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8. 12. 14:04ㆍ나의 이야기
홍경궁의 침향전 전경
홍경궁 안내도
홍경궁공원 출입문 전경
나무 그늘 아래에서 여가 생활을 즐기는 시안 시민들
복원된 침향전 전경
당나라 장안성에는 3개의 궁전 건축군이 있는데 태극궁(太極宮)·
대명궁·흥경궁(興慶宮)이 바로 그 것 입니다.
장안성의 중축선 북쪽에 자리한 태극궁을 기준으로, 대명궁은 그 동북쪽에
자리하고 흥경궁은 동남쪽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 3대 궁전을 지어진 순서에 따라 살펴보면 수문제 때 세워진 태극궁의 본래 명칭은
‘대흥궁(大興宮)’이었고 이연(李淵)이 당을 건국한 뒤 대흥궁의 주인이 되었고,
예종(睿宗) 경운(慶雲) 원년(710년)에 이르러 ‘태극궁’으로 그 명칭이 바뀝니다.
그런데 대당 제국을 상징하는 궁전은 태극궁이 아닌 대명궁입니다.
“구중궁궐 궁문이 열리고 만국의 사신이 황제에게 절을 올린다”라고 왕유(王維, 701~761)가
노래했던, 실크로드의 동방 성전 대명궁은 고종 이후 당나라가 멸망하기까지 200여년 동안
중국정치의 중심지였습니다.
이 대명궁을 처음 지은 이가 바로 태종으로 태종이 대명궁을 짓게 된 건 그가 피서용 행궁으로
사용하던 구성궁을 이연이 혐오했기 때문입니다.
구성궁은 수문제가 아들 양제에게 살해당한 곳으로 ‘현무문(玄武門)의 변’으로 인한
트라우마가 남아 있는 이연에게 구성궁은 매우 꺼림칙한 곳이었습니다.
태종이 아무리 오길 청해도 이연은 그곳에 가지 않았는데 때마침 태상황(이연)을 위한 피서용 궁전을
지음으로써 황제의 효성을 만천하에 알리자는 상소가 올라오자 태종은 태극궁 동북쪽의 용수원에
아버지를 위한 피서용 궁전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영원히 평안하라는 의미에서 ‘영안궁(永安宮)’이라고 이름했는데 그런데 영안궁을 짓기 시작한
이듬해(635년)에 이연이 사망하면서 공사는 중지되었습니다.
대명궁으로 개칭한 것도 이 때로 이후 대명궁은 고종의 손에서 완성됩니다.
류머티즘을 앓던 그는 습기 있는 곳을 피하고자 태극궁에서 대명궁으로 거처를 옮겼고
이후 마지막 황제 소종(昭宗)에 이르기까지 대명궁은 당나라 역사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정치 중심지였습니다.
고종 이후의 황제 가운데 단 한 명, 대명궁이 아닌 ‘흥경궁’에서
지낸 이가 있으니 바로 현종(玄宗)입니다.
융경방(隆慶坊)에 거주하던 이융기(李隆基)가 황제가 된 뒤 그의 형제들은 축하의 의미로
융경방에 있는 자신들의 저택을 헌납하고 인근으로 이사했습니다.
바로 이곳 융경방에 흥경궁이 들어서게 되는데 개원(開元) 16년(728년)부터 안사(安史)의 난으로
현종이 장안에서 도망치기 전(756년)까지가 흥경궁의 전성기였습니다.
이후 흥경궁은 정치 중심지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퇴위한 황제가 머무는 곳이 되었습니다.
당나라의 멸망과 더불어 자취가 사라졌던 흥경궁은 1958년에 복원 공사를 통해
시안 시민을 위한 흥경궁 공원으로 거듭태어 났습니다.
현종이 양귀비(楊貴妃)에 빠져 지냈던 곳인 만큼 이곳 흥경궁 공원은 그들에 관한 기억을 떠올리기에
안성맞춤인 장소인데 그 옛날 두 사람이 모란을 감상했던 화려한 봄날 홍경궁속으로 들어가 봅니다.
붉은빛, 자줏빛, 분홍빛, 새하얀 빛의 모란이 만발한 침향정(沈香亭) 가에 음악소리가
울려 퍼지고 양귀비와 술을 마시며 모란을 감상하던 현종이 갑자기 한림학사(翰林學士)
이백(李白)을 불러오라 명합니다.
공교롭게도 이백은 잔뜩 취해서 황제 앞에 불려 와서도 여전히 취한 상태였었습니다.
현종은 그를 곁으로 올라오게 하였고 이백은 고역사(高力士)에게
자신의 신발을 벗기라고 합니다.
황제의 신임을 한 몸에 받고 있던 고역사이건만 무릎을 꿇고
이백의 신발을 벗겨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겨우 정신을 차린 이백에게 현종이 어서 시를 지으라고 재촉하였는데 붓을 집어든 이백은
일필휘지로 시를 써 내려 갔는데 바로 청평조사(淸平調詞) 3수로 양귀비를 선녀에 비유한 뒤,
마지막에는 아름다운 꽃(모란)과 미인(양귀비) 덕분에 온갖 근심을 날리고 침향정 난간에
기대어 웃음 짓는 군왕(현종)을 노래했습니다.
현종과 양귀비를 모두 만족시킨 이 시가 뜻밖에도 화근이 될 줄이야!
조비연(趙飛燕)도 양귀비보다 못할 거라는 구절이 문제였습니다.
한나라 성제(成帝)의 황후였던 조비연은 왕실을 망가뜨린 악녀의 전형으로 물론 이백은
조비연을 미인의 대표 격으로 인용했지만, 무릎 꿇고 이백의 신발을 벗겨야 했던 고역사가
이 구절을 트집 잡아 양귀비에게 참소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현종은 이백에게 궁을 떠날 것을 명합니다.
이백은 청평조사에서 ‘경국(傾國)’이라는 말로 미인을 표현했습니다.
경국이란 나라를 기울게 할 정도의 미모로 황제가 미혹되어 나라의 위기조차 감지하지 못할 정도의
아름다운 여인을 일컫는 말로 엄밀히 따지자면 미인에겐 죄가 없고 미혹된 황제가 죄인으로
현종도 그리고 태종도 자신의 갖가지 욕망 앞에서 무너져 버렸습니다.
모란은 꽃이 크고 화려할 뿐만 아니라 위엄과 품위를 지녀
부귀화, 또는 화중왕으로 불리워집니다.
백화의 왕으로 꼽힐 만큼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꽃답게 이명(異名)도 많은데 목작약을 비롯해서
화왕(花王)•백화왕(百花王)•부귀화(富貴花)•낙양화(洛陽花) 등 다양하게 불리워집니다.
목작약은 작약과 비슷한 목본이란 뜻으로 모란과 작약을 헷갈려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모란은 목본이고 작약은 초본(草本)이란 점을 상기하면 어렵지 않게 구분할 수 있습니다.
두 꽃이 모두 꽃모양이 장려하고 잎 모양이 단정하여 백화 중에 빼어난 아름다움으로
뭇사람들의 사랑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꽃을 뜻하는 한자의 ‘花’는 풀초 밑에 변화를 뜻하는 ‘化’자를 붙여놓은 글자로 꽃처럼 변화무쌍한 것도
드문데 어느 날 불쑥 꽃망울이 터져 올라 눈부시게 피어나 향기를 흘리다가 어느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게 꽃이라고보면 ‘花’란 글자는 꽃의 특성을 가장 잘 표현한 글자란 생각이 듭니다.
알다시피 모란의 원산지는 중국으로 모란은 중국 사람들로부터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아온 가장 중국적인 꽃으로 꼽힙니다.
모란이 수많은 꽃 중에 화왕으로 불리게 된 것은 꽃 자체의 화려함도 있지만 양귀비를
편애했던 당 현종의 모란에 대한 사랑도 한몫을 했습니다.
당 현종은 모란꽃을 지극히 사랑하여 장안의 홍경궁에 황제의 권력으로 수집한 수많은 모란을
심어두고 양귀비와 함께 꽃을 즐겼다고 합니다.
그러나 오늘 홍경궁 공원에서는 침향정 근처 화단에서만 약간의 모란을 찾아볼 수가 있었는데
철이 지나서인지 아니면 세월이 흐르면서 양귀비와 당 헌종의 사랑이야기가 담긴 모란꽃은
이 곳에서도 이젠 많이 잊혀져 버린 과거 이야기가 되버렸습니다.
침향전 안내판
시안에 거주하는 노인이 직접 그린 국화도를 바라다 보는 시안 거주 한국인 모녀로
잘 그린 그림은 매매도 이루워진다는 생각이......
홍경궁내의 싱칭호와 소서호를 이어주는 작은 운하를 배경으로
홍경궁 분수대 위에서.....
홍경궁의 소서호 전경
홍경궁의 큰 호수인 싱칭호 전경
주어진 시간내에 싱칭호 주변을 한 바퀴돈다는 것은 절대 무리였지만 그래도 부지런하게
발품을 팔아 싱칭호를 한 바퀴 땀깨나 흘리며 돌아봅니다.ㅎ
홍경궁의 큰 호수인 싱칭호 가운데에 있는 작은 섬은 호심도
홍경궁공원에서 현대무용을 연습하는 시안의 처자들
현대무용을 연습하던 처자들 친구로 채운각을 배경으로 잠시 모델이 되어 준 아가씨
우측의 채운각
회족의상을 입고 전통춤에 열중하는 시안시민들
석류꽃이 만개한 홍경궁공원
점심을 먹으러 들린 시안 시가지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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