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연수구 옥련동 능허대의 가을(2019.10.31)

2019. 11. 3. 10:14나의 이야기














연수구 옥련동(송도 근처)의 능허대 전경




능허대는 백제 근초고왕 27년(372)부터, 웅진으로 도읍을 옮긴 문주왕1년(475)까지 사신들이

 중국 동진(東晋)을 왕래할 때 출항하던 곳으로 이 나루터는 한나루(漢津)라 불렀습니다.


당시 백제의 정치 상황은 고구려, 신라와 적대관계에 놓여 있었으며, 중국도

남·북조(南·北朝)로 나뉘어 서로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국 남조와 교류하고 있던 백제 사신들은 고구려를 거쳐가는 육로를 이용하지

못하고, 이곳 능허대를 통해 산동반도의 등주와 내주에 이르는 뱃길을 이용하였습니다.


지금은 간척사업으로 아파트와 유원지가 개발되어, 도심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으며

 현재 이곳에는 작은 정자와 연못이 있으며, 연못에는 인공폭포와 분수대가 있습니다.



※ 동진(東晉, 317년 ~420)은 중국의 서진(西晉) 왕조가 유연(劉淵)의 전조(前趙)에게

멸망한 후, 사마예(司馬睿)에 의해 강남(江南)에 세워진 진(晉)의 망명 왕조로 

서진과 구별하여 동진이라고 부릅니다.






















참고자료(당시 능허대의 위치 및 동진시대의 교역로전경)

























능허대 부근의 한우갈비집 인공폭포 전경
























능허대공원 표지판

























한나루 언덕 기생바위에 얽힌 설화
























백제 사신선 전경

























능허대 주변의 인공연못

























한나루 언덕의 기생바위 전경



 백제시대에는 이 곳이 바다에 맞닿은 지역인지라  이 곳 능허대 정상부는 바다를 조망하기가
 좋았을 것으로 보여지는데 지금은 매립으로 인하여 아파트촌으로 변한 탓에 옛 흔적을 유추할수
밖에 없습니다.

청량산에서 뻗어 내려 온 능허대 구릉은 서해안에 접해져 해안과 내륙 모두를 조망하는데느
그 당시에 탁월한 지형 조건으로 여겨집니다.






































 철모르는 강남제비꽃


























능허대 전경




능허라는 뜻은  '허공을 가르다'라는 뜻으로 경치가 아름다운 강과호수 또는 절경의

 바닷가등에  표현하는데 사용되는 단어 입니다.



























능허대 전경




인천은 백제 초기 대중국 교섭의 전진기지로 백제의 사신들은 지금의 연수구 옥련동에
 있는 능허대(凌虛臺)에 이르고, 이곳의 한나루(大津)에서 바람을 기다렸다가
산둥반도로 출항하였다고 합니다.

능허대의 한나루는 백제 근초고왕(372년) 때부터 조선시대까지
 중국으로 가는 출발점이었던 것이지요. 

 고구려에서 남하한 비류와 온조가 각기 미추홀과 한성에 터전을 잡았으니
 인천은 비류백제의 터전이었습니다.

그 후, 온조가 비류를 흡수하고 한강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하여
 고대국가의 기틀을 닦았습니다.

백제는 5세기 중반 고구려에게 한강을 빼앗기기 전까지 한강을 통해 황해로
 나가고 황해를 건너 중국과 교류하였습니다.

백제가 삼국 중 가장 먼저 한강을 차지하였는데 한강은 황해로
 들어가는 한반도의 중요한 강입니다.

 한반도의 중심에 있는 한강은 대중국 교섭의 주요교통로로 강 주변은 드넓은 평야지대가
 펼쳐져 있어 고대로부터 한강을 차지하는 국가가 고대사의 주역이 되었습니다.

백제(百濟)의 어원은 '백가(百家)로서 바다를 경영하는
나라(百家濟海)'에서 나왔습니다.

백제가 일찍부터 황해를 경영하는 해상강국이었음을 알 수 있는데 백제는 고이왕 때인
 280년에 국가체제를 갖추고 중국의 서진(西晉)과 통교하였습니다.

10년간 8회의 사신이 황해를 오갔는데 백제가 황해를 무대로 중국과
 활발하게 교류한 시기는 남북조시대입니다.

특히, 남조(南朝)의 송(宋)·제(齊)·양(梁)·진(陳)과는
 33회에 이르는 사신을 보냈습니다.

백제와 남조가 황해를 오간 도시는 인천과 난징(南京)으로 능허대의 한나루를 출발한 백제의 배는
 강화만(江華灣)에서 황해를 횡단해 중국 산둥반도의 청샨터우(成山頭)에 도착했습니다.

다시 연안을 따라 창장(長江)까지 내려간 후 강을 거슬러 난징에 도착하는 항로로
 백제는 대중국 사신을 통해 방물을 교환하였습니다.

백제에서 보낸 방물은 과하마(果下馬), 빛을 내는 갑옷(明光鎧), 철갑(鐵甲), 조각한 도끼(雕斧) 등으로
 또한, 남조시대의 『양서(梁書)』에는 아신왕 시절에 생구(生口)를 보냈다고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생구는 포로를 의미하는데 당태종은 백제가 철갑과 조부를 보내오자 매우 흡족하여
 비단 도포와 채색비단 3000단을 주기도 하였습니다. 

 백제는 사신단 교류를 통해서 중국의 선진문물을 도입하였는데 유교·불교 등의
 경전은 물론 박사들을 모셔왔습니다.

또한, 신무기도 도입했는데 이는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선진문물을 도입한 백제는 전파에도 힘을 썼는데 백제는 왜와의 교류를 통해
 자신들이 중국에서 수용한 선진문물을 재전파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백제는 일본과도 활발한 교류를 하였는데 일본으로 가는
 항로도 한나루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곳을 출발한 백제선은 황해연안을 따라 남하한 후 제주해협을 거쳐 쓰시마(對馬島)와
이키시마(壹岐島)를 지나고 간몬해협(關門海峽)과 세토내해(瀨戶內海)를 통과하여
 오사카(大阪)에 도착하였습니다. 

 근초고왕 때에는 아직기와 왕인을 파견하여 유교 경전을 가르치고,
 논어와 천자문을 전해주었습니다.

무령왕 때에는 오경박사를 파견하여 일본 왕실에 유교경전을 학습토록 하였고 무왕 때에는
 책력과 천문지리서, 둔갑 및 방술서 등 각종 서적을 전해 일본이 다양한 선진문물을
 익힐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인적교류도 활발하였는데 율사(律師)와 선사(禪師)는 물론 불상과 사찰을
지을 수 있는 기술자들도 파견하였습니다.

 이처럼 백제가 중국과 일본을 오가며 항해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뛰어난 조선술과 항해술을
 바탕으로 일찌감치 황해를 장악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백제는 황해에서의 제해권(制海權)을 공고히 하여 동아시아 문화권의 중심축이
 될 수 있었던 것으로 백제는 해상강국이었습니다.

뛰어난 항해술과 조선술로 황해를 주름잡았는데 이는 의자왕의
 사례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의자왕은 당시 왜국의 실권자에게 바둑판을 선물하였는데 자단목(紫檀木)으로 만든
바둑판에 상아로 선을 만들었으며 화점(花點)은 꽃무늬로 장식하였습니다.

자단목의 원산지는 인도 남부의 스리랑카로 상아 역시
 인도와 동남아시아가 주산지입니다.

의자왕이 선물한 바둑판은 백제의 해상교역활동이 황해는 물론 인도와 동남아시아까지
 이르렀음을 알려주는 증거물로  김부식은 자신이 집필한 『삼국사기』에서 『신·구당서』
를 인용하여 백제의 영역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습니다. 

  '백제의 서쪽 경계는 월주(越州)이며, 남쪽은 왜(倭)인데 모두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으며,
북쪽은 고구려가 있다. 백제의 왕이 있는 곳은 동서로 두 성이 있다' 월주는 지금의 중국
 저장(浙江)성의 양자강 남쪽 회계(會稽)지역을 일컫는데  이 기록은 백제가 황해를 내해(內海)로
 삼아 중국 동부와 한반도의 서부를 아우르는 국가였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백제의 왕들이 동서로 두 성에 있었다는 것도 내륙 백제와 반도 백제를 말해주고 있는 것으로
 이러한 기록은 중국의 사서인 『송서(宋書)』, 『양서(梁書)』, 『남제서(南齊書)』,
『북제서(北齊書)』, 『남사(南史)』, 『북사(北史)』 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양직공도(梁職貢圖)'에는 백제가 요서지역을 차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변에는 수목이 우거져 주변 조망은 어려운......ㅜㅜ

























철모르는 황매화



























도로변의 만개한 골드베리 전경




다시 남는 시간을 활용하기 위하여 송도의 인천상륙작전 기념관과 가천박물관으로 향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