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메니아의 대학살 추모공원 치체르나카베르드(제노사이드Genocide 2019.8.25)

2020. 1. 9. 23:17나의 이야기












아르메니아 대학살 추모공원(치체르나카베르드) 전경




제노사이드 (Genocide)



제노 사이드란 집단살해(集團殺害)라고 번역되고, 어떤 종족 또는 종교적 집단의

 절멸을 목적으로 하여 그 구성원의 살해 · 신체적 · 정신적 박해 등을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제노사이드의 전형적인 것으로서 나치스  독일에

의한 유태인 박해를 들 수 있습니다.


 1948년 12월 9일 제3차 UN총회에서 「집단살해죄의 방지와

 처벌에 관한 협약」이 채택되었습니다.






















1948년 국제연합 총회에서 채택된 ‘제노사이드 범죄의 방지와 처벌에 관한 협약’에 따르면,

 제노사이드란 “국민 · 인종 · 민족 · 종교집단을 전체 혹은 부분적으로 파괴할 의도를

가지고 실행된 행위”로 정의됩니다.


이 협약은 국민 · 인종 · 민족 · 종교집단 구성원에 대한 살해뿐만 아니라,

육체적 · 정신적 위해(危害), 가혹한 생활조건의 부과, 강제적 불임조치, 강제이송까지도

 제노사이드 범죄에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이 협약의 이론적 기초를 제공한 사람은 폴란드 출신의 법학자인

 라파엘 렘킨(Raphael Lemkin)입니다.


 1943년에 인종이나 종족을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 ‘genos’에 살인을 의미하는 라틴어 ‘cide’를

결합하여 ‘제노사이드’라는 표현을 최초로 만들어 낸 그는 이 개념을 통해 20세기에 들어와

 보편화된 “국민이나 민족 집단에 대한 파괴행위”에 관해 인류의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고자 하였습니다.


그에 따르면, 집단학살(mass killing)이 인류의 역사 전체에서 보편적으로 발견되는 현상으로서

 전쟁과 같은 특수한 상황의 부산물인 데 반해, 제노사이드는 특정 이데올로기를 표방하는

국가기구에 의해 실정법에 근거하여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자행된다는 점에서 20세기

 이후에 나타난 특징적 현상입니다.


이와 같은 이유에서 그는 제노사이드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국제사회의 신속한 개입과

 처벌이 불가피하다고 역설하였습니다.


이 협약은 이러한 호소와 제2차 세계대전의 비극적 경험에 대한 반성이 한데 어우러져

탄생한 결정체였는데 구유고 국제법정(1993)과 르완다 국제법정(1996)도 바로 이 협약을

 토대로 삼아 탄생한 것입니다.


제노사이드 방지를 위한 국제사회의 노력은 그 후에도 계속되어 1998년에는 반인도 범죄와

 제노사이드 범죄 등에 관한 ‘로마 규정’이 제정되었고, 이를 근거로 2002년에는 국제형사재판소

(ICC, International Criminal Court)가 설립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 협약이 추구했던 ‘처벌을 통한 예방’

 효과는 거의 나타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근본적인 이유는 보호 집단에 관한 규정이 너무 협소한 데서 찾을 수 있는데 이 협약은 무엇보다

 정치 · 사회적 이유에서 위협받는 집단을 보호 집단에서 배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 때문에 스탈린 치하 소련에서 대대적으로 자행된 정치적 반대파들에 대한 숙청과,

 제1차 세계대전 동안 터키에서 일어난 아르메니아인 학살도 국제사회가 처벌할 수 있는

 근거가 없었습니다.


이와 비슷한 이유에서 아마존 산림 개발을 둘러싼 경제적 갈등 때문에 파라과이에서 일어난

 원주민들에 대한 체계적 살해에 대해서도 국제법정은 무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문제점들이 연이어 제기되면서 국제연합 내에서도 이 협약의 개정이 논의되고 있기는

 하지만, 제노사이드 경험과 관련된 여러 국가들의 강력한 반발 때문에 더 이상의 결실은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이루어진 국제 학계의 논의를 바탕으로 한다면, 터키에서 일어난 아르메니아인 학살(1915~1916)과

 보스니아 · 코소보(Bosnia · Kosovo) 사태(1991~1999)와 같이 민족적 · 종교적 동기에서 발생한 비극,

스탈린 대숙청(1930~1946)과 캄보디아의 킬링필드(1975~1979)와 같이 정치적 대립 과정에서 일어난 학살,

 나치 독일의 유대인 대학살(1939~1945)과 르완다 대학살(1994)과 같이 인종적 · 종족적 갈등에서 발생한

참사 등이 대표적인 제노사이드의 사례에 속합니다.


중요한 점은 우리 현대사의 경험도 제노사이드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것으로 관동대지진 때

 일어난 재일 조선인 학살처럼 전형적인 의미의 제노사이드는 아닐지라도, 제노사이드로

 해석될 수 있는 일들을 역사의 한 귀퉁이에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꺼지지 않는 불 주변으로 놓여진 희생된 아르메니아인들을 추모하는 꽃송이들 





"악을 숨기거나 부인하는 것은 상처에 붕대를 감지 않아

계속 피를 흘리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5년 4월 아르메니아를 방문해 100년 전 벌어진 150만명의

 아르메니아인 집단 살해를 대학살로 지칭하고 희생자들을 위로했습니다.


교황청이 이를 언급한 것은 이때가 처음으로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은

 20세기에 벌어진 첫 번째 대학살이었습니다.


 러시아 공산주의혁명 이후 2,000만명, 홀로코스트의

1,100만명 대학살의 전조였던 셈이었지요. 


유럽과 아시아의 교차로 코카서스에 있는 아르메니아는

 유구하면서도 비극적인 역사를 가졌습니다.


 정신적 랜드마크인 아라라트산은 노아의 방주가 세상의 끝에서 머물렀다던 곳으로

 수도 예레반은 2018년에 탄생 2800주년을 기념했을 정도입니다.


 수도 인근에는 기원전 4000년 정도의 유적들이 많은데 이 시기의 아르메니아는 로마가 기독교를

인정하기 전 301년에 기독교를 국교로 삼은 최초의 기독교 국가이기도 합니다.


안타까운 점은 문명의 교차점에 위치해 페르시아·동로마·몽골·튀르크(셀주크·오스만)

·소련 등 세계 제국들의 지배 하에 어렵게 생존해왔다는 것입니다.


가장 큰 비극은 이슬람계 오스만제국 아래 있을 때 일어났는데 1894~1896년과 1909년 3~4월

 10만~30만명이 죽었고 1차대전 중에는 무려 150만명 가량의 대량학살(genocide·제노사이드)

이 벌어졌습니다.


첫 사건은 러시아 남하를 계기로 아르메니아인들이 독립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대학살은 1차대전의

 와중에 영국이 오스만을 침공하자 반란을 우려해 아르메니아인들을 이라크 일대로 이주시키는

 과정에서 벌어졌습니다.  

미국 상원이 최근 1차대전 중 오스만제국이 저지른 아르메니아인 대량학살을 인정하고

 희생자를 추모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습니다.


미국 의회가 상하원 일관되게 ‘아르메니아인의 죽음에 터키가 책임져야 한다’는 입장을

 내놓은 것과 달리 미국 행정부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입법부와 엇박자를 내고 있는데 

 그 이유는 터키가 근자에 나토를 탈퇴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 이를 달래기 위함입니다.

 
 어떤 의미로 보면
2019년 10월 미국 하원 결의안 처리를 이은 것으로 미국은 자유와 인권을

 기치로 내걸고 있다는 점에서 보면 늦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터키의 에르도안 대통령은  美의회의 "아르메니아 학살" 책임 추궁에 역으로

 "아메리카 원주민 학살을 문제삼을 것"이라고 하고 있으니 이 문제는 아직도

국제적으로 해결이 요원한 상태입니다.

 현재 아르메니아인 학살을 인정하고 있는 나라는 아직도 30여개국에 불과한데 

근자에 벌어졌던 캄보디아 킬링필드와 코소보 전쟁,그리고 가장 최근에 벌어지고 있는

미얀마의 로힝야족 등 학살은 현제에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예레반 시가지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