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문화마을 성북동을 찾아서.2(이종석 별장, 심우장, 북정마을 2017.4.3~4.4)

2017. 5. 5. 00:06나의 이야기








이종석 별장(서울특별시 민속자료 제10호, 시대:1900년대)



이 집은 일제 강점기에 부자로 널리 알려진 이종석이 성북동에 건립한 별장입니다.


성북동 산자락에 위치한 이 집은 바깥 마당에 우물이 있고 일각대문을 지나면

 행랑채와 안채가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행랑채는 특이하게도 ㄱ자형으로 일반적인 가옥의 공간 구성입니다.


행랑채와 안채 사이에는 원래 담장이 놓여 있었고 여기에 난 중문을 통해

안채로 드나들도록 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ㄱ자형 안채는 대청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누마루를 두고

 왼쪽에는 안방을 두었습니다.


누마루에는 원래 일관정이라고 쓴 글씨가 걸려 있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 양반가옥에서 볼 수 있었던 누마루를 사용하였다는 점에서 조선 말기

신분에 따른 주거 형식의 경계가 허물어진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성북 구립미술관 전경



2017.4.3 석가탄신일에 수연산방을 돌아보고 근처에 있는 이종석 별장을 찾아 가보려고 하였으나

 당체 안내 지도로는 찾을 수가 없었는데 오늘 다시 이곳으로 찾아 와서 그 연유를 알 수가 있었습니다.


안내 지도상으로는 덕수교회 위에 이종석 별장이 있는 것으로 표기가 되어 있었는데

 그러했던 이유는 이 이종석 별장이 덕수교회 소유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도 모르면서 덕수교회 주변에서 이종석 별장을 찾았으니.....ㅜㅜ


암튼 성북동 역사 문화마을 안내 지도는 현지에 와서 이용하기에는

크게 도움이 안된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암튼 이정표도 정확하지도 않았고 길표식도 제대로 안되어 있다보니

감각과 길동냥에 의존혀 찾아야 하였기에 답답하기만 하였습니다.















이종석 별장을 찾아가는 길 도로변에 독특한 건물이 바라다보여

공사 중에 있는  그  건물 안으로 들어가 봅니다.


















좀 독특한 서양식 건물인지라 호기심을 가지고

 건물 외양을 앵글에 담아 봅니다.


















표지판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창설자와 영성



천주교 복자사랑 피정의 집으로 도시속의 영혼이 숨쉬는 공간으로 60년 수도생활이

 묻어 있는 아름다운 곳이라서 나름 건물 외양이 독특하였습니다.  
















BMC 흉상
















이 피정의 집에 사는 둥이라는 세파트의 개집도

 교회 건물이라서 웃음이 나왔습니다.ㅋ







 








암튼 이종석 별장을 가보려면 이 덕수교회(장로회)를 안걸쳐 갈 수가 없었기에

 할 수 없이 교회로 들어가 봅니다.

















덕수교회 본관 전경

















잘 꾸며진 덕수교회 정원

















이종석 별장은 덕수교회와 수련관사이로 진입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정확하게 표현을 하면 수련관 후면으로 아시면 정확합니다.



















이종석 별장 전경

















ㄱ자형 일반가옥구조의 행랑채 전경




















행랑채
















이종석 별장 후면















행랑채 후면에는 쪽문이 있어서 바깥의 우물 이용이 편하도록 만들어져 있었으나

 그 우물쪽은 현재 공사중인지라  제가 사진에는 담지 않았습니다.



















출입문은 평상시 관람 시간대에도 닫혀 있었으나  시건은 안되어 있는 탓에

 열어서 들어가 관람을 할 수 있도록 유지되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덕수교회에서 교회 행사시에는 교회가 활용을 하다가 찾아 오시는

관람객들의 편의를 위하여 개방형으로 운영을 하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참으로 교회가 지역 사회를 위하여 봉사하는

고마운 일을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각문에 표기된 일관정과 덕수교회 영성수련원 표지판
















이종석 별장 담장
















교회 뒷편 언덕에 목재 테크길이 보여 올라가 봅니다.
















두 번째 날은 절친도 함께 하였기에 ......ㅎㅎ















테크 전망대 쉼터 너머로 보이는 천주교 부지의 쉼터전경


이 곳이 무엇을 하는 곳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천주교 부지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서 

 이 고운 잔디가 곱게 깔려 있는 쉼터도 제 짐작엔 수도공간 같다는 생각이......



















덕수교회는 1997년에 창립50주년이었으니 이젠 70년이 된 교회라는 생각이.....

이젠 이 곳에서 심우장으로 향해봅니다.
















이향음식점으로 정원  끝 부분 출입문에 수연산방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난정원
















성북관


수연산방에서 도로변으로 나와 위쪽 심우장으로 향하는 길가엔 조경이 아름다운 음식점들이

 많이 있어 단체 모임이거나 작은 소모임 등을 하기에 아주 좋아 보입니다.















만해 한용운 조형물(심우장 골목길 진입로에 세워져 있음)


















심우장골목길 테크길을 오르면서 내려다 본 성북동 일원 




















심우장 출입문 골목 전경

















심우장 전경


시도기념물 제7호(성북구). 1933년, 김벽산(金碧山)이 초당을 지으려고 사둔 땅을 기증받아

 조선일보사 사장 방응모 사장 등 몇몇 유지들의 도움을 받아 지었습니다.


 이 곳에서 1934년 첫 장편소설인 『흑풍(黑風)』을 집필하여 『조선일보』에 연재하기도 하였습니다.


조선총독부가 위치하던 남쪽을 등진 곳을 택하여 북향의 집을 짓고 심우장(尋牛莊)이라고 하였습니다.


총 112.99평의 대지 위에 17.8평의 건평규모로 단층 팔작 기와지붕집으로 집의 구조는 정면 4간,

 측면 2간으로, 중앙에 대청을 두고 좌우 양쪽에 온돌방을 배치한 형태입니다.


 우측 서재로 쓰던 우측 방에는 尋牛莊(심우장)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습니다.


한용운은 만해(萬海)라는 호(號) 외에 필명으로 오세인(五歲人), 성북학인(城北學人), 목부(牧夫),

 실우(失牛) 등의 이름을 가끔 썼는데 목부란 ‘소를 키운다’는 뜻으로, 곧 내 마음 속의 소를

 키움은 왕생의 길을 멈출 수 없음을 나타낸다 하겠습니다.

즉, 심우장이란 불교의 무상대도(無常大道)를 깨우치기 위해 공부하는 집,

 공부하는 인생을 의미한 것입니다.


 1984년 지정되었고, 지금은 기념관으로 쓰고 있습니다.


















심우장 (만해가 기거했던 방) 


















심우장 후면
















만해 한용운(韓龍雲, 1879년 8월 29일 ~ 1944년 6월 29일)은 일제 강점기시인,

 승려, 독립운동가로서 본관은 청주. 호는 만해(萬海)입니다.


불교를 통한 언론, 교육 활동을 하였으며 종래의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참여를

 주장하였으며, 그것에 대한 대안점으로 불교사회개혁론을 주장하였습니다.


 3·1 만세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한사람이며 1944년 6월 29일중풍

영양실조 등의 합병증으로 병사하였습니다.


 독립선언서의 "공약 3장"을 추가보완하였으며 옥중에서 '조선 독립의 서'(朝鮮獨立之書)를

 지어 독립과 자유를 주장하였습니다.


1910년에 일본이 주장하는 한일불교동맹을 반대철폐하고 이회영, 박은식, 김동삼 등의

독립지사(志士)들을 만나 독립운동을 협의하였습니다.


 1918년 11월부터는 불교 최초의 잡지인《유심》을 발행하였고 1919년 3.1 만세 운동 당시

 독립선언을 하여 체포당한 뒤 3년간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하다 풀려났습니다.


 1920년대에는 대처승 운동을 주도하여 중에게도 결혼할 권리를 달라고 호소하기도 하였습니다.


 1926년 시집《님의 침묵》을 출판하여 저항문학에 앞장섰고, 불교를 통한 청년운동,

 언론활동에 참여하였습니다.


 1927년 2월부터는 신간회에 참여하여 중앙집행위원과 이듬해 신간회 경성지부장을 지냈습니다.


1918년에《유심》에 시를 발표하였고, 1926년님의 침묵〉등의 시를 발표하였습니다.


님의 침묵에서는 기존의 시와, 시조의 형식을 깬 산문시 형태로 시를 썼으며

 소설가로도 활동하여 1930년대부터는 장편소설《흑풍》(黑風),《후회》,《박명》(薄命),

 단편소설《죽음》등을 비롯한 몇편의 장편, 단편 소설들을 발표하였습니다.


 1931년 김법린 등과 청년승려비밀결사체인 만당(卍黨)을 조직하고 당수가 되었으나

 1937년 불교관계 항일단체를 적발하는 과정에서 만당사건(卍黨事件)의 배후로

 체포되었다가 풀려났습니다.


 저서로는 시집 《님의 침묵》을 비롯하여 《조선불교유신론》,《불교대전》,

《십현담주해》,《불교와 고려제왕》 등이 있습니다.


일제조선총독부에 대한 저항 정신으로 집도 조선총독부 반대 방향인 북향으로 지었고,

 식량 배급도 거부했다는 이야기는 매우 유명합니다.


 또한, 친일로 변절한 최남선이 탑골공원에서 인사를 하자,

만해는 모르는 사람이라며 차갑게 대했다고 합니다.


























심우장을 돌아 보고 대문을 나오면 보이는 표지판(성곽과 자연이 아름다운 북정마을)과

바로 옆에 안돌아보면 후회를 한다는 글귀에 흔들려 좁은 비탈골목길을 따라

비지땀을 흘리며 올라가 봅니다. 

















김광섭 시인의 성북동 비둘기 시 위에는 상징적으로 많은 수의 비둘기를 형상화하여

 성북동비둘기와 어울리도록 형상화시켜 놓았습니다.


















김광섭 시인의 성북동 비둘기


















비둘기 체육공원
















서울에서도 이제는 보기가 힘든 달동네

북정마을  























북정마을과 한양도성성곽
















북정카페















개발에서 소외된 북정마을은 서울에서도 얼마 남지않은

 소시민들의 삶의 마지막 터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빈부의 차를 가장 심하게 느낄 수 있는 삶의 터전이

 성북동 북정마을이 유일하다는 생각이 들기에 묘한 감정이 듭니다. 



















후박나무꽃

















북정마을의 길냥이




















북정마을에서 내려다 본 성북동 일원