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산 독산성과 세마대지(2018.1.6)

2018. 1. 8. 13:39나의 이야기









오산 독산성의 세마대 전경



오산 독산성과 세마대지는 사적 제140호로 독성산성(禿城山城)이라고도 불립니다.

돌로 쌓은 산성으로 둘레는 약 3.6㎞인데, 현재 약 400m 정도의 성벽과 성문 4곳이 남아 있습니다.

쌓은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전략적 요충지에 자리하였으므로, 한강 하류에 도성을 두었던

백제시대에 축조되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이 산성은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를 거쳐 임진왜란 때까지 계속 사용되었으며

1593년(선조 26) 7월에 전라도관찰사 겸 순변사였던 권율(權慄)이 근왕병 2만 명을 모아

북상하다가 이곳에 진을 치고서 왜적을 물리쳤고, 이듬해 9월 11일~14일에는 백성들이

 힘을 모아 불과 4일 만에 고쳐 쌓았습니다.


이러한 과정은 주변에 알려져 금지산성(衿之山城)에서도 군량을 모으고 병사를 훈련시켰으며,

 월계산성(月溪山城)과 파사산성(婆娑山城)까지 영향을 미쳤습니다.


 1595년에는 포루(砲樓) 시설을 갖추었고, 1597년 2월에는 왜병이 쏜 조총의 피해를 막기 위해서

 성벽 안쪽에 평평한 집을 지었으며, 석차(石車)와 함께 투석용으로 쓰던 포차(抛車)를 배치하면서

 성 밖에 목책을 세우려고 계획하기도 하였습니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는 전략적 위상이 계속 중시되어, 1602년(선조 35)에

 변응성(邊應星)이 수리하여 쌓았습니다.


 1796년(정조 20)에 수원성 축조와 함께 고쳐 쌓아 오늘에 이르는데,

당시 성의 둘레는 1,800보이고 성문 4곳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 산성은 많은 군사들이 주둔하기에는 물이 부족한 편으로 이러한 것이 세마대(洗馬臺)를

 낳았는데 1593년에 권율이 이곳에 주둔하였을 때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이끈 왜군이

이 독산성으로 처들어 와 산에 물이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는 물 한 지게를 산 위로

 올려보내며 조롱하였다고 합니다.


권율은 물이 많은 것처럼 보이기 위해 백마를 산 위로 끌어 올리고서는 흰쌀을 끼얹어

 목욕을 시키는 것처럼 꾸며서 물과 식량이 풍족한 것 처럼 속여 왜군의 진격을

멈추게하였다고 합니다.


세마대는 1957년에 복원되었습니다.
















오산 시가지 전경


















보적사의 출입문으로 쓰이고 있는 동문 전경
















보적사 대웅전 전경


보적사는 전통사찰 제34호, 세마사(洗馬寺)였다가 보적사(寶積寺)로 명칭이 변경된 사찰로

용주사 본말사지에 의하면 보적사는 창건당시 이세계 중생의 질병치료, 수명연장, 재화 소멸,

 의복, 음식 등을 만족케하고 부처의 행을 닦아 무상보리의 진리를 터득케 한다는 약사여래를

 모신 약사전을 정전으로, 독산성의 역사와 함께 오랜 세월을 같이 하였으나 1990년

도광정운(道光正云)스님이 불사 때 석가여래불을 모신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창으로

정전이 건립되면서 대웅전으로 명칭이 변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보적사는 백제의 고성인 독산성 정상부 하단 동문 앞에 위치해 있는데, 삼국시대에

독산성을 축성한 후 성내인 현재의 터에 전승을 기원하기 위해 창건된 이래 여러 차례의

 전란으로 인한 중건을 거듭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보적사란 이름이 지어진 것은 백제시대 보릿고개로 끼니조차 잇기 어려운 노부부가

 겨우 쌀두되만이 남아 있어 굶어죽을 지경에 이르러 구차하게 사느니 차라리 부처님께

바치겠다고 결심한 후, 공양후 집에 돌아와 보니 곡간에 쌀이 가득차 있는 기적이

 발생하였다고 하며 열심히 공양하여 보화가 쌓인 신통력 있는 사찰이라 하여

보적사라 명명되었다고 합니다.

1988년 7월 27일 전통사찰 제34호 지정되었습니다.






















수원 시가지 전경
















오산시가지 전경
















세마대 전경
















이승만대통령의 친필 현판
















세마대 중건기


















보적사 방향에서 바라다 본 세마대 전경

















치(稚 : 성벽에서 돌출시켜 쌓은 성벽)
















북문쪽 독산성 전경



















북문쪽 독산성















독산성과 암문이 바라다 보이는 전경



독산성은 사적 제14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본성의 총 연장은 1,100m이며

 내성은 350m에 달하는 아담한 산성입니다.


 독산성의 처음 축조연대는 분명치 않지만 독산성의 위치적 특성이 용인, 양지 간에 있는 고성과

 남한산성이 기각지세를 이루어 왕도의 문호를 굳게 한다는 전략상의 이점이 있는 것으로

보아 매우 중요한 곳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원래 백제가 쌓은 고성이었고, 신라통일기나 고려시대에서도

 군사상 요지로 이용되어 왔다고 추정합니다.


 독산은 본래 석대산, 향로봉이라고 불려왔고 조선시대에는 독산성이라 불려왔으나

 임진왜란 때 권율장군이 폈던 진묘(眞妙)한 병법전략에 연유해 지금은『세마산』또는

『세마대』라고도 부르고 있으며 정상에는 이승만 대통령 친필의 세마대라는 현판이

 붙은 누각 건물이 있습니다.



독산성은 군사기지로서의 주요 위치에 놓여있긴 하지만, 샘물의 부족이 흠으로 지적되는데

 이 때문에 1593년(선조26) 명나라 원군이 평양을 수복하고 남하함에 전라도 순변사이던

 권율장군이 명군과 호응하여 서울을 수복하고자 2만 명의 군사로 이곳에 진을 치고 대군과

대치한 독산성 전투는 너무나 유명합니다.


그때 왜장 가토 기요마사가 이끈 왜군은 이 벌거숭이산에 물이 없을 것으로 예상하고

 탐정군사에게 물 한 지게를 산 위로 올려 보냈는데 권율장군은 왜군의 의도를 꿰뚫어 보고

 백마를 산 위에 끌어올려 흰쌀을 말에 끼얹어 말을 씻는 시늉을 하게 하였습니다.

이것을 본 왜군은 성내에 물이 많은 것으로 알고 퇴각하였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샘물의 부족한 단점을 권율장군이 슬기롭게 극복한 세마대의 일화가

 전해지고 있으며, 1957년에 복원되었습니다.

※ 1977년 간행된 전국문화유적총람에 의하면「독산성 및 세마대지」의 연혁에 대하여

 백제때 축성된 고성이었고 통일신라나 고려시대에도 군사상 중요한 요지로 되어 왔으며

 임진왜란 때 권율장군이 주둔했고 변이중으로 하여금 화포를 발명, 제작케 하여

 행주대첩에서 승전케 하였다고 합니다.


또한, 임란후 조정에서는 독산성에 세마대를 장엄하게 세우고 병기창을 두어 무예 연습을

 하게 하였으며 정조16년(1792년)에 독산성과 세마대를 중수하였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