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하에서 꽃핀 예술" 중국관(국립중앙박물관 2023.7.26)

2023. 8. 5. 21:59나의 이야기

  • '황하에서 꽃핀 예술'이라는 주제로 중국의 역사와 문화를 소개하는 전시실입니다.
  • 고대 문화를 대표하는 옥기와 청동기, 종교 신앙을 보여주는 도용과 불비상, 공예기술이 집약된 칠기와 도자기를 전시하여 시대별 특징을 나타내는 문화재의 가치와 의의를 설명하였습니다.
  • 또한 명청 시대의 산수화, 화조화, 인물화 등의 작품을 전시하여 다채로운 중국 회화의 세계를 소개하였습니다.
  • 더불어 휴게공간에는 명청 회화의 미디어아트 영상과 청대 학자의 방을 재현하여 당시의 미학적 품격과 취향을 생동감 있게 담아내었습니다. 
  •  
  • 중국은 황하문명을 기반으로 성장했으며, 광활한 영토에 여러 민족의 흥망성쇠가  거듭되면서 다채로운 문화가 전개되었다. 하나라 (기원전 21~기원전 16세기)를 시작으로 상나라(기원전 16~기원전 11세기)와 주나라(기원전 11세기~기원전 476년)에 이르러 국가의 틀이 마련되었고, 정치적 혼란기였던 춘추전국시대 9기 원전 770~221년)에는 새로운 가치와 규범을 제시하는 제자백가의 등장으로 사상과 학문이 꽃을 피운다.
  • 중국 최초의 통일왕국 진나라(기원전 221~206년)와 그 뒤를 이은 한나라(기원전 770~기원후 220년)는 도량형과 문자를 통일하고 정치사회제도를 재정비하여 통합을 이루었다.
  • 위진남북조시대(220~589년)에는 인도에서 전래된 불교가 융성하여 중국 전역에 사찰과 석굴사원이 조성되기 시작했다.
  • 중국의 불교 사상과 미술 양식은 아시아 전역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 당대(618~907년)에는 외래문화가 적극 수용되어 국제적인 성격의 문화가 융성하며 금속공예품과 당삼채가 특히 발달하였다.
  • 송대(960~1279년)에 이르면 전국의 가마에서 각기 개성을 살린 도자기들이 다양하게 생산되어 중국 도자문화가 크게 발전한다.
  • 한편 자연의 위대함을 이상적으로 표현한 산수화와 함께 시서화의 예술이라 부르는 문인화가 태동하여 원대 (1271~1368년)에는 복고적 문인화풍으로 이어진다.
  • 명대(1368~1644년)에는 고상한 취향의 문인화가 유행하고 궁정화원 소속 직업화가들의 활동이 활발했으며, 청대(1644~1911년)에는 서양화풍이 유행하면서 더욱 다채롭고 개성 있는 회화 세계가 펼쳐진다.  
  •  

 

채색항아리

 

신석기시대 양사오문화(기원전 5000~기원전 2500년)

 

양사오문화는 황허 중상류에서 발생한 신석기시대 문화이며,

이 토기들은 양사오문화권에서 제작된 것이다.

토기 표면에 흑색의 굵은 선으로 그린 반원과 격자무늬,

그물무늬 등이 있고 양쪽으로 손잡이가 달려있다.

 

 

중국 고대문화

 

중국 고대문명은 신석기시대의 채도와 옥기, 청동기시대의

갑골문과 청동기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채도는 정착생활과 농경이 시작되면서 생산되었으며, 도기 표면에는

동물무늬나 기하학무늬 등이 표현되었다.

옥기는 지배계급의 상징물로써 주술적인 의미를 가졌으며 장신구 구실을 했다.

청동기는 고대국가 형성과 함께 제작되기 시작하여 주로 상나라와

주나라 때 제기와 식기, 무기 등으로 제작되었다.

왕과 제후 무덤에서는 부장품으로 매장된 다양한 청동기가 발견되는데

신분 계급에 따라 청동기의 매장 수량이 달랐다.

또한 청동 그릇에는 사람 이름과 관직명,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금문이

새겨져 있어서 당시의 사회 상황을 알 수 있다.  

 

 

박산향로와 박산 단지

 

박산향로 (동한 25~220년), 박산 단지 (한 기원전 206~기원 후 220년)

 

박산은 중국 전설에 나오는 바다 가운데 신선이 살고 있다는 산이다.

한나라 사람들은 선인의 가르침을 얻고자 한다면 반드시 선경을 지어야 한다고 믿었다.

건물 대신 선산의 형상으로 향로를 만들고 향으로 천지신명과 소통하고자 했다.

박산향로는 한라라 신선 사상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고대 중국 중국의 신석기 문화는 황허 강, 양쯔 강등 중국

전역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발전하였다.

국가가 형성되고 청동기의 제작이 이루어졌다.

청동은 귀한 금속으로 권력을 상징했다.

다양한 청동제 제기와 무기가 제작되었다.

청동 제기의 표면에는 기하무늬와 함께 괴수의 얼굴,

도철 무늬를 장식했다.

사람의 죽으면 혼백이 분리되어 혼은 위로 올라가 하늘이나 산에

깃들고 백은 육신과 함께 지하에 남는다고 여겼다.

장례를 후히 치르는 풍속이 유행하였으며, 망자를 위해 저택, 가축 등

다양한 부장품을 매장했다.

불교 미술 후한대 불교가 중국에 들어왔다.

실크로드와 바닷길을 따라 승려가 들어오고, 경전의 번역에 이루어지면서

불교는 중국 문화의 일부로 자리 잡았다.

남북조 시대에는 황실의 후원과 국가적 지원에 힘입어

전국 각지에 대규모 사원이 조성되었다.

당대 불교는 황실과 귀족뿐 아니라 사회 저변으로 확대되었다.

당송대 선종이 유행하고 원대 티벳 불교가 유입되면서 중국의

불교미술은 다양한 모습으로 발전하였다.

도자 도자기는 오래전부터 중국을 대표하는 상품이었다.

시유도기의 오랜 전통과 가마의 개선을 통해 자기를 계발하면서

중국의 도자 제작 기술은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송대 각지의 가마에서 특색 있는 자기를 생산하였다.

경덕진은 북송 후기부터 양질의 청백자를 생산했다.

원대에는 코발트 안료를 사용한 청화백자를

개발하여 많은 양을 국외로 수출하였다.

명대 황실의 그릇을 제작하는 관요가 되면서 경덕진은

중국 자기를 대표하는 생산지가 되었다.

명대 중기 이후 투채, 오채, 분채 등 새로운 장식기법이 개발되었다.

회화 육조 시대 이후 서예 및 회화 이론이 등장하면서

서화는 감상과 품평의 대상이 되었다.

오대와 북송시대에는 산수가 중국회화의 중심 장르로 자리 잡았다.

송대 도시 문화의 발달은 회화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원대 황공망, 오진, 예찬, 왕몽은 후대 화가들에게 귀감이 되었다.

명대 문인화가의 활동과 더불어 화원화가의 화조도도 유행했다.

동기창은 회화를 문인화 중심의 남종화와 화원가 중심의 북종화로

구분하여, 이후 화단에 큰 영향을 끼쳤다. 

 

 

누각 모형

 

동한(25~220년)

 

한나라는 장례를 성대하게 치르는 풍속이 유행하여

무덤에도 다양한 껴묻거리를 함께 묻었다.

그 가운데는 집, 부엌, 축사, 방앗간, 화장실 등 망자를 위한 건축 모형도 있다.

이 누각 모형은 4층이며 층마다 난간을 만들어 인물상을 배치하고,

지붕 처마 끝에는 4개의 꽃모양 장식을 부착했다. 

이러한 누각 모형은 한대의 실제 건축 양식이 반영된 것으로 해석되어 왔지만,

최근에는 신선 사상과 관련하여 죽은 자의  사후 영생을 기원하는 관념적 건축이라는

의견도 제기되었다. 

 

 

말도용

 

남북조(420~589년)

 

말은 오랜 기간 사람과 밀접한 동물 중의 하나로 도용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무덤에 부장 되었다.

따라서 말 도용은 시대 특징을 반영하고 있다.

남북조시대에는 외국 말이 본격적으로 수입되기 전으로 다리가 짧은

토종 말의 모습으로 제작되어 무덤에 매장되었다.

말에 장착했던 도구와 장식 등이 잘 표현되어 있어

당시 말갖춤을 연구할 수 있는 자료이다.

 

 

세발 술잔(중앙과 우측 전면) 

 

상 (기원전 15세기~기원전 11세기)

 

세발술잔 "작"

주로 따뜻한 술을 마시는 온주기로 사용했다.

세 개의 다리가 몸통을 받치고 있고 손잡이가 세로로 달려있다.

아가리 한쪽에 술을 마시는 류가 있고, 반대편에 뾰족한 꼬리가 있어 그릇의 수평을 잡았다.

아가리에 곧게 선 기둥 두 개가 있는데 이를 주라고 하고 초기의 세발 술잔에는 없는 것도 있다.

얼리터우문화 시기(기원전 2000년~ 기원전 1500년)부터 제작되어 상나라에서 가장 많이 사용했다.

나팔모양 술잔과 세트로 제사에 사용되었다. 

 

 

굽다리 술잔(전면 좌)

 

상 후기(기원전 13세기~ 기원전 11세기)

 

굽다리 술잔 "치"

술잔으로 송나라 때부터 "치"라고 불렀고 원래 이름은 "단"  혹은 "상"이다.

아가리가 밖으로 벌어지고 굽다리 형태로 간혹 뚜껑이 있는 것도 있다.

원형과 타원형 두 가지 종류가 있고 상나라 후기 주로 타원형이 유행했다.

상나라 후기에서 서주 전기까지 사용했다.

 

나팔모양 술잔(후면)

 

상 후기(기원전 13세기~기원전 11세기)

 

나팔모양 술잔 "고"

아가리가 나팔모양 벌어지고 굽다리가 있는 술잔이다.

신석기시대는 토기로 제작했고 굽다리가 아닌 평평한 바닥이었다.

청동기로 재작 되면서 굽다리로 변화했다.

상나라까지는 굽다리에 십자형 구멍이 있는데, 이 구멍은 안쪽과 바깥 거푸집을 합칠 때

일정한 공간을 유지하기 위해 진흙덩어리를 끼워 놓았던 흔적으로 청동기 제작 기술이

발전하면서 없어 졌다.

술 따르는 의식인 관례 때 사용한 술잔으로 세발 술잔과

세트로 서주 전기까지  사용되었다. 

 

 

술병 (상 후기 기원전 13세기~기원전 11세기)

 

술병-호

 

고대에 술을 담던 병이다.

청주 또는 예주를 담던 것으로 때로는 물을 담기도 했다는 기록이 있다.

물을 담았던 병은 금호라고 불렀다.

목이 길며 배가 불룩하고 굽다리가 달린 것이 기본 형태이며 대부분 뚜껑이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표주박형, 원형, 타원형, 납작형, 방형 등 그 형태가 다양하게 변화되었다.

상나라 전기부터 한나라 때까지 청동기로 제작되었다.

 

 

 

후면 ) 1. 곡식 담는 그릇( 상후기 기원전 13세기~기원전 11세기) 

후면) 2. 곡식 담는 그릇 궤(서주 전기 기원전 11세기~기원전 10세기)

전면) 1,. 고기 삶는 세발솥(상후기 기원전 13세기~기원전 11세기)

전면) 2, 고기 삶는 세발솥(상후기 기원전 13세기~기원전 11세기)

전면) 3, 고기 삶는 세발솥(춘추시대 기원전 770~기원전 476년)

 

 

고기 삶는 세발솥- 정

 

고기를 익히거나 담는 데 사용한 제기이다.

형태는 아가리 양쪽에 두 개의 손잡이가 달려 있고 3개의 다리가 몸통을 받치고 있다.

다리 사이로 열을 가하여 안정적으로 음식을 조리할 수 있었다.

상대 전기까지는 깊은 타원형의 몸통에 송곳 모양의 다리였으나, 상대 후기부터

점차 몸통의 깊이가 얕아지고 원추형의 다리로 변화했다.

서주 중기부터는 몸통의 깊이가 얕아지고 동물굽 모양의 

다리로 변하여 안정감을 주었다.

고기 삶는 세발솥은 천자, 제후 등 위정자의 권력과 신분을 나타낸

그릇이고 가장 오랜 기간 사용된 예기이다.

 

전면) 4, 고기 삶는 네발솥(상후기 기원전 13세기~기원전 11세기)

 

고기 삶은 네발솥은 신분이 높은 사람이 사용한 그릇이다.

장방형으로 된 상자 모양의 몸통을 4개의 원추형 다리가 받치고

있고 동물얼굴무늬가 새겨져 있다.

안쪽에 "부기인인"이 새겨져 있다.

아버지가 "기"날에 돌아가셨다는 뜻으로 제기로 사용된 그릇이다. 

 

 

동물무늬 수막새와 꽃무늬 수막새 (전국시대 진 기원전 475~기원전 221년)

 

진나라 기와 

 

산시성 도성 근처에서 대부분 발견되었다.

대표 무늬는 동물무늬, 사슴무늬, 봉황무늬 수막새이다.

봉황은 신령스러운 상상의 동물로 춘추전국시대 특히 많이 등장하는 무늬이다.

무늬 중에 호랑이가 새를 잡아먹으려는 찰나를 표현한 것이 있는데

이는 당시 패권을 다투던 진과 주변 국가를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전국시대 진의 기와에서 식물무늬는 소량으로 출토되었는데 이 중에

꽃무늬는 천자를 상징하는 태양무늬로 보는 견해도 있다. 

 

 

1. 남성과 여성 도용(서한 기원전 206~기원 후 8년) 중앙

 

2. 매를 든 남장 여인 도용(당 618~907년) 후면

 

3. 문관과 무사 도용(남북조 420~589년) 좌측과 우측 끝 

 

 

후면 수레 끄는 소 도용과 전면 황소 도용(당 618~907년)

 

 

후면) 말 탄 여인 도용과 전면 좌측 말도용, 전면 우측 마부도용(당 618~907년)

 

 

무덤을 지키는 괴수 도용

 

 

십이지 상(개 호랑이, 뱀)

 

 

말도용(당618~907년)

 

당대 초기 나라에서는 공납, 매매, 전쟁 등을 이유로 주변 여러 나라에서

5천 여 마리의 말 70 여종을 수입하였다.

이 중 서역지방에서 수입된 아라비아계통의 말은 작은 머리에 다리가

가늘고 길어 주로 의장용으로 사용되었다.

무덤에는 주로 삼채로 제작하여 함께 묻었다.

삼채는 8세기 당나라 때부터 제작한 도기로 태토에 함유된 철분으로 인하여

색이 변하게 되는 성질을  이용했다.

이 말도 중앙아시아를 통하여 수입된 코발트 안료를 사용한 보기 드문 예이다.

우윳빛의 유약과 매우 조화롭게 근육을 표현한 조형미가 돋보인다. 

 

 

고깔모자를 쓴 소그드인 도용(당 618~907년)과 낙타 도용

 

소그드인은 중국 전국시대부터 중아아시아에 있었던 유목민족이다.

 지위가 비교적 높은 자가 이러한 형태의 고깔모자를 썼고 점차

시베리아지역이나 흉노족도 즐겨 스게 되었다.

그러나 당나라 사람들은 한족과 다른 높은 코와 큰 눈을 가진 이국적인 모습의 

소그드인을 마부, 하인 등의 도용으로 제작하여 무덤에 부장 하였다.

낙타는 당대에 새롭게 등장한 도용이다.

당대 실크로드가 번영하고 무역이 성행하면서 말과 함께

상업용으로 낙타가 대량 수입되었기 때문이다.

실크로드를 오가던 중앙아시아 지역의 쌍봉낙타는 운송수단뿐만 아니라

그 이국적인 모습 때문에 당시 중원 지역에서 크게 환영받은 동물이었다.

낙타 도용은 보통높이가 1m로 머리를 쳐들고 활보하는 모습이거나

제자리에 서있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악기 연주하고 춤추는 사람 도용(송 960~1279년)

 

 

 

1) 무덤을 지키는 무관 도용(당 618~907년)

 

진묘 무관용은 묘실의 입구를 수호하거나 네 귀퉁이에서 발견되는데 일반적으로

무덤에 부장 되는 일반 무사 또는 병사 도용과 비교하여 생김이 다르고 키가 크다.

변관(중국에서 무관이 머리에 쓰던 투구)을 쓰고 부리부리한 눈과

콧수염이 있어 흉악하고 무섭게 보인다.

대좌 위에 서 있고 폭이 좁은 윗도리에 짧은 소매의 겉옷을 입고 있다.

손을 동그랗게 말고 있어  무언가 쥐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원래의

형태를 알 수 없지만 목제 무기로 추정된다.

 

 

2,3) 무덤을 지키는 괴수 도용(당 618~907년)

 

서아시아 지역에서 발생한 인면수신(사람의 얼굴에 동물의 몸을 한 형상)의 형상이 기원전

2세기 한나라 때, 실크로드를 통하여 중국에 전래되었고 진묘수에도 그 영향을 미쳤다.

 점차 발전되어 "수면수신"과 "인면수신" 한 쌍의 진묘가 삼채로 제작되어 무덤에 부장 되었다.

인면수신의 진묘는 얼굴에는 유약을 바르지 않고 귀와 뿔을

매우 과장되게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4) 무덤을 지키는 문관 도용(당 618~907년)

 

무덤 입구 좌우에 진묘 무관용과 함께 부장 되었다.

형상이 크고 대좌 위에 서있다.

높다란 개책(중국의 문관이 쓰던 헝겊으로 만든 관)을 쓰고

소매폭이 넓고 길이가 긴 옷을 입고 있다.

세필로 눈썹과 수염을 그리고 입술에 붉은색을 칠하였다.

두 손을 모으고 가운데 구멍이 있는 것으로 보아 손에

무언가를 쥐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발 바닥이 앞으로 올라간 것은 걸을 때 걸림을 방지하기 위한 것으로

당시 귀족 사회에서 유행한 복식 형태로 보인다.

 

 

진. 한대에는 많은 부장품을 함께 묻는 후장제도가 유행하면서

지배층 무덤의 부장품 종류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한대 이전 무덤에서는 옥기, 청동그릇 등의 예기와 실생활에 사용된  토기, 무기, 마구류들이

출토된 반면, 현대 이후 무덤에서는 인간의 감정이나 생활상을 표현한 인물과 동물 도용이

다수 출토되었다.

또한 당대에는 무덤을 지키는 용도로 채색이 화려한

삼채진묘수, 말, 낙타 등을 함께 매장하였다. 

 

 

경덕진요

 

 

자주요와 정요

 

 

룽취안요와 월요& 요주요

 

 

중국 자기는 한대 회유 계통의 사유 도자기에서 시작되었으며, 당대

저장성 월요 청자로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이 시기에 중국 북방 지역에서는 백자가 생산되어 "남청북백"의 시대를 맞이한다.

청자와 백자의 제작 기술은 지속적으로 발전하여 송대에는 전국 각 지역의

가마에서 다양한 종류의 도자기가 생산되어 자기 문화의 황금기를 이룬다.

이후 원대에는 백자와 청화백자를 주로 생산한 장시성 경덕진요가 자기 생산의 중심지가

되어 명대에는 화려한 채색 자기가 등장하였고, 청대에는 자기 생산의 모든 기술과

예술성이 집약되어 중국 자기 제작 발전의 정점에 이른다.  

 

 

불비상(북위 386~534년)

 

북위(386~534년) 영안 2년(529년)에 조성된 불비상이다.

꼭대기 부분은 서로 얽혀있는 용 4마리로 장식했고 상단에는 삼존불과 발원자의 관직명이,

중단에는 공양자상, 그리고 하단에는 함께 발원한 이들의 이름을 새겼다.

공양자상 사이에 명문이 있는데, 영안 2년에 국왕과 칠세부모를 위하여 만들었다고 적혀 있다

이 불비상은 마을의 신앙 공동체인 읍의 구성원인 개씨와 양 씨, 왕 씨 등을 포함하여 100명이 넘는

발원자가 함께 조성한 것이며 10여 명의 주요 공양자는 말을 타거나 일산을 쓴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불비상(당 618~907년)

 

당 현경 5년(660)에 고만해 일가족이 발원한 불비상이다.

육감적이고 사실적으로 표현한 불상과, 보살상은

전형적인 7세기 당대 불상의 특징을 보여준다.

앞면 상단에는 의자에 앉은 자세의 불상과 협시 보살이 있고 그 위로는

보탑과 천인이 있으며, 중단에는 2개의 감실에 오존상을 묘사했다.

뒷면 상단에는 용 장식이, 중단에는 삼존불과 나무를 새겼다.

명문은 앞면의 하단과 중단의 감실 사이에 새겨져 있는데, 고만해가 돌아가신 부모님을

위해 형수와 처, 조카, 아들, 딸 등 일가친척의 힘을 뫃아 불비상을 조성했다는 내용이다.  

  

 

불비상(북제 550~577년)

 

높이가 162㎝에 이르는 비교적 큰 북제 불비상이다.

앞면은 상단에 오존불을, 중단에는 역사를 새겼고,

가장 윗부분에는 보탑과 천인을 조각했다.

중단의 역사는 자연스러우면서도 힘찬 모습이다.

뒷면은 상단에 용 장식과  오존불을 새기고, 중단에는 4개의 감실에

각각 삼존불을, 하단에는 향로와 사자, 인물상을 표현했다.

가장 아래에는 불비상에 조각된 각각의 상을 공양한 사람의 이름을 새겼다.

불상은 다소 경직된 모습이지만 사자는 예스럽고 소박한 느낌을 준다.   

 

 

불비상(북제 550~577년)

 

다양한 군상이 빽빽하게 묘사된 북제(550~577년)의 불비상이다.

앞면에는  앉아있는 불상을 중심으로 나한과 보살, 신장이 주위에

둘러 서 있고 상단에는 꽃줄을 든 천인과 보탑이, 불상 아래에는 향로와 사자,

인물상이 조각되어 있다. 

뒷면은 2단으로 된 감실에 오존불과 반가사유상이 새겨져 있다.

다양한 상들로 채워져 구도가 복잡하고 세부 표현은 다소 번잡하지만, 부피감이

살아있는 인물 묘사나 허리를 살짝 비튼 보살의 삼곡 자세는 눈길을 끈다. 

앞면 하단의 명문에는 제주 등 읍의 주요 인물 명단과 공양주 등이

"부모님을 위하여 한마음으로 부처를 모신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불비상

 

불교가 중국에 전래된 이래 새로운 형태의 조형물인 불비상이 등장했다.

불비상의 기본 형태는 네모난 돌에 불상과 명문을 새긴 것으로 중국의 전통적인

비에 종교적 숭배사상인 불상이 더해진 형식이다.

중국의 비가 지배계층을 위한 것이었다면 불비상 제작에는 지배계층뿐만 아니라

민간인들도 발원자로서 참여할 수 있었다.

이러한 불비상은 마을 입구, 주요 교차로, 사원 등 대외적이고 공적인 장소에

주로 세웠으며, 조상의 안녕을 기리고 공덕을 쌓는 역할을 했다.

이곳에 전시된 불비상은  북위와 당대에 제작된 것으로 대체로 석가불이나 아미타불,

미륵불이 묘사되어 있고, 일부에는 공양자상과  조상기가 새겨져 있다.

이처럼 불비상은 당시 유행했던 불교 도상에 발원자의 염원을 담아

이들의 신앙과 바람을 대외적으로 널리 알리고자 했다.

 

 

금으로 장식한 화장품 칠그릇(동한 25~220년) 

 

칠기

 

중국 칠기 공예는 일찍이 7여 년 전 신석기시대부터 존재했다.

이후 수천 년간 끊임없이 발전하여 채회, 전칠, 상감, 조칠, 금칠 등의 다양한

기법을 선보이며 중국 전통문화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 왔다.

전국시대의 옛 무덤에서는 일상생활 용구에서  제기, 악기, 무기 그리고 장례용 관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한 종류의 칠기가 출토되어 중국 고대 칠공예의 제작 상황을 알려준다.

당대에 시작된 조칠기법은 송. 원대의 높은 수준으로 발전하여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척홍 또는 조홍칠이라고도 불리는 조칠은 나무나 동으로 만든 몸체에

붉은색 칠을 수십 번 한 후 조각하는 기법을 말한다.

붉은색 화려한 효과를 나타내는 조칠은 명. 청대에 이르러 일상생활 용기에서부터 병풍, 침상,

의자, 건축 장식에 이르기까지 제작 범위가 확대되면서 중국의 독보적인 공예 예술로 발전한다. 

 

 

은으로 장식한 화장품 칠그릇(동한 25~220년)

 

 

후면) 죽림칠현이 새겨진 칠 쟁반(동한 25~220년)

 

전면)"대청건륭제"가 새겨진 칠합

 

 

당나라의 은접시, 금상자, 금도금 은상자, 은제가위, 금잔

 

당대에는 수준 높은 금속제조기법으로 완, 합, 배, 반, 호 등 다양한 종류의

금은제 그릇을 생산하였으며 궁정과 귀족 계층에서 널리 사용했다.

실크로드를 통해 서아시아 문화가 유입되어 당나라 사람들 사이에

이국풍이 인기를 끌면서 더욱 활발하게 제작되었다. 

손잡이가 있는 잔, 굽다리 은잔 등은 서아시아

그릇에서 영향을 받아 제작되었다.

 

 

다양한 당나라 은제병, 은제 주전자, 은잔, 은합 

 

 

다양한 채색자기

 

경덕진요로 대표되는 명. 청대 자기는 명대의 청화, 유리홍 등의 장식기법을 바탕으로 발전했는데,

특히 주목할 만한 기술적 성취는 유약 위에 채색을 가하는 채색 자기의 탄생이다. 

청화가 유약을 입히기 전 청화 안료로 무늬를 장식하는 것이라면, 채색 자기는 유약을 입혀 구운 뒤

다양한 색채의 안료로 무늬를 그린 후 저온에서 다시 구워 제작했다는 점에서 한 단계 발전된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채색 자기는 기본적으로 홍, 황, 녹, 남, 자 의 다섯 가지 색채를 사용해  일반적으로

오채라고 하며, 분채, 투채, 법랑채 등 다양한 기법으로 발전하였다.

 

 

 

좌측) 소나무 대나무 매화무늬 항아리(원 1271~1368)

 

청화의 발색이 청아하고 맑은 항아리이다.

어깨에는 국화 넝쿨무늬, 가운데에는 선비의 절개를 상징하는

"세한삼우"인  소나무, 대나무, 매화나무를 그렸다.

아래쪽 연꽃무늬는 원대에 만들어진 항아리에서 종종 보이는 특징이다.

 

우측) 인물고사무늬 항아리(명 1368~1644년)

 

명대 청화백자를 대표하는 항아리로 명대 나관중(14세기경)이

쓴 소설 "삼국지연의"의 한 장면을 그렸다.

말을 탄 두 명의 장수 사이에 관복을 입고 채찍을

휘두르며 달리는 사람은 유비로 추정된다.

언월도를 들고 말을 탄 이는 관우로 추정되는데, 관우 뒤에서 한 사람이

말에서 내려 보자기에 든 무언가를 바치고 있다.

인물은 비교적 섬세하게 묘사했지만, 구름 바위, 대나무 등의

배경은 간략하게 표현해 서로 대조를 이룬다.

하늘 높이 자란 도시적인 소나무를 중심으로

이야기의 시작과 끝이 연결되어 있다.  

 

 

꽃 과일무늬 주전자(명 1368~1644년)

 

눈처럼 흰 백자 표면을 청화로 장식한 주전자이다.

넓은 입과 가는 목, 불룩한 몸통과 화려한 손잡이가 특징이다.

주전자 전체에 파초무늬, 연꽃 넝쿨무늬 등을 장식했다.

청화 안료를 붓에 찍어 섬세하게 무늬를 그려 넣고

투명한 유약을 입혀 구워냈다.

 

 

참외무늬 큰 접시(명 1368~1644년)

 

전체를 꽃과 과일로 장식한 접시이다.

접시 가운데를 장식한 넝쿨에는 참외가 달려 있다.

접시 옆면에는 국화, 모란, 연꽃, 장미, 넝쿨을 그렸고 그 가장자리에

파도무늬를 섬세하게 표현했다.

바깥면에는 길상의 의미를 담은 포도, 복숭아 등을 그렸다.

명나라 영락(1403~1414) 연간에 만들었다.

명대 청화백자의  아름다움을 잘 보여 주는 명품이다.

 

 

매화무늬 접시(청 1644~1911)

 

접시 바닥에 괴석이 있고 그 사이로 매화나무가 있다.

가장자리에는 대나무와 꽃이 핀 매화나무 가지가 힘차게 벋어 있다.

바깥면에는 복숭아와 감나무등을 그렸다.

매화는 고결한 선비를 상징하고, 대나무와 복숭아는

장수를 염원하는 마음이 담겨있다. 

 

 

산수무늬 접시(청 1644~1911년)

 

산과 물이 잘 어우러진 자연 속에서  스승과 제자가 서로 마주하고 있다.

접시 바닥에 마치 한 폭의 산수화처럼 자연을 입체적으로 표현했다.

청나라 강희(1622~1722) 연간에 만들었다.

 

 

(전면) 구름용 무늬 대접(명 1368~1644년)

 

짝을 이루는 파란색 바탕의 대접에 흰색용이 구름 사이를 날고 있다.

굽 안쪽 바닥에 "대청강희연제"라고 적혀 있어 청나라

강희(1662~1722) 연간에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반대로 흰 바탕에 파란색으로 무늬를 표현한 대접에는 두 마리 용이

바위와 파도 위에서 춤을 추듯 구름사이로 여의주를 물고 있다.

그릇 안쪽 바닥에 "대명가 정년제"라고 적혀 있어 명나라

가정(1522~1566) 연간에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후면) 연꽃넝쿨무늬 대접(명 1368~1644년)

 

그릇 안쪽에는 연꽃, 비파, 여지, 석류무늬를, 바깥쪽에는 연꽃 넝쿨무늬를 장식했다.

청색이 선명하게 표현되어 무늬가 더욱 화려해 보인다.

굽안쪽 바닥에 "대명선덕년제"라고 적혀 있어 명나라

선덕(1426~1435 ) 연간에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좌측) 산수 인물무늬 필통(청 1644~1911년)

 

한 면에는 담장 안쪽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세 사람을 그리고, 반대편에는

담장 밖 풍경인 산과 나무를 그려 장면을 연결했다.

 

우측)용 무늬 붓걸이(명 1368~1644년)

 

파도 위를 솟아오르는 용의 형상으로 3개의 봉우리를

표현해  붓을 받칠 수 있게 만들었다.

투각기법을 사용하여 파도와 용의 움직임을 더욱 생동감 있게 표형 했다.

이런 모양의 붓걸이에는 보통 3개 또는 5개의 봉우리가 있다.

 

 

매병, 물병, 붓씻는그릇

 

매병(청, 강희 1662~1722), 물병(청, 강희 1662~1722 주둥이가 작고 배가 둥근 형태의 병이다.

술을 좋아했던 당나라 시인 이태백이 마시던 술병과 생김새가 비숫하여 태백존이라고 부른다.

원형의 교룡 무늬를 장식했다.)

붓씻는 그릇(청 강희 1662~1722 붓을 씻는 납작한 접시 모양의 그릇이다.

바닥에 "대청강희년제"라고 적혀 있어 청나라 강희 연간에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강두홍유

청나라 강희 (1662~1722) 연간에 유행한 붉은색 도자기 유약을 말한다.

분홍색 바탕에 짙은 붉은색 반점이 있거나 짙은 붉은색 바탕에 옅은 붉은색 반점이 있는

붉은 콩과 색이 비슷하여  "강두홍유"라고 부르는데, 제작이 어려워 황실의 문방용구처럼

특별한 물품에만 사용했다.  

 

 

접시와 잔(청 1644~1911년)

 

접시, 신발 모양 잔, 손잡이가 달린 잔

 

 

 

삼채 물고기 무늬병(후면 좌측)

 

요(916~1125년)

 

납작한 몸체 양쪽에 대칭으로 물고기무늬가 있고 홈이 있어서

끈으로 연결하여 사용할 수 있게 만들었다.

바탕은 황갈색유를 입히고 물고기무늬 위로 흰 테두리와 녹색유약을 덮었다.

요삼채는 당삼채에 비해 유약의 흘러내림이 적은 것이 특징이고 이동할 때

편리하도록 유목 민족의 습성이 잘 반영되어 있다.

 

 

녹유병(후면 우측)

 

요(916~1125년)

 

유목 민족이 말을 타고 이동할 때 사용한 가죽 물통을 모방하여 만든 병으로 말안장 모양이다.

전체적으로 녹색을 띠고 유약이 엷게 박락되었다.

원통형 입에 뚜껑이 있으며, 끈을 달 수 있도록 2개의 구멍을 뚫어 놓았다.

각각의 구멍에는 사람이 표현되었고, 몸통 부분에는 음각으로 꽃잎을 표현했다.

요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삼채항아리 (전면)

 

당(618~907년)

 

 

 

길상무늬 납작병

 

청대(1644~1911) 건륭 연간 제작

 

병의 배 부분이 둥근달처럼 볼록 튀어나와 편병이라고 부른다.

배 부분에 보상화를 둘러싸고 있으며 꽃잎 하나하나에는 길상무늬인 바퀴,

소라. 깃, 산, 꽃, 병, 물고기, 매듭이 그려져 있다.

몸체 바탕의 가장자리는 회문을 두르고 옆면은 넝쿨무늬로 장식했다.

 

 

인물 고사가 그려진 긴 목 항아리

 

청 (1644~1911)

 

이 항아리는 산수를 배경으로 한 인물고사를 장식했는데 가운데에 고관이

의자에 앉아 있고 그 주변을 왕실의 관원, 심판관, 병사들이 둘러싸고 있다.

청대 청화백자의 백색은 그 어느 것 보다도 희어야 하고,

청색은 그 어떤 것 보다 푸르러야 한다.

이 항아리 역시 이런 특징을 잘 살렸는데, 특히 붓으로 청화의

농담을 잘 표현하여 발색이 짙고 푸르다.

또한 꽃, 나무 등의 무늬를 평면적인 형태가 아닌 입체적으로 구성하여

마치 한 폭의 회화 작품을 보는 듯하다.  

 

 

매를 든 인물

 

중국 당(618~907) 도자

 

중국 당나라 때 만든 도자기 인형입니다.

손에 매를 들고 사냥하는 인물을 표현했습니다.

이 인물은 남성처럼 보이지만 여성입니다.

중국 당나라 때 매사냥은 여성들의 대표적인 야외활동이었습니다.

중국 북쪽 지방에 사는 민족의 전통복 장을 입고 머리에는 관을 쓰고 있습니다.

당나라 시대에는 외래문화에 개방적이었기 때문에 여성들도 북방 민족의

이국적인 옷차림을 하고 매사냥을 즐겼습니다.

 

 

 

용모양 손잡이 

 

당(618~907년)

 

 

박산 향료 외 다양한 향료들

 

 

경태람 향로

 

청(1644~1911년) 경태람은 법랑 기법의 한 종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