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4. 30. 18:31ㆍ나의 이야기
전통 한옥의 미를 간직한 논산의 명재 고택 전경
논산의 명재고택(국가민속문화재 제190호)은 조선시대의 학자인 명재 윤증선생
생전(1709)에 지어진 곳으로 조선중기 호서지방의 대표적인 양반가옥으로
전형적인 상류층의 살림집입니다.
사랑채 앞 축대와 우물, 연못과 나무에서는 조선시대 정원 조경술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으며,
계절의 변화에 따른 일조량 및 바람의 속도를 조절하기 위해 저장 공간인 광채와 비껴서
배치한 안채(서쪽)의 구조에서는 옛 선조들의 뛰어난 지혜를 엿볼 수 있습니다.
후원의 장독대와 소나무 숲은 실용성과 경관을 효과적으로
활용하여 조화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고택의 안채는 "ㄷ"자형, 사랑채까지 포함된 구조는 "ㅁ"자형의 목조 와즙단층 건물로 안채는 안주인이
생활하는 사적인 공간이기 때문에 외부로부터 보호 받고 살림하기 편하도록 "ㅡ"자형 대문에서
안채가 한눈에 들어오지 않게 내외벽을 두었습니다.
반대로 사랑채는 바깥주인이 전면의 농토와 정원을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자리한 공적이고 개방된 공간입니다.
또한 사랑채의 큰방과 작은방으로 연결되는 미닫이와 여닫이를 겸한 방문은 다른 한옥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창성이 뛰어난 작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명재고택 좌측의 연지와 작은 섬의 배롱나무 전경
명재고택 앞 주차장에 이르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연못으로 마당 좌측에 조성된 연못에는
자그마한 원형 섬을 만들어 배롱나무가 심어져 있습니다.
발가벗은 듯 매끄럽게 윤이 나는 배롱나무 고목의 가지는 신기(神氣)가 어린 듯 보여지고,
사랑채 우측 마당을 가득 메운 수백 개의 항아리가 장관으로 바라다 보입니다.
장독대 옆 야트막한 언덕에는 400년생 느티나무가 명재고택의 수호신처럼 버티고 서 있습니다.
명제고택은 솟을대문도 높은 담장도 없습니다.
누구나 쉽게 마당을 가로질러 곧장 사랑채로 가로질러 곧장 사랑채로 갈 수 있는데
집의 구조가 열린 형태이기 때문입니다.
현재도 그 점은 변함이 없으며 한옥을 체험하고 싶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습니다.
명재고택 사랑채 측면
뒤로는 산줄기를 병풍으로 두르고, 앞에는 장방형의 커다란 연못을 두었고 연못 안에는
자그마한 원형 섬이 있고, 그 안에 고택과 함께 300년의 세월을 보낸 배롱나무가 멋스러운
곡선을 그리며 운치를 더합니다.
연못을 지나 앞마당의 섬돌을 오르면, 기단 위의 기품 있는 사랑채가 손님을 반깁니다.
안채와 곳간채, 사랑채에서 찾은 선조들의 지혜
전면이 개방된 사랑채의 왼쪽으로 난 중문으로 들어서면, 안채가 나오는데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좌우가 대칭을 이루는 ‘ㄷ’자형 구조인데, 안채 앞에 사랑채가 있어 전체적으로는
‘ㅁ’자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사랑채에서 안채로 넘어오는 길에는 벽이 있는데, 이곳에 과학적인 원리가 숨어 있습니다.
문간에 벽을 설치하여 방문객이 안채의 내부를 볼 수 없도록 차단한 것으로 단 벽 아래에는
공간이 나 있어, 안채의 마루에서는 그 공간으로 신발을 보고 방문객을 미리 짐작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여자들의 공간인 안채를 남자들이 함부로 들여다볼 수 없게 한 지혜인 것으로 또한,
안채 옆으로 곳간채가 있는데, 두 건물을 나란히 두지 않고, 북쪽으로 갈수록
좁아지도록 두었습니다.
여름에는 남쪽에서 불어온 바람이 북쪽의 좁은 통로를 빠져나가기 때문에 그 속도가 빨라져
주변이 서늘해지고, 겨울에는 반대로 북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남쪽의 넓은 통로를
빠져나가 매서운 북풍을 피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덕분에 곳간채의 북쪽 끝 창고는 여름철에도 서늘해서, 이곳에
차갑게 보관해야 할 것을 둘 수 있었습니다.
이은시사
세상을 살면서 떠날 때와 은거 할 때를 아는 거처
도원인가
베치되어 있었는데 바로 도원인가를 설명하는 것으로 이 사랑채에서 눈을 아래로 두면
석가산(石假山)이 바라다 보이도록 배치하여 비록 몸은 이 곳에 있지만 금강산의
아름다움을 늘 곁에 두고 상상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나눔의 미덕이 지켜온 윤증 선생의 고택
명재고택은 조선 숙종(재위 1674∼1720) 때의 학자인 윤증(尹拯) 선생의 가옥으로,
그의 호를 따서 명재고택이라 불립니다.
그는 임금이 무려 18번이나 벼슬을 내렸으나 일체 사양했을 만큼, 성품이 대쪽 같았다고 하며
게다가 검소와 나눔의 미덕을 몸소 실천하고 후대에 가르쳤는데, 덕분에 은혜를 입은 사람들에
의해 동학혁명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고택이 소실될 뻔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윤증 선생의 성품을 반영하듯 고택은 다른 사대부 집안의 가옥에 비해 겉모습이
소박한 편으로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기품이 느껴질 뿐 아니라, 곳곳에 숨겨진 과학적 설계에
감탄하게 됩니다.
또 그 뒤로 작은 사랑방과 안 사랑방, 대문간이 이어지는데 명재고택의 객실은
안채의 건넌방을 비롯한 사랑채의 사랑방 3곳입니다.
누마루를 포함한 사랑채를 통째로 예약해 독채로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더불어 마당 한쪽에는 초가 별채가 있고, 음향장비와 빔프로젝터가 설치된 초연당(超然堂)도
있어 단체 모임이나 공연을 할 수 있습니다.
현대식으로 개조한 욕실 겸 화장실도 깨끗하고 사랑채에는 미닫이와 여닫이를 접목한 문이 있는데,
4쪽 미닫이문을 열고 다시 열면 여닫이문처럼 열리는 독특하고 과학적인 양식입니다.
또한, 사랑채 누마루에 앉아 연못과 그 너머의 마을과 앞산을 내다볼 수 있습니다.
사당 전경
언덕위의 느티나무 거목
안채 북쪽 중앙의 대청은 정면 5칸 측면 2칸이고 대청과 연결되어 뒷편 좌우에 고방이 있고,
대청의 서쪽에는 안방(2칸X1칸)과 웃방(1칸X1칸) 그리고 남쪽에는 넓은 부엌이 있고
부엌 위에는 다락이 있습니다.
사랑채 정면 4칸 측면2칸 규모에 2칸통의 대청과 누마루가 꾸며져 있고 중앙의 2간×2간 규모에는
온돌방을 만들고, 온돌방 뒤에 고방과 또 다른 방이 연결되어 집니다.
특징 안채의 ㄷ자와 행랑채 사랑채가 연결되어 ㅁ자형을 이루며, 대청, 누마루, 고방등의 배치가
검소하고 품위가 있으며, 지붕틀의 특수한 형태는 창경궁의 연경당과 같고, 평면배치,
구조적인 연결, 창호의 처리는 기능성과 다양성이 있습니다.
명재고택(明齋故宅)은 윤증(尹拯, 1629~1714) 선생이 살아계셨던 1709년에 아들과 제자들이
힙을 합쳐 지은 것이지만 선생은 고택에서 4km 떨어진 유봉에 있는 작은 초가에서 살았고
그 곳에서 돌아가셔서 명재고택의 "고"자를 옛 "古"가 아닌 연고"故"자로 쓰고 있다고 합니다.
윤증고택은 흔히들 풍수적으로 ‘옥녀탄금(玉女彈琴)’의 명당이라고 말합니다.
옥녀가 거문고를 연주하고 있는 형국이라는 말로 옥녀가 뒷산의 옥녀봉을 가리킨다면 거문고는
옥녀탄금의 좌측 무릎 위치에 해당하는 지점에 자리 잡은 평평한 야산에 해당합니다.
풍수에서 좌청룡의 자리는 끝 모습이 평평한 야산이 가로놓여 있으면
옥녀탄금이라고 이름 붙입니다.
이 고택은 파평윤씨(坡平尹氏)들의 세거지인 옛 이산현에 있는 이산(尼山)을 배산(背山)하여
인접한 노성향교(魯城鄕校)와 나란히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집 앞에는 비교적 넓은 바깥마당이 펼쳐져 있고, 그 앞에 인공 방형지(方形池)를 파고
조그마한 석가산(石假山)을 조성한 훌륭한 정원이 꾸며져 있습니다.
소론의 영수였던 명재 윤증 선생은 성품이 대쪽으로 임금이 무려 18번이나 벼슬을 내렸지만,
단 한 번도 벼슬길에 나서지 않아 ‘백의정승(白衣政丞)’으로 불리워집니다.
스승이었던 노론의 거두 송시열에 맞서 끊임없이 비판의 상소를 올리기도 했습니다.
명재고택은 윤증 선생의 기품을 닮아 고졸하고 단아합니다.
명재고택이 지어진 것은 1709년. 윤증 선생의 둘째 아들과 제자들이 초라한 집에서 기거하는 것을
보다 못해 십시일반 힘을 모아 지은 집으로 하지만 생전에 명재는 “과분하다”며 그가 살던 집을
떠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집은 주인의 성품을 닮게 마련으로 명재고택(明齋古宅, 구 윤증고택)은 노블레스 오블리주
(지도층의 도덕적 의무)를 다했던 조선 숙종 때 학자 윤증(尹拯·1629∼1714)의 꼿꼿함과
검소함을 고스란히 품고 있습니다.
겉보기에도 사대부가의 상류층 주택치고는 소박하고 단출합니다.
한데 집안을 천천히 뜯어보면 곳곳에 숨어 있는 과학적 원리와 아녀자에 대한 배려가
돋보이며 한옥의 아름다운 전통미도 넘치거나 모자람이 없습니다.
이른 초봄 시간이 허락한다면 고즈넉한 고택에서의 하룻밤을 보내며 옛선조들의 300년 숨결을
느꺼보고 싶습니다만 내일 심야에 목포에서 제주로 향하는 12:40분 산토리노란 배를
타야되다보니.....ㅜㅜ
제주에서 한 달 살기를 하러 차도선인 카페리를 타기 위하여 목포로 향하면서
내려가는 길에 잠시 짬을 내어 들렸던 명제고택.
이른 봄이었지만 서울보다 남족인지라 이 곳은 벌써 매화가 지고 있었습니다.
노성향교 전경
명륜당 전경
연못에 어린 배롱나무와 명제 고택
제주로 한달살기하러 향하던 중 잠시 시간내서 들렸던 논산 여행의 다음 코스는
근처의 면소재지에서 간단하게 점심을 먹은 뒤 종학당으로 향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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