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시황제의 호화로운 병마용과 대비되는 아들 진2세 호혜의 묘(2019.5.23)

2020. 2. 6. 21:16나의 이야기











진2세 호혜의 묘 전경





















흥선사를 볼아 본 후 진 2세 호혜의 묘로 향합니다.
























차창밖으로 보이는 시안의 거리풍경




시안의 젊은 여성들의 옷차림을 보면 무채색계열의 칙칙하고 어두운 계열의 의상에서

 많이 진보되어 이젠 제법 세련미가 나는.....























천하를 통일했다는 천하일통탑 전경





















진2세 호혜의 묘 안내도


























보의 이수


朝回日日典春衣  (조회일일전춘의)   조회에서 돌아오면 날마다 봄옷을 저당 잡혀

每日江頭盡醉歸  (매일강두진취귀)   날마다 곡강에서 만취하여 돌아온다.

酒債尋常行處有  (주채심상항처유)   술빚은 가는 곳마다 늘 있기 마련이지만

人生七十古來稀  (인생칠십고래희)   인생살이 칠십년은 예부터 드문 일이라네.

穿花蛺蝶深深見  (천화협접심심견)   꽃 사이를 맴도는 호랑나비는 보이다 말다 하고

點水蜻蜓款款飛  (점수청정관관비)   강물 위를 스치는 물잠자리는 유유히 난다.

傳語風光共流轉  (전어풍광공류전)   봄 경치여! 우리 모두 어울려

暫時相賞莫相違  (잠시상상막상위)   잠시나마 서로 어기지 말고 賞春(상춘)의 기쁨 나누자.


一片花飛減却春  (일편화비감각춘)   한 조각 꽃잎 날려서 봄은 사라져가고

風飄萬點正愁人  (풍표만점정수인)   바람에 흩날리는 만 조각 꽃잎에 정녕 시름에 잠긴다.

且看欲盡花經眼  (차간욕진화경안)   다시 눈 들어 보니 지는 꽃 눈에 들어오거늘

莫厭傷多酒入脣  (막염상다주입순)   서글픔 많다 하여 술 마시길 꺼려하지 말라.

江上小堂巢翡翠  (강상소당소비취)   강 한 복판 작은 누각엔 물총새 둥지를 틀고

苑邊高塚臥麒麟  (원변고총와기린)   상림원옆 높은 무덤 앞엔 기린 석상이 누워 있다.

細推物理須行樂  (세추물리수항낙)   사물의 이치를 곰곰이 따져본즉 모름지기 즐겨야 하리니




※ 진2세 호혜의 묘는 시안에서 곡강(현재 남호공원)이 바라다 보이는

 구릉지대에 위치해 있습니다.























진시황제의 도량형과 화폐개혁을 나타낸 조형물






















진시황의 큰아들 부소와 그를 따르던 장군 몽염























승상 이사와 진2세 호혜





















환관 조고




중국의 10대 간신 
 
1.경보( 庆父)
BC 600대,노나라 환공의 아들(경보 숙아 계우)
장공의 아들 반을 없애고 개(開)를 세웠다 다시 죽임. 맹자의 祖先. 맹손씨 -맹씨 
 
2.조고(趙高)
BC 200년대. 진시황때의 권신 환관(이 아니라는 설도) 
 
시황 사후 이사와 함께 어린 호혜를 추대. 이사 죽이고 승상이 되다. 다시 2세 죽임. 자영(子嬰)에게 죽다 
 
3.양기(梁冀)
-159년. 동한의 외척 권신, 딸이 순제의 황후 
 
4.동탁(董卓)
-192년. 동한말 권신, 어린 헌제 농락. 여포가 죽이다 
 
5.래준신(來俊臣)
651-697년. 당측천무후시 권신, 밀고(密告)의 일인자 
 
6.이임보(李林甫) 당헌종시 안사의 난 유발  
 
7.진회(秦檜) 1090-1155년. 남송 휘종시 악비를 죽이다  
 
8.엄숭(嚴嵩) 1480-1567년. 명세종시 권신  
 
9.위충현(魏忠賢) 명말 휘종시 
 
10.환관 화신(和珅) 1750-1799년. 건륭제시 건륭제(가경)의 총신이었으나 가경에게 죽임당함. 

오죽하면 경보가 죽어야 나라의 환란이 끝난다는 말이생겨나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전시실에 있는 진나라의 지도인데 우리나라 평양까지 진나라 영토로 표기를......ㅜㅜ


주중한국대사관에서는 이런 동북공정의 잘못된 오류를 바로 잡아주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진나라의 황제에 올랐으니 그의 묘를 황제릉이라고 불러야 정상이겠으나 릉이라고 부르지 않고

 진 2세 묘라고 불리는 것은 호혜가 무능하고 무자비할 정도로 잔혹하게 통치를 한 탓에 민심이

그에게서 떠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중국 진(秦)나라 시황제(始皇帝)는 37년(기원전 210년) 10월에 수도 함양을 떠나 회계에서 노닐다가

 북쪽 낭야로 가고 있었는데, 이 거동에는 승상 이사(李斯)와 왕명 출납 담당 환관 조고(趙高), 그리고

작은 아들 호혜(胡亥)가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중간에 시황이 병이 들어 일행이 사구(砂丘)에 이르렀을 때, 위독해지자 진시황은 조고를 시켜

부소(扶蘇, 시황의 장자)에게 줄 유서를 “군사는 몽염(蒙염)에게 맡기고 함양에 와서 나의 영구(靈柩)를

 맞아 장례를 거행하라.”라고 만들었습니다. 
 
유서를 봉함하고 미처 사자(使者)에게 주기도 전에 시황이 죽으니 유서와 옥새(玉璽)가 다 조고에게

 있었고, 시황의 죽음은 상기 3인과 환관 5~6명만 알 뿐이므로 이사(李斯)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국상(國喪)을 비밀에 부치고, 이 세 사람이 공모하여 유서를 위조 호해(胡亥)를 태자로 삼고,부소와

몽염 장군에게 죄를 뒤 집어 씌워 자결을 명하는 내용으로 바꿔 놓았습니다.


시황의 유해가 함양까지 운구되는 동안 악취를 막기 위하여 소금에 절인 생선 수레까지 동원하여

시황제의 유해를 살아 있는것으로 위장하여 함양으로 운구하였는데 유해가 함양에 도착하자 진시황의

 죽음이 발표되고 태자 호혜가 2세 황제가 되고, 위조된 유서를 받은 장자 부소는 자결하고, 몽염은

 결국 사약(賜藥)이 내려져 죽게하였습니다.


 장자 부소를 북방의 만리장성 축조를 하던 몽염 장군에게 보낸 것은 40만 대군을 한 손에 쥐고 있는

 그를 감독하도록 보낸 것인데 결국 아무것도 무르는 호혜에게 제위(帝位)를 물려주게 되어 진나라는

 15년 단명으로 막을 내리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조고는 미천한 신분으로 환관(宦官)이 되어 호혜의 사부(師傅)로 있었을 뿐 정치권력은 없었으나

 음모를 써서 2세 황제를 즉위시켜 권력을 쥐게 되자 자기와 감정이 좋지 못했던 자들에게 죄를 뒤집어

씌워 투옥하고 처형하여 많은 사람들로부터 원망을 사게 되니 대신들이 조정에 들어가 정사(政事)를

아뢰다가 자기의 비행을 말할지 모름으로 “황제를 조정에 나오지 못하게 해야겠다.” 고 생각하고

 2세 황제에게 아뢰기를 “천자(天子)가 존귀한 것은 군신들이 천자의 소리를 들을 뿐 그 얼굴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폐하께서는 아직 나이가 젊어서 모든 일에 능통하지 못하시니 잘못 처리하면 폐하의 단점을
 대신들에게

 보이게 됨으로 폐하는 금중(禁中)에 편안히 계시고 사건이 생기면 신과 시중(侍中)이 결정하여 처리하면

 대신들이 감히 의심나는 일을 아뢰지 못하고 폐하의 현명하심을 칭찬할 것 입니다." 
 
호해는 원래 정사(政事)에는 관심이 없는지라 조고의 말에 따랐고,

 조고는 정권을 한 손에 쥐게 되었습니다.


조고는 최대 라이벌인 승상(丞相) 이사(李斯)를 제거하기 위하여 이사 부자(父子)가 역모를

 꾀한다고 음모를 꾸며 처형하고, 우승상(右丞相) 풍거질(馮去疾)과 장군 풍겁(馮劫)도 모함으로

자결케 하였습니다. 
 
이사를 죽이고 중승상(中丞相)에 임명된 조고(趙高)는 스스로

권력의 위력을 알고 자기 권력을 시험하고 싶었습니다.


 하루는 사슴을 호해(胡亥)에게 바치고 “폐하 이것은 말(馬)이옵니다.” 라고 하자, 호혜는 웃으면서

 “승상이 나를 놀리는 구려!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하다니?” 조고가 정색을 하며 말했는데  “그러시면

좌우에 있는 신하에게 하문(下問)하여 보시옵소서.” 2세 황제 호혜가 좌우 신하에게 물으니 어떤 신하도

 묵묵부답이거나 그 것은 말이라고 대답했는데  조고는 사슴이라고 대답한 신하를 눈여겨 보았다가

은밀히 처단하였습니다.


그 후로는 군신들은 모두 전전긍긍 조고가 두려워 감히 조고의

 잘못을 말하는 자가 없었다고 합니다. 


이 때 생겨난 고사성어가 지록위마(指鹿爲馬)라고 하는데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한다"는 뜻이랍니다. 


억지로 남에게 강압한다든가 , 흰 것을 검다고 말하게 한다든가 , 남을 눌러 비리를 어거지로

 덮으려고 하는 것을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한다.」라고 말합니다.


 당서(唐書)의 「원진전」(元稹傳 )에는 호혜가 말과 사슴을 구별 할 수 없을 정도로 무도한 언행이

 많았기 때문에 그 우매함을 「마록」 (馬鹿) , 즉 바보라고 했다고 적혀 있습니다. 
 
조고는 후에 호혜를 죽이고 부소의 아들 영(瀴)을 세워 진왕으로

 삼았지만 바로 이 영에게 주살되고 맙니다. 


폭정에 숨죽이던 진시황제 사후 2세 호혜의 악행에 들꿇었던 민심은 아직 준비가 덜된 상태에서

 진광과 오승이 봉기하지만 설익음에 스러지게되고 다시 일어난 유방과 항우에 의해 진은

 멸망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