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2. 8. 20:15ㆍ나의 이야기
중국에 현존하는 최대 규모의 성벽인 시안 성벽 (西安城墙)의 장락문 전경
시안 성벽은 당나라 때 장안 황성(长安皇城)으로 축조했던 성벽이 원조로 당나라 말기에
장안 황성 대부분이 파괴되면서 수도를 뤄양으로 옮겼고, 1374년 명나라가 방어 체계를
구축할 목적으로 새로이 성벽을 쌓았습니다.
시안 시가 1983년부터 무려 20년에 걸쳐서 명나라 때의 성벽을 복원하는데 성공했는데 높이 12m,
폭 15m, 총 길이 13.7km에 달하는 성벽으로, 총 98개의 성루가 성벽을 따라 이어집니다.
이른 아침 호텔에서 아침을 먹은 후 시안의 제일 중심가에 있는 시안 성벽으로 향합니다.
우리가 한국에서 선택한 이번 시안 여행 상품은 시안 성벽인 경유 차창밖 관람이었는데 시안을 관광와서
디른 곳을 몰라도 시안의 상징하는 시안 성벽을 안올라가 보고 되돌아 간다는 것이 마음에 안들어 어제
가이드와 협의를 하여 일행들 모두가 시안 성벽을 올라가서 돌아보는 것으로 1인당 20$에 합의를 해서
오늘은 시안 성벽을 올라가서 돌아보는 것으로 여행 일정을 추가 하였습니다.
시안도 중국에서는 제법 큰 도시인지라 시내 중심가는 복잡하고 큰 건물들이 제법 많습니다.
시안지도
시안의 성벽을 돌아보려면 먼저 남문에서부터 시작하는데 이곳은 대부분의 버스 종점들이 모이는 곳으로
교통의 중심지이기도 하며,비림박물관에서 나오면 바로 남문과 연결됩니다.
성벽 위에 오르면 끝이 가물거리는 기다란 성벽과 당당하게 서 있는 누각, 정연하게 서서 펄럭이는
깃발들, 해자의 도랑물과 어울리는 나무와 풀밭 등이 바라다 보입니다.
또 성벽과 맞붙은 거리는 고층 건물이 줄지어 서고 신축 중인 빌딩도 많이 있어
시안의 발전되고 있는 상황을 볼수 있습니다.
성벽의 통로를 오가는 수많은 관광객들의 행렬과 넓은 성을 둘러보기 위한
전동차도 운행하고, 자전거도 임대하여 줍니다.
매년 음력 정월 보름에는 성벽 위에서 제등을 하고 등불을
밝히는 행사도 열리고 있다고 합니다.
서안 성벽 . 비림 역사 문화 경구 전경도
AAAAA A가 5개인 시안 성벽은 중국에서도 중요한 문화유산이라는 뜻인데 이런 문화재를 차창밖
관람이라는 중국 시안 여행 상품이 조금은 웃긴다는 생각이 드시겠지만 패키지 여행상품이 저렴한
경우에는 이런 방법으로 현지 여행사들에게 옵션이나 상품판매로 밥벌이를 할 수 있도록 카르텔이
구성되어 있답니다.
그러다보니 싼 패키지 여행상품이 비지떡이란 생각도 드시겠지만 그래도 잘만 선택옵션을 골라
여행을 하신다면 그런대로 가성비는 그렇게 나쁘지는 않답니다.ㅎ
3~4성급 호텔에서 먹여주고 재워주고 기본 교통편에 관광지 입장까지 포함되다보니 일부 선택 옵션비가
더들어가더라도 낮선곳을 헤매이는 우도 없을 뿐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비용은 덜 들어 가는.....ㅎ
장락문 전경
"자기동래(紫氣東來)"란 현판이 걸려있는 장락문위 3층 누각전경으로 "자주빛 서기가 동쪽에서
온다는 뜻으로 자미성과 북두칠성에 관련한 문화는 동방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자기(紫氣)는 자색 기운을 의미하며 이는 관직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믿어 관복에 많이 사용했던 색상입니다.
함곡관을 지키던 윤희가 하루는 동쪽에서 자색 기운이 서리는 것을 보고 특별한 사람이
함곡관을 넘겠구나 하고 생각을 하였는데 청년 노자가 푸른 소를 타고 나타나 관을 넘어가
벼슬길에 올랐다고 합니다.(사기:노자 한비열전)
그 후로 자기동래(紫氣東來)는 좋은 일이 생길 길조를 비유하는 성어로 쓰입니다.
시안 성벽 장락문 위에서
화려한 의상을 입은 중국인 아줌씨가 저를 보고는 사진을 찍어 달라고하여
찍어 주고는 로드 케스팅 모델로 .....ㅎ
욱일동승(旭日東升 : 해는 동쪽에서 떠 오른다란 편액이
동문이라는 걸 알려줍니다.
장락문 전경
시안성벽(西安城墙)은 산시성 성구에 위치해 있는데 명나라 초기에
당나라 장안황성의 기초 위에 건조한 것입니다.
이후 수차례 중수 공사를 거쳐, 방어체계를 구축하였고, 중국에서 현존하는
최대 규모의 고성벽이 완료되었습니다.
1961년 시안성벽은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에 의해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습니다.
중국의 성벽은 성을 구성하는 건축 구조의 일부로,성 내부의
구조물을 지키기 위해 쌓은 벽입니다.
성곽은 네모꼴로 쌓은 성과 다시 그 바깥에 네모꼴로 쌓은 곽(郭)으로
구성되는 이중의 벽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안쪽의 것을 성, 또는 내성(內城)이라 하고, 바깥쪽의 것을
곽(郭) 혹은 외성(外城)이라고 합니다.
삼중인 경우에는 맨 안쪽을 내성, 다음을 중성(中城), 바깥을 외성이라고 하며,
만약 도성(都城)이면 왕성(王城), 궁성(宮城), 황성(皇城)이라 부릅니다.
중국의 성은 평지성이 방어의 기본이다 보니 성벽을 매우 높게 짓고 다중문 방식의
성문을 채택해 평지성이지만 높은 방어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일본의 경우에는 성문이 기본적으로 작은데다가 한 두개 밖에 없고 산노마루, 니노마루,
혼마루라고 불리는 3중 성벽구조를 기본적으로 갖추고 있습니다.
침입해온 적군들을 언제나 사방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내부구조도 미로같이 만들어 놓아
역사상에서도 손꼽히는 매우 높은 방어력을 자랑했습니다.
다만 그 대가로 교통성이나 거주편의성 등 평시성의 기능을
많이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서안 성벽의 방어적인 기능은 아주 다양하여, 성벽을 둘러싼
해자가 첫 번째 방어선인 셈입니다.
물길위의 개폐교가 유일한 통로인데 낮에는 내려져 있어 출입이 가능하지만
일단 밤이 되면 공중으로 올려져 유일한 통로가 끊어지게 됩니다.
두 번째 방어선은 해자 안쪽, 성벽 바같쪽에 지은 갑루(閘樓)로 평소에는 시간을 알리고
유사시에는 경보를 울리는 역할을 합니다.
갑루뒤에 위치한 30m높이의 초소용 성루가 세 번째 방어선입니다.
성루에는 온통 활을 쏠수 있는 작은 구멍이 나 있습니다.
초소용 성루와 성문 상단에 조성된 성루사이의 옹성이 네 번째 방어선입니다.
성문밖에 반달모양으로 둥글게 조성된 옹성은 적군이 진입했을 경우 두 쪽의 문을 닫아
적군을 독안에 든 쥐로 만드는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다섯 번째 방어선은 당연히 든든하고 높아서 냉병기 시대에는
거의 공략이 불가능한 성벽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장락문 전경
장락문의 장락(長樂)은 명나라가 "오래도록 즐겁기를 축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명나라 말에 이자성이 시안을 쳐들어올 때 바로 이 성문으로 들어오면서 성문에 걸린 "장락문"이라는
편액을 보고서 “황제가 오래도록 즐거우려면 백성은 오래도록 고통스러워야 하겠지”라고 말하자
곁에 있던 부하가 즉시 장락문의 성루(城樓)를 불태웠다고 합니다.
지금 장락문의 성루는 청나라 때 다시 만든 것입니다.
※ 동문 장락문(长乐门), 서문 안정문(安定门), 남문 영녕문(永宁门), 북문 안원문(安远门)
당나라 황성의 서쪽 중문이었던 안정문(安定門)에는 서쪽 변방을
안정시킨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 옛날 실크로드를 향해 열려 있던 문, 상인들이 낙타를 타고
오가던 문이 바로 이 안정문입니다
영녕문은 시안의 성문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수나라 때인 582년에 만들어졌는데
원래 이름은 안상문(安上門)이었고, 명나라 때 영녕문(永寧門)으로 개칭되었습니다.
영원히 안녕하라는 의미가 담긴 문인데, 영녕문이 있는 성벽 위의 전루(箭樓)는 1926년
류전화와의 공방전에서 훼손되었고 현재의 것은 2013년에 복원된 것입니다.
북문으로 만들어진 안원문에는 소수민족을 포섭하려는 염원이 담겨 있는데 "안원((安远)"은
멀리 있는 이민족을 위무하여 귀순하게 한다는 의미로 신해혁명 때 안원문의 전투가
격렬하였는데, 당시에 훼손된 전루는 1983년에 복원되었습니다.
:
오늘날의 서안성벽은 명나라 초기에 건설된 것으로 당나라 말기 뤄양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원래의 도성인 당장안성은 대부분 파괴되었습니다.
명나라 초기 주원장에 의해 둘째 아들 주협이 진왕으로 봉해졌고, 서안부를 두었습니다.
홍무 7년인 1374년에 서안장벽의 재건공사가 시작되었는데 장벽을 중간할 때 서, 남 양쪽은
원래의 당나라 장안성 황성의 터 위에 성을 연장하여 만들었고, 동쪽 벽과 북쪽벽은
새롭게 만들어졌습니다.
이 공사는 1378년 홍무 11년까지 8년을 진행하여 기초를 완공하였습니다.
그 후 1568년 융경 2년 장벽 위쪽 공사와 외벽쪽의 공사가 마무리되었고 1636년 명나라 말 숭정 9년
섬서순무 손정정이 이자성의 반란을 막기 위해 네 문의 옹성을 추가로 만들었습니다.
1643년 숭정 16년 서안을 공격했고, 다음 해 1644년 이자성은
칭제를 하며 국호를 대순이라 칭하였습니다.
청대에 이르러 명나라 때 기본 골격을 따랐고, 열 두차례에 걸친 중수 작업이 이루어졌는데
그 중 규모가 가장 큰 것은 건륭제 46년인 1781년의 작업이며, 포와 해자를 추가하여
대대적인 방어능력을 향상시켰습니다.
일찌기 원나라에서 17년 동안 머물렀던 마르코 폴로는 <동방견문록>에서
"시안은 매우 두껍고 높은 성벽으로 난공불락의 도시”라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
황소의 난을 평정한 주전충(朱全忠)이 당조의 소종을 압박해 수도를 낙양으로 옮기게 하고
궁전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궁정 안이 철저히 파괴되면서 성벽 역시 훼손되었기에
개축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마르코 폴로가 보았던 성벽은 당나라 말 우국군(佑國軍)절도사 한건(韓建)이
과거 수, 당 시기 성벽을 개축한 것입니다.
한건이 개축한 장안성의 규모는 원래 당나라 장안성의 4분의 1에 불과했습니다.
명나라 성벽에서는 일찌기 한건이 개축했던 성벽의 서쪽과 남쪽 부분이 그대로 활용되었고,
동쪽과 북쪽으로는 크게 확장되어 새로 축조되었습니다.
이것이 지금의 시안 성벽입니다.
시안 성벽은 방어용 목적으로 만들어졌으며, 동서로 길쭉한 장방형입니다.
동벽은 2,590m, 서벽은 2,631m, 남쪽 장벽은 3,441m, 북쪽 장벽은 3,241m로 전체 둘레 13.75km이고,
성내의 면적은 총 12평방킬로미터로, 당나라 장안성의 1/7 정도의 크기입니다.
성벽의 높이는 12m, 아래에서 15~18m에 이르고 서안성은 동서남북으로 4개의 성문이 있고,
각각 장락문(长乐门), 안정문(安定门), 영녕문(永寧門)과 안원문(安遠門)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고,
문 밖에는 옹성이 고르게 쌓여있습니다.
각 문은 3층으로 3중으로 나뉘어 있고, 바깥이 안쪽을 향하게 되어있습니다.
고루 (鼓楼) : 시계가 없던 시절 밤을 알리던 장소
사진을 찍어 주었던 중국인 아줌씨를 또 만나서 모델로.....ㅎ
시안 성벽 위에서
시안 성벽위를 오가는 전동카
오늘날 성벽은 여행자에게 이색 놀이터로 직사각형 형태로 온전하게 이어진 성벽을
따라 도보로 한바퀴(3~4시간 소요) 돌아도 좋고, 성벽 위에서 대여해 주는 자전거를 타고
하이킹을 해도 좋습니다.
폭이 2차선 도로보다 넓어서 자전거를 타고 질주해도 될 정도이며 성벽이 매끈한 아스팔트 도로는
아니라서 자전거 하이킹 중에 엉덩이가 좀 아플 수 있습니다.
자전거 타기가 가장 좋은 시간은 이른 아침과 해질 녘으로 아침에 도심과 성벽이 안개에 휩싸였을 때
가장 운치 있고, 해질 녘 붉게 물든 도심과 검푸르게 빛나는 성벽이 사진으로 담기 좋습니다.
매일 2회(10:30, 16:20) 남문의 옹성(瓮城)에서 군사 훈련 및 입성 의식을 거행한다고 합니다.
성벽 바깥쪽 바닥에는 적의 침입을 막고자 판 연못인 "해자"가 있으며 동서남북으로 각각 성문이
하나씩 있었는데, 그 중에서 서문(안정문(安定门, 안딩먼)은 고대 실크로드로 가는 길목이라서
중요시되었고, 싸움이 잦았던 북문(안원문(安远门, 안위안먼)은 도성을 수호하는데 매우
중요했다고 합니다.
시안성벽 위에서
최초의 시안성벽은 황토로 축조했고 성벽 하단은 흙과 석회, 찹쌀죽을
섞어서 더 없이 견고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뒤에는 또 성벽의 안팎에 청색의 벽돌을 쌓아 견고함을 더해주었습니다.
시안 성벽 공원에서 춤을 추고 있는 시안 시민들
내성 장락문을 배경으로
빗물 출수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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