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8. 16. 21:18ㆍ나의 이야기
중구 정동에 있는 덕수궁 담장 밖의 중명전 전경
중명전 전경
덕수궁의 원래 이름은 경운궁입니다.
1907년 고종이 왕위를 아들인 순종에게 물려준 뒤 덕수궁으로
궁궐의 이름을 변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중명전의 처음 이름은 수옥헌이었는데 황제 서재의 용도로 지으면서 수옥헌이라 이름지었으나
고종이 편전으로 사용하면서 1906년경 중명전이라 바꿔 부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중명전은 덕수궁을 대한제국의 황궁으로 정비해 가는 과정에서 황실의
서적과 보물들을 보관할 황재의 서재로 지어졌습니다.
1904년 덕수궁에서 큰불이 나 고종이 이곳으로 이어하면서
편전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였습니다.
1905년 11월무력을 동원한 일본의 강압속에 중명전에서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었습니다.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박탈당하고 주권이 크게 흔들리게 되었는데 고종은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선언하였고, 각계에서 조약 체결 반대 움직임이 거세게 일어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1907년 일본은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이어 친일내각을 앞세워 대한제국의 자주권을
잠식하는 여러 조약의 체결을 강요하였습니다.
행정,사법,군사권을 장악당한 대한제국은 결국 1910년 일본에 병합되었습니다.
비운의 역사 현장 중명전에서 열강의 제국주의 논리 아래 사라져갔던 대한제국의 최후를
잘 살펴 후대의 교훈으로 삼았으면 합니다.
우물전경(2009년 중명전 복원공사중 발견된 우물로 고종이 중명전에 기거하였을
당시(1904년~7년)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제2전시실 전경(을사늑약의 현장)
을사늑약의 진실
1.조약의 부당성: 최소한의 형식도 갖추지 못한 조약
-을사늑약문 원본에는 제목이 없으나 일본이 국제사회에 공포할 때에는
임의로 "Convenion"이라는 제목을 붙여 보호조약으로 성격을 규정하였다.
-각국 통수권자가 조약체결 당사자에게 주는 전권 위임장이 없다.
-대한제국 최고 통수권자인 고종의 어새와 비준 절차가 없었다.
2.무력에 의해 강제로 체결된 조약
-일본의 군대를 동원하여 무력과 강압에 의해 체결되었다는 점에서
을사늑약은 애초에 무효인 조약이었습니다.
이 점에 근거하여 이미1906년 프랑시스 레이가 국제 공법에 기고한 논문에서
을사늑약의 불법성과 무효성을 주장하였고 ,1935년과 1963년에도 국제법상으로도
무효인 조약임이 확인되었습니다.
을사늑약문
제3전시실(을사늑약 전후의 대한제국)
제1전시실 전경(덕수궁과 중명전)
경복궁에 거주하던 고종은 아관파천 이후 덕수궁으로 환궁하였는데 1897년 대한제국 선포와
함께 덕수궁은 황궁으로 정비되었고 영역도 크게 확대되었습니다.
중명전은 1904년 덕수궁 화재 이후 황궁의 편전으로 사용되었는데 1907년 고종이 황제의
자리에서 강제 퇴위된 후 함녕전으로 돌아가자 궁궐 전각으로 기능을 잃어 버렸다고 합니다.
제4전시실(대한제국의 특사들)
대한제국 고종 "황제어새"(보물 제 1618호 복제품으로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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