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마용에 대적하는 한나라의 데라코타 한양릉(2019.5.25)

2020. 2. 9. 22:46나의 이야기











시안 한양릉에 전시된 4륜마차



























 한나라 왕 계열도




한 고조 유방이 쉰다섯이라는 비교적 이른 나이에 별다른 안전장치도 없이 세상을 떠나자

 새로운 제국은 그의 첫 번째 부인인 여후의 손에 들어갔습니다.


 여후는 한신과 팽월의 처형을 주도한 사람으로 유방은 말년에 여후의 잔인한 성품과 태자인 유영(劉盈)의

 나약한 성품 때문에 왕조의 미래가 걱정되자 여후를 제거하고 유영 대신 척(斥)부인 소생의 여의(如意)를

 태자에 앉히려고 했으나 이를 실현하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한나라의 제2대 황제는 혜제(惠帝) 유영으로 유영이 제위에 오르자 여후는 먼저 질투의 대상인

 척부인의 팔과 다리를 자르고 눈과 귀를 멀게 해서 '인간 돼지'로 만들어 그녀에게 보복했으며

 여의는 독살했습니다.


유영은 유약하지만 선량한 성품을 가진 사람으로 그는 어머니 여후의 잔인함에 치를 떨고

정치 자체에 흥미를 잃고 정사에 일체 관여하지 않고 놀기만 하다 6년 만에 죽었습니다.



















한양릉 무덤의 주인 경제























한 무제 유방




중국의 첫 번째  왕조는 진나라 (기원전221년~기원전206년)였었는데 진은 전국시대에 정복을

 통해 통일을 이룩했으나, 첫번 째 황제인 진 시황제가 죽은 뒤에 불안정한 상태가 되어 그가

죽은 후 4년 뒤 진왕조는 반란에 의해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두명의 반란 주동자였던  초의 항우와 한의 유방은 18개의 제후국으로 갈라져 있던

 중국의 패권을 잡기 위해 전쟁을 했습니다.


비록 항우가 지휘관으로서 더 뛰어난 면모를 보였으나, 유방은 현재의 안후이 성

 근방에서 있었던 해하 전투에서 항우를 물리쳤습니다.


 유방은 신하들의 권유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으며 장안(시안)

 통일된 왕조의 새로운 수도가 되었습니다.


전한 초기에는 서쪽지방은 수도를 포함하여 정부가 직접 통치하는 13개의 군으로

되어 있었고, 동쪽 지역은 10개의 제후국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초나라와의 전쟁을 도운 신하들을 달래기 위해 전한 고조는

 그들을 왕으로 임명하고 봉토를 하사했습니다.


그러나 기원전 157년까지 한나라는 모든 제후왕을

유씨일족으로 바꿔 버렸습니다.


 몇몇 반란들이 있었는데 가장 컸던 반란은 기원전 154년의 오초칠국의 난 이 일어난 이후,

한나라는 기원전 145년 이후 제후국의 크기와 군사력을 제한하는 새로운 법을 만들었고,

 제후국들을 더 작게 나누거나 새로운 군으로 만들었습니다.

 

왕들은 더이상 그들의 신하를 임명할 수 없었고,

오직 황제만이 임명할 수 있었습니다.


왕들은 그들의 영지의 이름뿐인 지배자였고, 세금의 일부만을

 그들의 개인 수익으로 가질 수 있었습니다.


 제후국 제도는 완전히 폐지되지는 않았는데 후한 때까지 이어졌습니다.




















(漢, 기원전202년 ~220년)은 진 이후 중국의 통일 왕조이며,

한나라는 이후 삼국으로 갈라졌습니다(220년 ~ 280년).


 한 왕조는 고조 유방(劉邦)이 건국하였는데 한나라는 섭정이었던

왕망이 세운 신에 의해 잠시 맥이 끊겼었습니다.


이 시기에 한나라는 전한(서한, 기원전202년 ~8년)

 후한(동한, 25년~220년)으로 나뉘어 집니다.


 약 400년 지속하였으며, 중국의 역사상 가장 강대했던 시기 중의 하나였으며 오늘 날에

 중국의 약 92%를 차지하는 민족인 한족 역시 이 왕조의 이름에서 유래했습니다.


한나라는 중앙 정부가 직접 통치한 군과 몇 개 제후국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제후국은

 서서히, 특히 오초칠국의 난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자치권을 잃었습니다.


기원전 200년 유라시아 초원지대 동쪽지역에서 활동하던 흉노족이 한나라 군대와 싸워서

 승리했는데 전쟁에서 패배한 한나라는 전쟁보상금을 지불하고 명목상 공주가 예물을

 가지고 흉노 선우와 결혼하는 형태의 동맹조약을 맺었습니다.


그러나 조약을 맺었음에도, 흉노족은 한나라의 국경을 계속 침입했고, 무제(재위: 기원전141년

 ~ 기원전87년)는 전방위로 흉노를 압박하며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약 30년간 전쟁으로 흉노는 크게 패하여 급속히 피폐해졌고, 한무제가 대외원정을 위해

 개정한 법안을 악용하여 대토지를 소유하기 시작한 호족들에 의해 한나라는 땅을 잃고

가난에 시달리는 백성들이 생겨났습니다.


이 전쟁으로 인해 흉노족은 외몽골 북쪽으로 밀려났는데 그 후에 흉노는 내부 분열이 일어나

 남흉노와 북흉노로 갈라졌고, 흉노의 지배를 받던 선비족과 오환족이 독립하여 남흉노와 함께

 한나라에 책봉을 받고 조공하는 위치가 되었습니다.


89년에는 한나라가 남흉노와 선비족 병력을 이끌고 북흉노를 공격하여 멸망시켰습니다.

(후일에 위나라의 관구검 역시 오환족과 선비족 병력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공격하기도 했습니다)


92년 이후, 환관들의 정치 개입이 점점 심해졌고, 외척 세력과 황태후와의

권력 다툼 등으로 인해 결국 한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또한 왕조는 황건의 난과 오두미도의 난 등을 선동한

도교의 등장에 의해 위협받게 되었습니다.


후한 영제 (재위 168년 -189년)가 죽은 뒤 환관들은 군인들에 의해 학살을 당하고

이후 귀족들과 장군들이 군주가 되어 국가를 나누어 가졌습니다.


 위왕 조비가 후한 헌제의 황위를 빼앗음으로써 한나라는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한나라 황족인 유비가 한소열제로서 221년 한중과 파촉 지역에서 촉한을 세우나

 이 또한 263년 멸망하여 470여년간의 한나라의 치세가 끝나게 됩니다. 

 

한나라는 경제적으로 큰 발전을 한 시대였으며, 주나라

처음 만들어진 화폐제도가 크게 발전을 했습니다.


 기원전 119년 중앙 정부의 조폐국에 의해 발표된 화폐 제도는 당나라때까지 유지되었는데

 전쟁에 쓸 비용과 새로 얻은 영토에 사람들을 정착시키기 위해 사용한 돈을 마련하기 위해

정부는 기원전 117년 소금산업과 철기 산업을 국영화했습니다.


 정부의 독점은 후한에 이르러 폐지되었고, 그로 인해 줄어든 수익은 개인 사업가들에게

높은 세금을 매김으로써 다시 올렸습니다.


황제는 한나라 권력의 중심이 되는 것을 노려 황제는 정부의 회의는 주재했으나,

 권력을 귀족과 임명된 장관들과 나누어 가졌습니다.


무제의 치세기간부터 한나라는 유교를 받아들여 교육과 정치에 도입했고,

동중서와 같은 유학자들을 등용했으며, 향거리선제를 실시했다.


이런 정책은 1911년 청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계속 되었으며 또한 한나라 시대에 과학과

 기술 역시 큰 발전을 했는데, 종이 제작과 선박의 키, 음수등이 만들어졌습니다.


























한양릉은 진시황의 병마용과는 전혀 다른 특색을 지닌 인물 테라코타 5만여 점이 매장되어

 있어서, 시안에서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될 볼거리입니다.


시안 일대에 산재한 황제들의 무덤 중에서 유일하게 발굴되어 ‘중국 최대의 지하 박물관’으로 불리는데

 셴양 동쪽 외곽에 시안 신공항을 건설하면서 도로를 내던 중에, 우연히 한나라 경제(景帝, BC188~141년)와

 황후의 무덤인 양릉(阳陵)을 발견했습니다.


부장갱에서 출토된 도용(陶俑)이 진시황의 병마용처럼 시선을 압도하는데 양릉에는 총 81개의

 부장 갱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현재까지 발굴된 것은 10개입니다.


 능원 면적이 20㎢나 되어서 돌아보려면 3~4시간이 필요하지만,

그 시간이 절대로 지루하지 않습니다.
























한나라는 진나라가 멸망한 이유를, 백성들에게 막대하게 세금을 부과하고 대규모

 토목 공사로 징집하여 희생을 강요한데 있다고 보았습니다.


경제는 한나라가 강대국으로 번성하는데 이바지한 인물로, 중앙 집권제를 공고히 다지고,

세금을 과감히 낮추고, 화폐를 사사롭게 주조하는 일을 전면 금지했습니다.


외교력을 발휘해 불필요한 군비 지출을 줄이면서 민심이 크게 안정된 시대를 열었으며

 그가 재위한 16년을 가리켜 ‘문경지치(文景之治)’라 부르는 이유랍니다.


그런 까닭에 한나라의 도용들은 소박하여 키가 60cm로 진시황의 병마용에 비하면

 3분의 1 크기로 지하 박물관에서 생생한 발굴 현장과 도용을 볼 수 있습니다.





















한양릉에 매장된 도용들 전경




도용(陶俑)은 흙으로 인간이나 동물 모양의 인형을 만들어 죽은 사람과 함께 매장한

 것을 가리키며 테라코타라고도 합니다.


전국 시대부터 당나라까지 유행했으며, 명 · 청 시대에도 명맥이 이어졌습니다.





















21호 갱
























지하 박물관은 대량의 도용(陶俑)이 발굴된 지하 갱도에 세워졌는데 바닥에 통유리를 깔아 지하 갱의

 원형을 생생하게 체험하도록 설계했는데, 통유리 밑으로 아기자기한 테라코타가 줄지어 서있습니다.


한나라의 도용은 생김새가 모두 비슷비슷한 편이며, 진시황의 병마용보다 표정이 밝아서 친근하게

느껴지며 여성, 남성, 환관 등 인간 테라코타와 돼지, 닭, 개, 말 등 가축 테라코타도 즐비합니다.





















19호갱

























재미있는 것은 도용이 옷을 걸치지 않은 나체 상태라는 것으로 

덕분에 누구나 쉽게 남녀를 구별할 수 있습니다.


원래는 옷을 입고 있었는데 천이 썩어서 벌거벗은 상태가 되었습니다.


또한 사람 도용은 모두 팔이 없는데, 이는 팔을 나무로 제작해서

흙으로 만든 몸체에 부착했기 때문입니다.


 2,000년이란 세월을 지나오며 옷과 함께 나무 팔이 자연 부식되어 자취를 감췄습니다.


다리를 쩍 벌리고 춤추는 듯한 자세의 테라코타는 기마병입니다.






















18호 갱























17호갱

























16호갱

























15호 갱

























14호 갱

























13호   갱
























12호 갱
































13호 갱
























































  황제의 무덤



능원에서 서남쪽에 위치한 봉분은 황제의 무덤이고,

 동북쪽 봉분이 황후의 무덤입니다.






















황후의 무덤


























오늘 어침 호텔을 떠나 시안공항으로 향하던 중 시안여행 5일차 마지막 코스로 들렸던 한양릉

 이제 시안의 모든 관광을 마치고 이제 한국으로 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