부 남아 있다.
카슈 왕조의 장인들은 점토를 다루는 데 능했는데 근육질의 몸통과 , 얼굴의 주름,
실을 꼰 형태의 목줄에서도 그 기술을 엿볼 수 있다.
머리 위의 구멍은 부대를 상징하는 깃발을 꽂는 용도로 썼을 가능성이 있다.
앗슈르나찌르아플리 2세의 명문을 새긴 쐐기문자 석판
기원전 약 883~859년 신-앗슈르 시대 님루드 출토, 설화석고 메트로풀리탄박물관 소장
앗슈르나찌르아플리 2세 때의 석판으로 왕의 여러 칭호와 군사적 위업을 적고,
님루드에 새로 지은 북서 궁전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동일한 명문이 궁전의 알현실과 방의 입구를 표시하는 부재 등 님루드에서
여러 건 확인되어 "표준명문"이라고 불린다.
앗슈르나찌르아플리 2세는 전쟁을 치르면서 엄청난 공물과 전리품을
거둬들여 앗슈르를 부유하게 만들었다.
낫칼
기원전 약 1307~1275년 중기 앗슈르 시대 메소포타미아 북부 출토.
청동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소장
중기 앗슈르 왕 아다드-니나리 1세(기원전 1307~1275년 재위)의
명문이 칼날 양면에 있는 청동제 낫칼이다.
메소포타미아 예술에서 곡선 형태의 칼은 권위를 상징했기 때문에
신이 나 왕이 칼을 든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이 칼은 실제 전투용이 아니라 아다드-니라리 왕이 의례 때 사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앗슈르 제국의 예술
기원전 9세기 초, 서아시아의 지중해 동 해안에 정치. 사회적 혼란기가 끝나고
앗슈르 제국이 메소포타미아의 패권을 차지했다.
앗슈르나찌르아플리 2세(기원전 883~859년 재위)의 통치 아래 앗슈르 제국은
중기 앗슈르 시대 (기원전 약 1400~1000년) 때의 영토 대부분을 되찾았다.
앗슈르나찌르아플리 2세는 앗슈르 제국의 수도를 기존의 앗슈르에서 님루드로 옮기고
신전과 기념비적인 새 궁전을 짓는 대규모 건설 사업을 진행했다.
앗슈르나찌르아플리 2세를 상징하는 건물인 님루드 궁전은
앗슈르 정치 이념의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궁전의 내부는 앗슈르나찌니아플리 2세와 그의 군대, 신하, 시종들이 의례, 전쟁,
사냥에 참여하는 장면을 부조로 조각한 커다란 석판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앗슈르나찌르아플 리 2세가 신으로부터 받은 축복과 앗슈르의
영토 확장을 과시하려는 목적이었다.
기원전 7세기 앗슈르 제국의 권세가 정점에 이르렀을 때의 영토는
이란 서부의 자그로스 일대부터 지중해, 이집트까지 확장되었다.
강을 건너라고 지시하는 앗슈르 군인
기원전 약 668~627년 신-앗슈르 시대 니네배 출토, 설화석고,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소장
창을 든 앗슈르 병사가 갈대로 만든 배의 선미에 서서 엘람인
포로에게 늪을 통과하라고 지시하고 있다.
여성 포로들은 슬픈 듯 두 손을 들고 있다.,
물에는 적의 시체가 떠있다.
이란 남서부의 엘람 왕국은 앗슈르바니아폴리왕이 여러 차례 싸웠던 나라다.
고대 서아시아에서는 상을 만드는 것에 초자연적인 힘이 있어 그대로 이루어진다고 믿었기
때문에 아군은 늘 승리하는 모습으로 적군은 무력하게 패하는 모습으로 묘사하였다.
치자의 두상
기원전 약 2300~2000년 초기 청동기 시대 이란 또는 메소포타미아 출토,
구리 합금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소장
우아하게 정돈된 턱수염과 잘 정돈된 콧수염, 머리에 터번을 두른
남자를 실제 인물의 크기로 만들었다.
눈은 귀한 재료로 상감되어 있었을 것이다.
구리 주조라는 혁신적인 기술과 값비싼 재료를 쓴 것으로 보아 통치자나
지배층에 있는 사람이 제작을 의뢰하였을 것이다.
인물의 개성적 특징을 이처럼 사실적으로 묘사한 초상 조각은
메소포타미아 예술에서 매우 드물다.
두상
기원전 8세기 후반-7세기 초반신-바빌리 시대 구운 점토,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소장
초인적인 존재로 생각되는 이 작은 두상은 눈매가 깊고, 눈썹이 두드러지며
수염이 풍성하여 앗슈르 왕의 표준 이미지와 유사하다.
끝단을 접어 올린 관은 메소포타미아 조각에 흔히 나타나지만, 관만 바꿔 씌운다면
신과 왕의 모습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장인이 다른 재료로 더 큰 상을 만들기 전에 제작해 본 견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바구니를 인 우르-남마 상
기원전 약 2112~2095년 우르 제3왕조 시대 구리합금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소장
구데아 왕의 상
기원전 2090년경 신.슈메르시대, 섬록암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소장
도시국가 라가쉬의 왕 구데아(기원전 2150~2125 재위)를 섬록암으로 조각한 상이다.
구데아는 단순하고도 부드러운 선으로 표현되었으며 맞잡은 두 손과
커다란 눈은 사려 깊고 경건한 성정을 나타낸다.
오른 팔의 다부진 근육은 신체 건강한 통치자란 점을 드러낸다.
구데아는 라가쉬의 신전 재건을 기념하려고 이를 비롯한 여러 조각상의 제작을 지시했다.
이 내용이 치마에 수메르어로 적어 있다.
구데아 왕의 상은 라가쉬의 신전에 더 놓였다.
우르 왕실묘의 부장품
메소포타미아 남부의 우르에서 2000기가 넘는 무덤이 1920년대에 발굴되었다.
이 가운데 16개 무덤에는 금, 은, 청금석, 홍옥수로 만든 장신구, 준보석으로 만든
원통형 인장, 금제 그릇, 악기와 같이 화려한 부장품들이 묻혀 있었다.
무덤의 주인과 함께 묻힌 시종들의 수와 부장품들의 규모를 바탕으로
이 무덤에는 우르의 왕실묘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연구자들은 이 부장품에서 초기 왕조 시대 9기 원전 약 2900~2350년)의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많은 단서를 얻었다.
특히 장신구의 재료로 금, 은, 청금석이 의도적으로 사용되었는데, 메소포타미아에서
나지 않아 교역으로 구해야 하는 귀한 재료는 특권을 상징하고 이러한 귀금속이
내는 빛은 상서롭고 고결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뛰어난 세공 기술로 재료의 속성은 한층 강렬하게 빛을 발했다.
장신구는 다른 부장품들과 함께 부적으로서 죽은 자를 보호하는 제의적인 힘을 가졌다.
금귀걸이 초커와 목걸이 구슬, 은핀
기원전 약 2500~2500년 초기 왕조 시대 후기, 금, 황금석, 은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소장
우르뫼 1237호 무덤은 시종 74명이 묻힌 재 발견돼
"거대한 죽음의 유구"라는 별칭이 붙었다.
그중 68명은 여성으로, 이 장신구들은 그들이 사용했던 것이다.
목걸이는 금과 청금석을 번갈아 배열했다.
은핀의 머리도 황금석으로 만들었다.
이 같은 핀은 옷깃을 여미거나 인장과 작은 장신구를 옷에 고정하는 데 쓰였다.
목걸이와 팔찌
기원전 2600~2500년 초기 왕조 시대 후기. 금, 청금석, 홍옥수,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소장
"왕의 묘"로불리는 우르의 789호 무덤에서 발굴된 것이다.
금과 청금석을 쌍원추형, 원통형으로 만들어 줄로 엮었다.
팔찌로 추정되는 장신구에는 홍옥수 구슬도 사용되었다.
장신구에 광채 나는 재료를 쓰는 것이 중요했고 부적의 성격이 있는 특정한 원석을
사용하는 것도 제의적 힘이 생기는 데 중요한 요소로 여겨졌다.
통치자의 상과 초상 미술
"초상:이란 단어는 한 개인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을 뜻하며, 묘사 대상과 재현된
이미지의 유사성을 바탕으로 묘사 대상을 식별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메소포타미아의 관념 체계에서는 이러한 초상 미술의 개념이 성립되지 않았다.
메소포타미아에서는 통치자를 형상화할 때 통치자가 지향하는 이상적인 속성을 조합했는데
그 문화에서 통하는 약속된 표현과 엄격한 양식적 전통을 따랐기 때문에, 명문이 함께
있어야만 어느 왕의 상인지 구별해 낼 수 있었다.
더욱이 초상은 대상을 단순히 "다시 나타내는"것이 아니라
대상이 가진 본질을 담고 있다고 생각했다.
초상이 왕의 대리적 성격을 지닌다고 믿었기 때문에 전쟁이나 분쟁이 나면
상의 감각기관을 훼손하여 왕의 이미지를 "살해"하는 일이 종종 발생했다.
눈, 코, 입, 귀가 없는 통치자들은 감각을 잃게 되고 이들의 초상은
더 이상 힘을 갖지 못하게 되었다.
예술과 정체성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예술과 물질문화에서 개인의 정체성은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되었다.
인장이 가장 대표적인 예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낼 수 있는 도안과 명문을 주인이 선택했다.
생전 혹은 사후에 걸치는 장신구와 옷도 착용자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역할을 했다.
기원전 3000년 이후 메소포타미아 남부에서는 인물상이 많이 제작되었다.
값비산 석상을 주문해 신전에 봉헌하려는 이들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릴 수 있는 봉헌 명문을 새겨 넣어 자신을 드러냈다.
메소포타미아 인물상은 구체성이 없는 유사한 모습으로 조각만으로는
자신을 알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메소포타미아에서 통치자들의 "초상"은 개별 인물의 특징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왕위에 오를만한 자격으로 여겨지는 속성들을 조합해 완성하였다.
튼튼한 팔, 큰 눈, 얼굴을 뒤덮은 수염, 크고 윤곽이 뚜렷한 근육,
특정한 옷과 머리 장식 같은 것이 여기에 해당되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인물상은 대체로 비숫한 모습이었기 때문에 어느 왕의
상이라고 특정할 수 있도록 명문을 새겼다.
수호 여신 라마의 비
기원전 약 1307~1282년 카슈 시대 메소포타미아 남부 출토, 설화석고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소장
신격을 상징하는 뿔 모양 머리 장식을 갖춘 라마 여신을 얕은 부조로 새긴 비다.
두 팔을 들어 위계가 더 높은 신에게 남성을(보통은 왕을) 데려가는
"중재의 신"으로서 경건한 모습을 표현했다.
카슈 시대(기원전 1595~1155년)의 나지-마룻타쉬 왕이 인안나에게 바치는
슈메르어 명문이 치마에 가득 새겨져 있다.
이 비는 우룩의 예안나 신전 지구에 세워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황소머리 장식
기원전 약 2100~2000년 신-슈메르 시대, 동석 또는 사문석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소장
야생의 황소와 가축화된 황소는 메소포타미아 예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재로
조각, 인장 등 다양한 장르에서 힘과 생식력을 상징한다.
황소 머리 장식은 그릇, 가구, 악기부터 건축과 기둥머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물건을 장식하는데 쓰였다.
봉헌용 상
기원전 약 2600~2350년 초가 왕조 시대 후기, 돌,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소장
경건한 자세로 선 남성의 모습을 한 봉헌용 상이다.
눈썹과 눈은 조개껍데기, 청금석 또는 다른 귀금속으로 상감 세공했을 것이다.
초기 왕조시대에 일반적으로 착용했던 여러 겹으로 짠 치마를 입고 있다.
커다란 눈과 맞잡은 손은 신성에 압도되었다는 뜻이며, 봉헌자들은 신에게 존경을
표한다는 의미로 신전 안에 이러한 값비싼 상을 바쳤다.
봉헌용 그릇
기원전 약 2600~2350년 초기 왕조 시대 후기 닙푸르 출토, 방해석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소장
인안나 여신에게 바친다는 명문을 새긴 그릇이다.
이와 같은 봉헌용 그릇은 신심을 표현하고 소원 성취를 빌기 위해 신전에 바치는 물품이었다.
이처럼 뛰어난 품질의 그릇을 바치려면 수입한 돌과 솜씨 좋은 장인이
필요하므로 봉헌자들은 많은 돈을 지불해야 했을 것이다.
"인안나 여신"께 ( )한 파-아누쿠쉬의 아내 헤-우투가 (이 그릇을) 봉헌한다.
연회 장면을 새긴 판 장식
기원전 약 2600~2500년 초기 왕조 시대 후기 닙푸르 출토, 설화 석고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소장
연회와 술 바치는 장면을 묘사한 판 장식을 봉헌하는 것은 기원전 3000~2000년대에
메소포타미아 종교 활동의 한 방법이었다.
여기에는 대게 왕과 왕비, 남자와 여자 사제, 시종들이 한자리에서 술을 마시는
장면이 여러 단으로 묘사되었다.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남긴 명문은 고대인들의 신앙생활과
의례를 재구성하는데 도움이 된다.
보통 이런 용도의 부조에는 중간에 벽에 걸기 위한 구멍이 나 있다.
현악기에 달았던 황소 머리 장식
기원전 약 2600~2350년 초기 왕조 시대 후기 청동에 조개껍데기와
청금석 상감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소장
청동으로 주조한 황소 머리상으로 곱슬곱슬한 수염이 정교하게 표현되었다.
숙련된 장인의 기술에 더해 황소의 눈에 상감 세공된
조개껍데기와 청금석으로 더욱 빛을 발한다.
고대에는 현악기에 이 황소 장식을 부착하였다.
악기는 소의 울음을 닮은 저음의 소리를 냈을 것이다.
현악기는 왕실과 신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를 때나 군대가 행진할 때
또는 연회를 베풀었을 때도 연주하였다.
발락, 어머니 여신 아루루에게 바치는 노래
기원전 약 19~16세기 고- 바빌리 시대, 점토,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소장
이 점토판 조각은 아루루 여신에게 바치는 슈메르의 의례용 노래를 기록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이러한 노래는 연주에 사용한 악기의 이름을 따 "발락"이라고 불렀다.
출산의 여신 아루루의 권능을 찬양하고, 한 도시가 파괴된 것을 통탄하는 내용이다.
발락의 특징은 단어와 문구를 슬프고 가슴 아픈 듯한 가락으로 되풀이하는 것이다.
사제가 축제나 신전을 짓는 행사에서 이 노래를 불렀다.
압칼루 상
기원전 약 9~8세기 신 -앗슈르 시대 님루드 출토 점토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소장
점토를 빚어 만든 남성 사제상으로 긴 머리와 수염, 돌출된 눈과 큰 눈이 특징이다.
높고 둥근 머리 장식은 물고기 모양 겉옷인데, 땅 아래 당수 영역인 압주에 살았던
태고의 "압칼루" 현자들과 소통하려고 사제들이 입었던 옷이다.
이러한 상은 주술적 성격을 띠는 보호 장치로 건물 아래에 다량으로 묻었다.
앗슈르의 수도 남루드에 있는 궁전 바닥에서 발견되었다.
황소 장식 그릇 조각
기원전 약 3300~2900년 후기 우룩~젬제트 나쯔르시대 메소포타미아 남부 출토,
녹니석이 섞인 동석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소장
동석으로 만든 그릇의 조각으로 황소 형상을 장식해 멋을 더했다.
황소들이 줄지어 오른쪽으로 이동하는 모습은 가축으로 길든 동물의
질서 정연함을 넌지시 드러내는 듯하다.
황소의 몸은 다양한 높낮이의 부조로 표현했고, 머리는 황소를 보는 사람을
향하도록 한껏 각도를 틀어 아주 입체적으로 조각했다.
이런 모양의 그릇은 주로 신성한 장소에 봉헌되었다.
수로에 관한 기록
기원전 약 2600~2350년 납푸르 출토, 점토,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소장
이라크 남부에서는 농사에 필요한 강수량이 모자랐기 때문에 농부들은
수로와 저수지를 만들어 인근의 강에서 경작지로 물을 끌어 왔다.
인안나 신전에서 발굴된 이 점토판에는 수메르의 종교도시 납푸르를 가로지르는 수로를 보수하고
수로가 성공적으로 기능하기를 인안나 여신에게 기원하는 내용이 수메르어로 적혀 있다.
쐐기문자를 새긴 점토판(마르둑 찬가)
기원전 약 1000~1년, 신 바빌리 시대 점토, 너비 9.8㎝
고대 메소포타미아는 역사상 가장 먼저 글자를 발명한 곳입니다.
이 지역 사람들은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강가의
점토와 갈대를 종이와 펜처럼 이용했습니다.
갈대를 깎았을 때 생기는 세모난 면으로 쐐기 모양을 점터판에
꾹꾹 눌러 한 줄 한 줄 빽빽하게 적었습니다.
돈을 빌려준 기록, 환자에게 맞는 치료법, 입양한 양자에게 가문의 재산을 물려줘도 되는지
여부등과 같은 오늘날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일상의 이야기가 점토판에 담겨 있습니다.
쿠쉬룩
쿠쉬룩은 수메르어로 상자를 뜻한다.
4m 높이의 미디어큐브에 메소포타미아를 상징하는 땅과 강. 개인과 집단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인장 그리고 일상을 빼곡하게 기록한 쐐기문자를 담았다.
시시각각 변하는 쿠쉬룩을 통해 문명의 거대한 흐름을 느끼게 된다.
조공 행렬에 선 외국인 마부
기원전 약 721~705년, 신. 앗슈르 시대 코르사바드 출토, 설화석고, 너비 79.5㎝
기원전 700년경 앗슈르를 다스린 왕 사르곤 2세는 수도를 옮기고 새로 궁전을
지어 권력을 굳건히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궁전의 안은 이와 같이 아름다운 조각에 새겨진 부조를 붙여 장식했습니다.
여기에는 한 마부가 말 두 마리 끄는 장면이 새겨져 있습니다.
말들은 꽃 모양으로 꾸며진 굴레를 하고 이마와 머리 위에 술을 달았습니다.
주변 나라에서 앗슈르가 귀하게 여기는 말을 바치러 온 장면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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